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대전 후 1930년대에 이르기까지 미국과 소련은 모두 자기들 성장하느라 바쁜 길을 걷고 있었지.

 

가장 큰 이유는 미국은 대공황 때문에 자기들 몸 하나 건사하는것도 힘들 지경이었고, 소련은... 말 안해도 알지? 얼마나 힘들었겠어.

 

무튼 국제사회에서 두 세력의 역할을 그때까지만 해도 별로 크지 않았어.

 

사실 미소가 반세기를 경쟁해왔지만, 처음부터 이를 갈며 서로를 증오했던 건 아냐.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지난 시간 제국주의 미국 시대의 루즈벨트는 시어도어 루즈벨트. 여기서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둘은 숙부와 조카 사이래)은 1933년에 소련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승인해줘.

 

루즈벨트는 또 소련의 공업화에도 원조를 아끼지 않았지.

 

사실 루즈벨트는 혁명으로 갈기갈기 찢어진 소련을 크게 견제하지 않았어.

 

보다 유럽에서 점점 손길을 넓혀만 가는 히틀러 독일을 견제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고, 대독 포위망을 완전히 하기 위해서는 거대한 소련이라는 세력의 도움이 필요했지.

 

이게 2차대전 말에 그쳤어야 했는데, 루즈벨트의 판단미스로 인해 소련이 미국의 경쟁자로 급부상하는 여지를 남겨두는 실수를 저지르게 돼.

 

뭐 루즈벨트 대통령 자신은 그런 더러운 꼴 안보고 죽어버렸지만 말야.

 

 

잠시 독일부터 알아보도록 할까?

 

1차대전에서 영혼까지 탈탈 털렸던 독일은 배상금 문제로 등골이 휘어질 지경이었어.

 

독일에게 호되게 쳐맞았던 프랑스는 "안돼, 안바꿔줘, 그만 돌아가"하며 독일에게 배상금을 원칙적으로 다 뜯어먹으려고 했지.

 

그러나 히틀러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유럽이라는 거대한 수출시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유럽에서의 영향력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고, 이에 따라 독일의 경제성장을 위해 미국은 "좀 깎아주면 안될까?"하며 독일을 은근히 지원해줘.

 

미국의 원조를 받아 배상금을 다 지불하고 경제성장을 이룬다는 독일의 전략이 바로 구스타프 스트레제만 전략이야.

 

그러나 1930년대에 이르러 히틀러가 집권하게 되면서 구스타프 스트레제만 전략은 ㄲㅈ를 외치며, 군사적으로 재무장을 시도해.

 

독일이 식민지로 삼고자하는 지역은 다름아닌 바로 동유럽 지역이었어.

 

동유럽 누님들이 예뻐서가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등 식민지로 먹을만한 지역들은 모조리 영국, 프랑스 등의 기존 열강에 의해 먹혀있었기 때문이지.

 

결과적으로 히틀러는 팽창할 곳이 동유럽밖에 남아있지 않았던거야.

 

 

1939년 9월 1일,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2차대전의 막을 올려.

 

지난 시간에 대외적인 안정을 추구하던 소련이 독일과 독소불가침조약을 맺고, 폴란등을 반띵하기로 약속했다고 배웠지?

 

독일도 약속은 약속인지라 폴란드의 서부지방만을 장악하고, 동부는 소련이 뿜빠이해먹어.

 

소련은 이렇게 폴란드 동부를 차지함으로써 발트3국(리투아니아,라트비아,에스토니아)에 대한 영향권을 확보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고, 더 나아가 핀란드까지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 뭐 그때까지만 해도 독일이 뒤통수를 칠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무튼 독일은 탱크를 앞세워 중심으로 진격한 후, 기계화보병사단과 경무장보병을 출격시키는 전격기습작전Blitz Krieg를 창시해.

 

또 공군으로 적의 후방을 초토화시키고 보병을 투입시키는 미국스러운 전술도 바로 이때 독일이 처음 써먹게 되지.

 

이러한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놀라나자빠진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의 독립을 천명했지만 그저 립서비스였지 파죽지세로 나아가는 독일군을 세치혀로 막기는 불가능했어.

 

프랑스는 나름 1차대전 때 데인 바가 있느라 대비를 한답시고 마지노선을 구축했지만, 요건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 지역에 대한 독일의 침공에 영영 난몰라요~ 하겠다는 방증이 되어버려 욕만 먹었지.

 

하긴 독일은 결국 벨기에, 네덜란드를 우회하여 프랑스를 침공했으니 마지노선은 한마디로 프랑스의 삽질이었던 거지.

