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이나 바라왔던 고독의 땅으로 떠나네?"

"사람은 모두 외로워. 외로워서 무엇인가에 미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해. 누군가는 등산과 낚시에 미치고, 누군가는 화대를 손아귀에 쥐고 자본주의적 온기를 찾아 홍등가를 배회하지. 또 누군가는 워커홀릭이 되고, 탐험과 여행에 미치고, 권력과 완장에 웃고, 금화와 도박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그렇게 각자의 허공을 채우려는거야. 모두가 다른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버려서, 그래서 모두가 외롭지 않은 세상이 온다면 어쩌면 인간이 이룩해놓은 모든 것들은 필요가 없게 될거야."

걱정기를 머금은 여자친구에게 나는 아이슬란드라 해서, 그토록이나 외떨어진 곳에 뚝 떨어져 고작해야 공주시만큼의 인구가 모여사는 자그마한 나라라 해서 복작복작한 한국보다 특별히 더 고독하고 외로운 곳은 아닐 것이라 말했다. 케플라비크 국제공항에 도착하여 렌트카 업체로부터 무려 66만 킬로미터를 뛴 시트로엥 칵투스를 받아 꽤나 사람 불안하게 만드는 변속충격을 느끼며 41번 도로의 황량한 녹색 풍경을 마주하기 전까지는, 실제로도 그렇게 생각했다. 이거 중간에 서버리면 어쩌나 싶어 렌트 계약서를 다시 찬찬히 읽어보니, 비상출동 서비스는 거리에 따라 하루이틀이 걸릴 수도 있다는 문구가 불개미 발자국만하게 쓰여있다. 사람 사는 곳이 다 거기서 거기라지만, 이곳 아이슬란드에는 그 "사람"이 별로 안 산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손대기 무섭도록 장엄한 풍경이지만, 막상 이끼의 촉감은 새끼고양이처럼 연약하고 부드럽다.

손대기 무섭도록 장엄한 풍경이지만, 막상 이끼의 촉감은 새끼고양이처럼 연약하고 부드럽다.

첫 여정은 남서부 도시(라 쓰고 마을이라 읽는) 회픈행 500km 대장정이었다. 새로운 광경이 주는 흥분은 사람으로 하여금 66만 킬로미터라는 거리계를 무시하고, 변속충격조차 리드미컬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아이슬란드의 날씨는 사춘기 소녀와도 같은데, 분명 태양이 작열할 때 출발하였건만 수도 레이캬비크 외곽에 들어서자 비바람이 몰아치고, 1번 도로에 이르니 이윽고 짙은 안개가 드리웠다. 안개 때문에 시계가 10미터도 채 되지 않아 갓길에 차를 잠시 세웠다. 이끼는 생각처럼 미끌거리지 않고, 잘 세탁해 폭신폭신한 카펫의 감촉이다. 혹여나 타지의 이방인으로부터 상처받을까 싶어 조심조심 손바닥을 대어 보았는데, 안개이슬까지 머금어 마치 갓 목욕한 고양이를 쓰다듬는 기분에 미소가 지어졌다. 당최 기다려도 안개가 걷힐 생각을 하지 않아 앞차의 후미등을 등대삼아 후진 코너링 실력을 만천하에 드러내며 능선을 내려왔다. 언덕길을 내려와서 알게 된 것은, 이 희뿌연 것이 안개가 아니라 구름이었다는 사실.

아이슬란드 남부에서 마주친 크반나달스흐누퀴르 산. 아이슬란드 최고봉으로, 이곳에 영화 <인터스텔라>의 촬영지인 스카프타펠 빙하가 있다. 워낙 경치가 훌륭하다보니 별 생각없이 셔터를 눌러도 멋진 사진이 나온다.

