브레스트-리토브스크 협정 > 적백내전 > 폴란드-소련 전쟁 > 전시공산주의 체제 >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 수립 > NEP(신경제정책) 논쟁과 소련 권력투쟁 > 스탈린과 1국사회주의 > 대숙청시대 > 독소불가침조약 > 독일의 소련침공

 


 

 

 

바야흐로 1900년대 초반은 제국주의 서구열강들이 해외식민지를 확보하는데 두 눈에 쌍라이트를 켠 시대였지.

 

이러한 제국주의 현상에도 여러가지 설명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존A홉슨과 레닌의 제국주의론이 있어.

 

그런데 제국주의에 대한 분석이란 어느정도 좌파적인 성향을 지닐수밖에 없어.

 

제국에서의 제국이란, 타국보다 월등한 능력과 의도를 갖고 타국의 주권을 무력으로 침탈할 능력이 있다는 강대세력이란 건 지난번에 설명했지?

 

국제정치의 여러 세력을 강자와 약자라는 이분법적인 시각으로 본 것과 강자는 약자를 월등한 능력으로 약탈하고 침탈한다는 점에서 제국주의론은 마르크스주의적이지.

 

아무튼 홉슨상님의 제국주의 분석은 어렵지 않아.

 

자본주의 국가에서 돈을 가진 자본가는 노동자(가변자본)보다는 설비(고정자본)에 투자를 하게 되고, 이에 따라 노동자의 임금 수준은 낮은 수준에 머물러.

 

설비에 투자를 했기 때문에 기계가 찍어내는 생산품은 너무너무 많은데, 노동자들의 임금 수준이 낮으니 이걸 살수 있는 수요가 없잖아?

 

생산은 과잉한데, 소비는 과소한 현상이 나타나는거지.

 

그렇다면 이 잉여생산물을 어디에 내다팔것인가? 의 문제가 생기게 돼.

 

국내의 금융자본가, 군수사업가, 수출운송업자들은 이익이 생겨나면 사하라사막의 한 가운데라도 팽창하고자 해.

 

"기업가는 이윤이 추구되는 곳에서는 악마와도 교역한다"는 말도 있지.

 

이러한 자본가들은 국내에서 독점자본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도대체가 국내에서는 이 독점자본에 대항하여 경쟁할 세력이 없는거야. 따라서 해외로 팽창하게 되지.

 

해외로 팽창하려는 자본가들은 국가와 밀접히 결탁해. 군대의 힘을 빌어 타국을 식민지로 삼고 거기서 수출시장을 마련하는거지.

 

제국주의가 어떻게 생겨나느냐는 이 과정 자체에 대한 설명은 홉슨이나 레닌이나 다를 바가 없어.

 

그러나 홉슨상님은 소득재분배 등 국내 소비의 진작으로 이러한 문제가 해결이 가능하다고 생각해. 이는 나중에 북유럽의 사회민주주의로 이어지지.

 

반면 레닌은 자본주의의 해외팽창은 불가피하고, 자본주의 국가간의 팽창경쟁 및 팽창전쟁, 자본가의 노동자에 대한 착취 현상은 막을 수 없는 현상이라고 봐.

 

레닌이 이러한 현상에 대해 해결책으로 내놓은 것이 바로 사회주의 혁명이지.

 

 

자 그럼 다시 소련의 상황으로 넘어가보자.

 

소비에트 정권 초기, 레닌은 국내외의 많은 도전에 직면해 있었어.

 

비록 중앙권력을 꿰찼지만, 국내에서는 보수주의자와 타 혁명세력들이 견제하고 있었고, 국외로도 유럽 열강들과 세력경쟁을 펼쳐야될 처지였지.

 

또 러시아의 지도부가 밥먹듯 바뀌다보니 이틈을 타서 러시아 지배 하에 있던 민족들이 독립을 시도해.

 

뿐만 아니라, 러시아를 견제하던 유럽 세력들은 반소비에트 세력과 규합하여 소비에트 정권에 대항하지.

 

소비에트 정권이 이러한 상황을 안정시키기까지 최소 10년 이상이 소요되었어.