 

 

폴란드가 쉽사리 무너지자 히틀러는 다시금 프랑스 침공을 준비해.

 

원래는 1939년 11월에 침공하기로 했지만 1940년 5월로 침공계획을 연기하며 폴란드 주둔 부대를 서부전선으로 집결시켜.

 

1940년 5월 10일, 독일군은 네덜란드-벨기에-룩셈부르크를 우회, 마지노선을 피해 프랑스를 침공해.

 

당해 6월, 한달만에 프랑스는 궤멸상태에 이르고 파리가 함락돼.

 

이때 비쉬Vichy 괴뢰정권은 독일에 항복하는 대가로 프랑스의 괴뢰정부로 활동하게되지만, 샤를드골 장군이 영국으로 망명하여 자유프랑스군을 결성하여 프랑스 독립 레지스탕스 운동을 조직하지.

 

이후로도 독일은 스웨덴, 스위스, 이베리아 반도(스페인과 포르투갈)를 제외한 전유럽을 석권하게 돼.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독일의 우방이었던 무솔리니 이탈리아군은 수도까지 함락당한 프랑스군에게도 탈탈 털리는 모습을 보여주지.

 

 

 

서부전선도 영국을 고립시킴으로써 마무리되었어. 독일은 이제 1940년 7월에 소련을 침공하기로 계획해.

 

그런데 우방이라는 무솔리니놈이 북아프리카 프랑스 식민지에서 계속 털리는 게 문제였지.

 

독일 군사령관들은 바로 모스크바로 진격하자고 주장했지만, 히틀러는 이를 무시하고 무솔리니를 지원해.

 

못났지만 그래도 친구랍시고 히틀러는 롬멜 장군을 북아프리카로 파견하고 이리저리 전열을 가다듬다보니 소련침공 계획은 41년 6월까지 미뤄졌어.

 

그 공백기에 계절이 바뀌어 소련의 진흙탕과 강추위 속에서 독일이 싸워야 했던 거지.

 

한편 소련에서는, 스탈린이 엄청나게 큰 판단미스를 해버려. 이건 후대에 흐루시초프에게도 두고두고 까인 실수였지.

 

스탈린은 독소불가침조약을 맹신하고 독일이 아니라 오히려 영국과 프랑스를 더 경계해.

 

소련군 정보기관이 여러차례 스탈린에게 "독일이 침략할거에요"하고 보고를 했지만 스탈린은 "아 그거? 그거 영국이 흘린 역정보여"하고 쌩까버려.

 

다시말해 스탈린은 독일의 침공에 대해 아무런 대비를 하지 못하고 있었어.

 

이때문에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고 첫 3개월간, 소련은 무려 보유병력의 절반을 잃게돼.

 

1941년 가을, 독일이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키예프 등을 점령하지만 소련은 점점 내륙으로 후퇴만 해가지.

 

 

자 지금까지 독일이 유럽대륙을 신나게 탈탈 털던 모습을 봐왔느니 태평양전선을 살펴볼까?

 

당시 아시아에는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를, 프랑스가 인도차이나반도를, 영국이 말레이시아와 버마 인도 중국남부를 차지하고 있었어.

 

일본이 이러한 유럽 열강에 도전하여 아시아에서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지.

 

따라서 미국은 일본을 견제해야 태평양의 맹주로 성장할 수 있었고, 결정적으로 일본에 석유와 철광석 등의 전략자원 수출을 금지하면서 경제적 제재조치를 단행해.

 

일본은 이에 미국을 협상테이블로 끌어들이고자 1941년 12월 7일에 진주만을 기습공격해.

 

원랜말야, 일본은 기습을 하기전에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려고했지만 주미 일본대사관에서 선전포고문의 번역이 늦어지는 바람에 미국 측에 선전포고문이 전달된건 진주만이 탈탈 털린 1시간 뒤였지.

 

미국은 최초로 본토가 타격당한 데에 일본과의 전재을 선언해.

 

아시아태평양 미군 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은 오세아니아로 철수하였고, 영국 또한 일본에 패해 싱가포르를 상실하는 등 초기에는 일본이 승기를 잡는 듯 보였어.

 

그러나 이러한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영국과 소련이 동맹을 맺고, 1942년에 미국이 참가함으로써 일본은 점점 고립되었지.

 

또 미국이 1943년~45년간 건조한 항공모함이 130척에 이르는 반면, 일본은 단 15척의 항모만으로 전쟁을 수행해야 했어.