아이슬란드 전역을 둥글게 감싸안는 1번 도로는 명색이 관광객들이 흔히들 일주하는 링로드(Ring Road)이건만, 길벗삼을 차는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영사기가 쏘아주는 장면처럼 시시각각 변화무쌍한 광경이 이방인의 심장에 불을 지른다. 자동차보다는 갈기가 멋들어진 백마에, 백마보다도 푸른 용의 등에 업혀 질주하는 것이 이 장엄하기 그지없는 캔버스에 어울리는 피사체가 아닐까 싶다. 고독의 첫 단계란 역설적이게도 사랑의 첫 단계와 같이 뜨거운 설렘이다. 인간의 부자유는 필시 관계라는 족쇄가 주는 억압으로부터 비롯된다. 관계로부터 정의되는 인간의 역할, 이를테면 누군가의 아버지, 어딘가의 직원이라는 직함들로부터 해방된 인간은 그 어떤 수식어로도 정의되지 않는 날것 그대로의 존재가 된다. 관계로부터 해방된 고독인은 곧 각종 관계가 창출하였던 의무들로부터 벗어나고, 의무를 지지 않은 인간은 비로소 자유인으로 거듭난다. 북극에 가까운 낯선 섬 한복판에서 인간이 갖는 의무는 속도제한 정도가 전부다.

회픈에서 더 나아가 름 붙여지지 않은 아이슬란드 남동부 방면 자갈길 한어귀. 포장되지 않은 이곳 커브길에서 대서양으로 떨어져 여행기 대신 유서를 쓸 뻔 했다.

그 해방감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사람은 서로의 체온을 갈구하며 고독이란 것을 응당 피해야할 것으로 여기는가? 어째서 이 자유의 땅에서도 아이슬란드인들은 서로 옹기종기 모여 마을을 이루고 사는가? 풋익은 자유감 속에서 여기저기를 헤엄치는 인간은 문득 공포를 느끼게 된다. 날것 그대로의 인간은, 이를테면 포장되지 않은 코너길에서 북대서양으로 추락할 위기에, 함께 했던 이들을 떠올린다. 또한 지평선 너머에도 또다른 지평선만이 존재하는 광활한 대지에서 언어적, 관계적으로 정의되지 않은 자신의 의미에 대한 회의감을 갖게 된다. 안전보장의 필요와 타자에게 자신의 능력과 매력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 그 때문에 인간은 군집을 이루어 서로 부대끼며 웃고, 울고, 분노한다. 그렇게 사회를 이루고 나면 욕구의 대상이 한정됨로써 발생하는 투쟁과 타자로부터 나의 가치가 제대로 인정받기를 원하는 인정투쟁의 과정에서 비롯되는 피로감이 다시금 인간을 여행길로 내모는 것이다. 즉, 고독은 자유를 낳고, 자유는 공포와 회의감을 낳으며, 공포와 회의감은 사회를 낳고, 사회는 내부적 투쟁을 낳는다. 이윽고 투쟁은 낯선 곳으로의 여행을 낳는다.

 

 

 

그러니까 저녁 어스름 무렵, 회픈의 호텔에 도착하여 주문했던 스키르에 대한 반가움은 근 이틀이라는 짧은 새에 끝까지 숙성되어버린 고독의 말로였다 하겠다. 이게 전채인가보다 싶어 생각없이 스키르의 달콤함에 취해 있는데, 실수로 디저트를 먼저 내었다며 주방장까지 나와 연신 사과를 한다. 그에게 "I was dying for some sweets for my long way to Hofn." 이라며 짐짓 매너 좋고 유쾌한 신사인 척을 했다. 실상은 디저트와 에피타이저도 구분 못하는 촌녀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인이어도 혼자 여행하는 사람은 퍽 드물었는지, 홀로 파스타 풀코스를 표정 하나 변치않고 꿋꿋하게 먹어치우는 내게 다른 손들은 흥미롭다는 눈길을 보냈다. 떠오르는 달과 비구름이 함께 떠있는 회픈의 하늘을 바라보며 내심 오로라를 기대했지만, 그저 새까맣게만 변해가는 밤하늘을 원망하며 잠에 들었다.

스카프타펠 국립공원(상)과 요쿨살롱(하). 내륙으로 가면 김을 내며 펄펄 끓는 유황 온천이, 해안가에는 대서양과 북극해가, 이곳 남부에는 빙하가 공존하는 아이슬란드는 "어떤 나라"라고 규정되는 것을 스스로 거부한다.