 

소비에트 정권은 1917년 이후 1921년까지의 4년을 전시공산주의 체제로 선포해.

 

레닌은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의장자리에 자기가 앉고, 외상에는 트로츠키, 소수민족담당에는 스탈린을 앉혀.

 

스탈린 직함이 영 허접해보인다고?

 

당시에 우크라이나, 폴란드, 핀란드,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등 기존 러시아 영향권에 있던 민족들이 독립을 시도했어.

 

이러한 독립운동으로 인해 당시 러시아 전체인구의 26%가 감소, 영토의 27% 상실, 철도망 27% 상실, 산업시설 1/3 상실, 심지어 철강산업과 탄광산업은 70% 이상 상실하게 되지.

 

따라서 소수민족문제는 심각했기에 스탈린이 맡은 임무는 중책 중의 중책이었어.

 

무튼 전시공산주의 체제를 선포한 소비에트 정권은 대내적으로는 권력기반을 강화하고, 대외적으로는 연합국으로부터 소비에트 정권을 인정받고자 했어.

 

대내 정책에 대해 알아볼까?

 

1) 모든 기업과 공장을 인민위원회에서 관리

2) 모든 은행 국유화

3) 모든 해외교역은 국가가 독점

4) 새로운 사법체계(인민재판) 창설

5) 교회재산몰수

6) 그레고리력 채택

7) 반혁명세력(반동세력) 숙청

8) 비밀경찰(Check) 창설 - KGB의 전신

9) 모든 토지 국유화

10) 배급제 실시

 

대외적으로는 과도한 조건을 제시하는 독일과 단독으로 정전협정을 맺는데, 이게 브레스트-리트보스크 협정(Brest-Litovsk 협정)이야.

 

러일전쟁으로 인해 동부에서는 일본에게 털리고, 서부에서는 독일에게 털리던 러시아였으니 어떻게 전쟁부터 끝을 내야 국내안정이 시급했기에 독일에게 어느정도 양보는 불가피했지.

 

 

그렇지만 반혁명 보수세력, 타 혁명세력, 그리고 러시아가 잘되길 바랄리 없는 유럽 다른 열강에 의해 1917년 10월 적백내전이 발생해.

 

정권을 잡은 소비에트 볼셰비키에 대항하여 멘셰비키, 제정러시아 시절 보수주의 세력, 외국세력이 규합하여 내전에 이르지.

 

여기서 적군은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소비에트 세력, 백군은 그 이외의 세력을 칭해.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를 제외하면 외국의 지원을 받던 백군이 우세했고, 한때는 시베리아 대부분 지역을 점령하기도 하며 볼셰비키를 포위해나가지.

 

그러나 백군은 적군에 비해 조직화된 군대가 아니었어. 마치 의병과 비슷한 형태였는데, 이때문에 당시 소비에트 전쟁상이었던 트로츠키에 의해 각개격파당하기 시작해.

 

트로츠키는 적군의 규율과 전열을 정비하며 백군에 대항하지.

 

1918년 여름, 우세해진 레닌의 볼셰비키 측은 니콜라이 2세 왕가 일족을 모두 처형하며 보수주의 및 반혁명세력에 대한 투쟁을 이어나갈 것을 결의해.

 

 

그런데 이렇게 러시아가 혼란한 틈을 타 폴란드가 덜컥하고 소비에트 정권에 전쟁을 선포해. 이게 바로 1919년 2월 발발한 폴란드-소련 전쟁이야.

 

명분상은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지방의 영유권 다툼이었지만, 연합국도 폴란드군에 합류하여 러시아 곳곳을 점령하고 백군 세력을 지원하지.

 

일본은 이에 무려 6만명을 투입하며 시베리아 동부 대부분을 점령하기도 해.

 

그러나 소비에트 측은 미하일 투하쳅스키 장군을 필두로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까지 진격하여 평화협정을 얻어내지.

 

 

자 지금까지 두서없이 이야기해왔으니 정리를 해볼까?