 

미국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에게 역전하고, 일본은 본토까지 몰리게 돼.

 

 

한편 유럽 전선에서도 소련은 정신이 번쩍 들기 시작했어.

 

1942년 9월, 독일은 소련의 지도자 이름을 딴 스탈린그라드를 공략했지만 실패했고, 1943년 말까지 소련은 독일이 점령한 자신의 영토를 점차 수복해나갔어.

 

그러나 자신의 조국이 전장화되어 초토화되고 있는 데다가, 독일군의 저항이 강해서 스탈린은 연합군 측에 프랑스 해안에서의 제2전선 형성을 주장해.

 

1943년 11월, 미국 루즈벨트-영국 처칠-소련 스탈린이 이란의 테헤란에서 회담을 가지고, 이때 스탈린의 노르망디 전선 형성 주장이 허가되어 1944년 6월,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개시해.

 

뒤이어 1944년 말에는 프랑스를 탈환하기도 해.

 

여기서 잠시 프랑스 탈환 에피소드를 말하자면, 연합군은 영국까지 망명가서 프랑스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샤를 드골 장군을 프랑스 새정부 세력에서 쏙 빼버려.

 

배알이 틀리고 자존심이 상한 샤를 드골은 2차대전 후에도 미국의 영향권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독자적인 핵개발 등을 시도하는 원인이 되지.

 

 

1945년 5월, 미영소를 대표하는 세 사람이 얄타에서 다시 회담을 가져.

 

미국과 영국은 소련에게 폴란드의 이권을 넘기는 대신에, 독일이 항복하고 3개월 내에 일본에 선전포고할 것을 요구해.

 

이때까지만 해도 정말 병력 한명한명이 아쉬웠고, 독일과 일본으로 밀고들어가서 전쟁을 끝내야했지.

 

 

자 이때!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이 뇌일혈로 사망하게 돼. 당시 전시라고 유일하게 미국 역사상 4선까지 해먹었던 대통령이니 스트레스도 이만저만이 아니었겠지?

 

소련을 파트너로 여겼던 루즈벨트와는 달리 루즈벨트의 부통령이었던 트루먼은 소련을 굉장히 경계해.

 

여기엔 두가지 이유가 있었지.

 

① 트루먼 자신의 정책이 루즈벨트와 차별화되어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② 2차대전 말기에 이르러 소련의 영향력이 점점 거대화되고 있었기 때문

 

트루먼은 이에 따라 루즈벨트의 친소정책을 폐지하고, 적백내전에서 백군을 지원했던 1920년대 대소노선으로 회귀했어.

 

또 반공산주의 노선을 공고히 하였지.

 

무튼 이러던 중 독일은 1945년 5월에 패망해.

 

이윽고 전쟁이 끝날무렵, 미영소의 지도자는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포츠담에서 회담을 가지며 전후질서에 대해 논의를 해.

 

소련은 원래 동유럽에서의 영향권만 확보하고 끝을 내려했는데, 트루먼이 독일을 무장시켜서 소련을 견제하고자 하니 속이 뒤짚어졌지.

 

또 얄타회담 시절만 해도 루즈벨트가 소련에게 일본에 참전해달라고 빌다시피했었는데, 이번 포츠담 회담 중간에 미국의 원폭실험인 맨해튼 프로젝트의 성공 소식이 들려오자 트루먼은 더욱 고자세로 스탈린을 압박해.

 

 

1945년 8월, 일본에 원폭이 2발 투하되면서 일본도 무조건 항복을 하게 돼.

 

소련은 명분이라도 찾고자 원폭이 떨궈진 후에 대일 선전포고를 했지. 나름 잇속을 챙길 생각이었어.

 

그리고 소련은 정신없는 틈을 타서 사할린과 쿠릴 열도, 그리고 한반도까지 팽창하려했지만, 미국의 발빠른 대처로 모두 가로막혀.

 

무튼 이러한 정신없는 2차대전이 끝나고나니, 막상 가장 큰 피해를 본건 아무래도 소련이었어.

 

유럽대륙에서는 소련이 거의 단독으로 독일과 전쟁을 수행했기 때문이야.

 

당시 소련은 2천만명 이상의 인명피해, 1700여개 도시가 소멸, 산업기반이 초토화되었지.

 

그렇지만 전승국인 소련의 국제적 지위는 하늘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고 있었어.

 

또한 그리스를 제외한 중동부 유럽의 대부분은 소련의 손아귀에 떨어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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