 

날것 그대로로 서있는 인간에게는 정형화된 모습이 없다. 고독을 목전에 두게 된다면 자신이 어떠한 사람이라며 정의하고, 그 정의역의 저변 안에 자신을 가두어두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닫게 된다. 결국 자신에 대한 정의라는 것은 철저히 타자에 의해 행해지는 폭력적 행위기 때문이다. 홀로 선 인간의 그림자는, 짧디짧은 한나절 간에도 천구에 둥근 궤적을 수놓는 태양에 의해 문명인이자 동시에 야만인이고, 합리적 행위이자 동시에 바보이며, 이성인이자 동시에 광인이 된다. 마치 물과 불과 얼음의 땅이라는 아이슬란드처럼. 과연 같은 땅이 맞는지 의심스러울만큼이나 다채로운 아이슬란드는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땅이다. 동시에 온갖 간판과 뒤죽박죽인 직함 따위로 오염되지 않은 사람의 본 모습에 가까운 풍경이기도 하다.

 

진정한 자유인들은 정복에 대한 갈망마저 잊어버린다. 역사적으로 몽골과 같은 거대 유목제국들이 그 광대한 영토에 비해 풍전등화와 같이 짧은 생애를 거쳤던 것은, 정복이라는 미명 하에 마구잡이로 넓혔던 영토를 관리할만한 행정력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소유에는 소유한만큼의 책임이 따른다. 모든 족쇄와 책임으로부터 해방된 자유인들은 따라서 소유를 위하여 정복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한 자유인의 냄새는 아이슬란드인들에게도 그대로 배어, 한국의 유명 관광지라면 응당 꽂혀있을 정복의 깃발들(이를테면 민박이니 기사식당이니 하는 것들)을 찾을 수가 없다. 왕복 2차선의 좁은 도로와 장난기가 가득한 어린 화가가 산수화에 붉은 포인트를 찍은 듯한 전원주택 정도만이 조심스럽게 경관에 스며든다.

 

 

또 마을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기에 인적이 보이는 곳으로 이르자마자 커피 탈 생수를 하나 샀는데, 뚜껑을 따니 거품이 일어난다. 탄산수였다. 이왕이면 커피콕 같은 맛이 나길 바라며 차량용 포트를 틀고 커피 한잔을 탔다.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 맛이지만 커피콕에 비할 바는 못된다. 스카프타펠 빙하가 녹아 형성한 자그마한 폭포 앞에 정차하고 보온병 속 반의 반쪽짜리 커피콕을 음미했다. 수천년을 얼어붙어 있던 어떤 물방울은 모처럼 얼굴을 낸 태양의 온기에 녹아 강이 되고, 폭포를 타고 하류로 흘러가 북대서양에 도달할 것이다. 그리고 또다시 북반구를 배회하는 유빙이 되었다가, 가늠할 수 없는 세월이 지나 비구름이 되어 런던 어딘가에, 혹은 서울 어딘가에 빗방울로서 떨어질지 모를 일이다. 그 기나긴 여정의 한 부분은 여행자에게는 추억이 된다.

 


내륙의 싱벨리어 국립공원부터 게이시르로 이르는 길을 아이슬란드의 골든 서클이라 부른다. 시간에 쫓기는 여행자라면 이곳 골든 서클만 둘러보아도 아이슬란드 풍경의 대부분을 볼 수 있다는, 말하자면 속성 코스인 셈이다. 한껏 여유로워야 할 여행이 시간에 쫓긴다는 것만큼이나 슬픈 일은 없다. 수만년의 지질학적 시간이 이룩해낸 대작을 고작해야 몇시간 정도 사진 찍듯 보고 떠나는 것은 현대의 여행객이 갖는 숙명이다. 모두가 바쁜 사람들이니까. 다음주면 다시 다람쥐 쳇바퀴 속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성공이니, 보이지 않는 승진이니 따위를 꿈꾸며 현실을 살아가야 하니까. 그래서 여행은 언제나 꿈만 같다. 꿈꾸는 시간만큼 보고, 다시 보기는 힘드니 꿈만 같을 수밖에 없다. 그 꿈만 같은 싱벨리어의 좁은 길을 지나 바퀴는 게이시르로 굴러간다.