 

혁명 이후 러시아는 적백내전, 연합국의 개입, 폴란드의 선전포고, 변방국들의 독립으로 엉망이 되어버렸고, 1917년부터 1921년간 소비에트 정권은 전시공산주의 체제를 선언해.

 

이러한 어려운 시기에도 어떻게 소비에트 정권이 생존하였느냐?

 

이유는 바로 러시아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농민의 소비에트(볼셰비키)에 대한 지지와, 소비에트 측이 러시아의 인적/물적 자본의 핵심지역인 모스크바와 수도 페트로그라드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야.

 

또 백군 세력에 개입한 보수주의자들이 차르 중심의 왕정질서로 복귀하고자 했기 때문에 국민에게 큰 호응을 얻을 수가 없었지.

 

이러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소비에트는 드디어 1922년,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USSR,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를 수립해.

 

핀란드, 폴란드, 발트3국, 루마니아,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의 영토를 상실하여 이전 러시아보다 쪼그라든 영토에, 시베리아 일대와 사할린은 일본이 장악하고 있었지만 거대한 제국임에는 틀림이 없었지.

 

레닌은 내전과 전쟁으로 피폐해진 러시아를 재건할 필요가 있었어.


애초에 자신들이 혁명을 일으킨 것 자체도 인민들 밥먹여살리고자 하는게 명분이었는데


소비에트 수립하고 나니 어라? 러시아 본토가 완전히 초토화가 된거야.


제1의 목적이 경제의 재건이었지. 전세계 사회주의 혁명 완수 따위는 신경쓸때가 아니었어.


따라서 레닌은 NEP(신경제정책, New Economic Policy)를 추진하게 돼.


레닌도 자본주의의 무시무시한 생산성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았지.


레닌은 소규모 사기업 활동을 허용하고, 농업에서도 고용노동을 허용하기 시작했어.


그런데 변증법적 유물론이 소련에겐 적용이 안되는거야 따지고보면.


테제Thesis 정, 즉 전제 상황이 부르주아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여야하는데 혁명 전 러시아는 결코 그런 부르주아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었거든.


전제상황을 자기들 맘대로 설정해버린거지 다시말해서.


그렇게 자본주의를 거친 경험이 있으니 소련의 산업능력은 혁명 이전과 거의 다름이 없었어.


전쟁과 내전으로 더 피폐해진 상황이었지.

 

 

자 이러한 NEP 정책을 두고 소련 내부에서 권력투쟁이 발생하게 돼. 큰 구도는 바로 트로츠키 대 스탈린 권력투쟁이었지.


트로츠키파는 NEP? 이 반동분자 새끼들. 내가 탱크를 몰고가서 네놈들 대갈통을 부숴버리갔어!!!! 하는 세력이야.


세계혁명론을 끝까지 주장하며 해외의 공산주의 혁명활동을 지지해야하고, 국내적으로는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해야한다고 믿었지.


이러한 골수 사회주의분자에게 자본주의 성격이 짙은 NEP는 타도대상이었어.


스탈린파는 아따 성님 지금 러시아땅을 보소. 지금 우덜만해도 굶어뒤질것 같은디 세계혁명은 무신 세계혁명이오? 하는 세력이야.


소련의 정권안정이 우선이고, 소련 이외의 다른 국가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을 잠시 중단하고 부르주아와 일시적으로 타협해야 한다고 주장했지.


스탈린의 이런 주장을 1국사회주의라고 해. 그러한 방편으로 NEP에 찬성하였고, 소련의 재건설을 먼저 추진하자는거지.


이러한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게 스탈린이고, 이후 트로츠키는 영향력을 잃어만가지.

 

 

스탈린이 정권을 잡은 이후 1928년부터 1941년까지 중공업 우선의 5개년 산업화 정책을 실시해.


국가가 경제를 통제하며 발전시키겠다는 야심찬 계획이었어.


그런데 중공업 우선정책이다 보니 화학/기계/자동차/항공/전기 등의 군수사업에만 치중하게 되고, 인민의 생활수준과 밀접한 산업은 등한시되다시피 했지.


인민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지고, 스탈린에 저항했던 500만명 가량이 시베리아나 중앙아시아로 수용되지.