 

가는 길에는 주유소에 들렀다. 아이슬란드의 주유소는 높은 인건비 때문에 모두 무인주유소인데, 이탈리아인으로 보이는 청년 둘이 주유기를 가지고 씨름하다가 두번 주유기를 써보아 꽤나 능숙한 내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청년 한명은 자기는 꼭 주유할인 카드를 써야겠다며 고집을 부렸는데 정작 나는 그걸 쓰는 방법을 몰라서 그냥 카드로 결제하는 법만을 일러주었다. 동승석의 청년은 고맙다며 연신 인사했지만, 고집불통 쪽은 주유소에 직접 물어봐야겠다며 사무실로 성큼성큼 걸어간다. "He is a fucking guy." 동승석의 청년이 내게 눈을 찡긋하며 투덜거린다. 사내들 우정의 모습이란 국적을 떠나 이토록이나 보편적인 모습이다.

 

 

게이시르에 들어서면 달걀 노른자 냄새가 온 마을에 진동한다. 간헐 온천이라는 뜻의 영단어 Geyser의 유래가 된 곳인데, 10~20분마다 한번씩 분출하는 온천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는 관광객들로 인해 아이슬란드에서 유일하게 인파가 북적이는 곳이다. 인간의 인지 능력에는 한계가 있어서, 빙하를 본지 이틀이 채 되지 않아 펄펄 끓는 온천을 보게 되면 납득하기 힘든 신비로움에 빠져드는 것이다. 지옥은 유황 냄새로 자욱하다는데, 지옥의 냄새로 자욱한 이 마을에도 교회가 우뚝 서있다는 것은 그만큼 신이 편재(遍在)한다는 뜻인가, 아니면 지옥불에서도 신적 존재를 찾으려는 인간의 노예적 본성을 뜻하는 것인가 문득 궁금해졌다. 이곳 주차장에서 나는 마광수 교수의 부고를 전해들으며 그의 시 한편을 떠올렸다.

 

자살자를 위하여

 
우리는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은 아니다
그러니 죽을 권리라도 있어야 한다
자살하는 이를 비웃지 말라, 그의 좌절을 비웃지 말라
참아라 참아라 하지 말라
이 땅에 태어난 행복,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의무를 말하지 말라
 
바람이 부는 것은 바람이 불고 싶기 때문
우리를 위하여 부는 것은 아니다
비가 오는 것은 비가 오고 싶기 때문
우리를 위하여 오는 것은 아니다
천둥, 벼락이 치는 것은 치고 싶기 때문
우리를 괴롭히려고 치는 것은 아니다
바다 속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것은 헤엄치고 싶기 때문
우리에게 잡아먹히려고,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키려고
헤엄치는 것은 아니다
 
자살자를 비웃지 말라, 그의 용기 없음을 비웃지 말라
그는 가장 솔직한 자
그는 가장 자비로운 자
스스로의 생명을 스스로 책임 맡은 자
가장 비겁하지 않은 자
가장 양심이 살아 있는 자 



가자, 장미여관으로! | 마광수 저

 

 

스카프타펠의 빙하가, 게이시르의 온천이 우리에게 보여지기 위하여 아름다운 것이 아니듯, 어쩌면 삶에 있어서도 어떠한 목적을 두는 것이 의미없는 행동일지도 모른다. 정의로워야 한다, 열심히 살아야한다는 의무감 또한 티끌만한 세상을 그저 물방울처럼 배회하다 가버릴 수 있는 인간의 자유를 침범하는 폭력적 규범의 한 갈래다. 말하자면 그것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삶을 살아가는 쇼윈도와 같은 가식에 불과하다. 마음대로 얼어붙고 마음대로 내뿜으며, 또 저 좋을대로 탄생하고 종말하며 하나의 교훈없는 예술처럼, 틀없는 자연처럼 살다가는 것이 오히려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과 이룬 것에 대한 기득권으로 인해 두려운 죽음에 보다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삶의 자세가 아닌가 싶다. 어찌 되었건 한국의 엄숙주의에 일침을 가하고 떠난 그에게 게이시르 주차장 한 구석에서 조의를 표했다.