또한 소련 영토의 70%가 국영농장(사프코즈)화되고, 농민들은 집단농장(콜호즈)로 편입돼.


타국들은 이 시기에 대공황의 시대에 돌입하게되는데, 이시기 소련은 공업화를 거치고 있어서 대공화을 피해 가.


본토가 혁명이니 전쟁이니 초토화되어 있어서 생산 자체를 하기가 힘든데 과잉생산이 어디있겠어.


그런데 이 시기 서방의 학자들이 소련을 장밋빛으로 그리기도 하는 어이없는 짓을 저지르기도 하지.

 

 

그런데 같은 1920~30년대에는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독일의 히틀러가 득세하여 소련 공산주의에 위협을 가해.


전체주의는 서방의 자본주의와 소련의 공산주의 모두를 거부하는데, 때문에 피폐한 민주주의 혹은 잔인한 사회주의으로 불리기도 해.


무튼 스탈린은 다시금 국내 권력기반을 튼튼히 해야겠다는 위기의식에 사로잡혀.


이윽고 1930년대 대숙청시대가 열리게 되지.


1934년 12월, 공산당 레닌그라드 시당의 세르게이 키로프라는 사람이 극장에서 암살된 채로 발견돼.


스탈린은 이 암살사건을 빌미로 자신의 공업화 정책에 반대하는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일으키지.


잔존하고 있었던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모두 검거되어 처형되었고, 기존의 볼셰비키 지도자들 또한 모두 숙청되었어.


또한 소련 군부 내에서도 핵심지도부 7명 사령관이 처형되었지.


다시말해, 스탈린을 제외한 1세대 혁명세력은 거의 사라졌어.


1939년 18차 공산당대회가 소집되었을때 잔존한 1세대 볼셰비키는 스탈린 측근은 몰로토프를 비롯한 20%에 불과했지.


5년마다 한번식 당대회 할때마다 인사나눴는데, 1939년 당대회땐 "오 넌 살아있었구나"하면서 인사하게 된거지.


"레닌의 그림자조차 존재하지 않았다"고도 해.


이후 1952년 스탈린 사망때까지, 스탈린은 공산당대회도 다시는 소집하지 않았고, 당내 토론도 사라지게 되어버려.

 

자 이제 국내에서는 권력기반을 확보했으니 대외적으로 위협세력을 막아야겠지?


1930년대에는 나치 독일이 미친듯이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로 팽창해나갈 때였어.


영국과 프랑스조차도 히틀러의 지속된 팽창야욕을 지켜볼수밖에 없었지.


그런데 스탈린은 약간 피해의식 같은게 있었어.


러시아가 워낙 유럽에서 강대한 세력이다보니 영국과 프랑스의 견제가 만만치 않다고 생각했던거지.


실제로 유럽 다른 국가들이 소련 적백내전 시기에도 소비에트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해 백군을 지원했고말야.


스탈린은 처음에 영국과 프랑스가 독소 전쟁을 부추긴다고 의심하기 시작했어.


따라서 이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나름 계산한 것이 독일과 연계하는 것이었지.


사실 영프 입장에서 직접적인 위협이 되는건 독일이었는데 말야.


스탈린은 1939년 8월 23일에 독일과 협상하여 독소불가침조약을 체결해버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려 계획한 것이 바로 그 다음달인 9월 1일이었고,


소련이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묵인해주는 대신에 폴란드 땅 절반과 발트3국을 할양받기로 약속했지.

 

그러나 1941년, 히틀러가 스탈린의 뒷통수를 치게돼.


바르바로사 작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해버린거야.


소련은 숙청으로 인해 군 지도부가 마땅하지 않았고, 여러모로 전쟁의 준비가 안되어 있었어.


또한 스탈린의 1국사회주의로 인해 타지역 공산당의 지원을 무시했으므로, 전세계 공산주의 세력의 지지도 받을수가 없었지.


무엇보다도 스탈린 자신은 독일이 무시무시하다는 것은 영국과 프랑스가 독-소 간의 관계를 이간질하려고 수를 쓴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에


전쟁에 대한 대비를 할 수가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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