 


레이캬비크 시내에 이르러 한화 2만원짜리 볶음밥을 먹고, 한 카페에서 에스프레소와 초콜릿 케익을 시켰다. 식당 물가는 한국의 세배에 이르지만, 커피 물가만큼은 한국과 거의 같다. 카페 테라스에 앉아 길거리 여행객들을 구경하며 천천히 담배를 태웠다. 이국의 도시는 언제나 처음에는 다채롭게 다가오지만, 그 구석구석에 즐비한 담배꽁초라든지 아무렇게나 길가에 세워진 차들을 보면 이곳 역시 우리같은 사람이 사는 곳이구나 싶다. 시내에는 Polar Bear Store도 있었는데, 정작 아이슬란드에는 북극곰이 없다. 내가 이곳에 이르기까지는 없었다.

우리는 참으로 복잡다단한 나라에 살고 있다. 여기서는 북한의 핵실험 소식을 전해들었다. 안으로는 냉전기 못지 않은 좌우이념이 국민을 갈라놓고, 바깥으로는 대국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주판알을 튕겨가며 행위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외교적 고립을 자초하게 된다. 물론 아이슬란드도 위치상 북극해-대서양으로 통하는 관문에 있기 때문에 그 예외는 아니어서, 영국과의 대구전쟁 당시 미국-소련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한 적이 있긴 하지만서도 한반도에 비하면 양반이다. 아이슬란드에서 그 보기 드문 교통체증이란 것이 레이캬비크 시내에선 세시 반이면 나타난다. 다시말해, 이들은 세시 정도가 퇴근 시간인 것이다. 야근 잦은 한국인들이 오해할까봐 일러두는 것이지만, 새벽 세시가 아니라 낮 세시다. 세시면 퇴근하고, 걸핏하면 미사일을 쏴대는 이웃나라도 없는데다가, 고작해야 파인애플을 피자 토핑으로 쓰기 싫다는 대통령의 발언이 "게이트"라 일컬어지는 이 평화로운 국가에서도 사람들은 저마다의 고뇌로 찌든 담배를 태우고 버린다.

 

 

시간만은 꿋꿋하게 간다. 가장 완벽한 여행의 조건을 제시해보자면 이렇다. 갈 때 설레고, 갔을 때 좋고, 올 때 아쉬움 없는 여행이 가장 훌륭한 여행이다. 운전하며 비포장 도로 때문에 워낙 고생을 했던지라 다음번에 올 때는 꼭 4륜구동을 렌트하겠다는 아쉬움은 있었으되, 위험한 고비를 몇 번 넘긴지라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고통스럽지는 않다. 여행기를 쓰는 아직까지도 손발의 끝에는 자갈길의 덜컹거리는 감촉이 남아있다. 여행 마지막날에는 케플라비크와 그린다비크 일대를 돌며 다시 보기 힘들 색채를 찍어두었다. 한국에도 이토록 아름다운 곳이 있으매, 아이슬란드의 풍경이 유독 와닿는 것은 여행의 신비 때문일 것이다. 아이슬란드가 이토록 아름다우매,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를 족쇄를 얽어매어 두지만, 그렇게 얽어매어둔 탄탄한 기둥은 바로 타인과 함께하는 온기와 행복이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고, 여행을 통해 환상에 빠진다. 그렇게 현실에서 타인과 부대끼고, 여행을 통해 고독의 담백한 맛을 느낀다.

 

 

루키와 시니어는 환상적인 찰떡궁합이라 했다. 루키의 대담함에 전진할 수 있고, 시니어의 노련함에 안전함이 담보된다. 서른을 두 해 앞둔 루키가 이제는 67만 킬로미터를 찍고 있는 시니어 시트로엥 칵투스의 사진을 찍어보았다. 추월은 영 힘겨워하했지만 그래도 총여정 2천 킬로미터 동안 밟는대로 나아가고 돌리는대로 꺾어준 고마운 길벗이었다.

 

 

2017.9.10 다행스럽게도 영등포구 내 골방에 편안히 앉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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