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이 두 차례의 세계전쟁에서 자국땅이 전장이 되자 느낀건 바로 변방 안보의 중요성이었어.

소련 주변에 있는 세력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규합하지 않으면 또 언제 자신들에 대항해 칼을 빼들지 모르는 일이었거든.

또 대서양과 태평양이라는 천혜의 바다장벽으로 주위에 아무 경쟁자가 없었던 미국과는 달리, 소련은 전형적인 대륙국가로서 많은 경쟁자들과 비교적 직접 국경을 맞대고 있어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지. 이러한 소련의 지정학적인 특성이 향후 외교 및 팽창정책에도 큰 영향을 미쳐.

자 그럼 지중해 지역, 즉 중동지역~북아프리카~발칸반도 지역에서 미소가 어떻게 세력 경쟁을 펼쳤을까?

먼저 이란부터 살펴볼게.

1900년대까지만 해도 이란은 제정 러시아와 제국주의 영국의 영향권 아래 있었어. 특히 영국이 대대로 이란과 이라크 지방을 지배하였고, 이란의 석유에 대해 영국이 독점판매권을 갖고 있었어.

이러한 영국의 제국주의적 횡포에 대항하여 이란 팔레비 왕정은 1930년대에 친독 정책을 채택하여 독일에 빌붙어.

그러나 독일이 2차대전 후반부에 점차 독일 본토로 밀리기 시작하면서 이란 지방은 1942년대에 이르러 소련과 영국이 각각 북부와 남부를 수복하게 되지(북부는 소련이, 남부는 영국이).

이렇게 이란을 나눠먹은 영국과 소련은 먼저 친독정책을 주도했던 팔레비 왕가를 제거하고, 2차대전이 종전되면 서로 군사를 이란에서 물릴것을 약속해.

2차대전이 끝난 이후, 영국은 이 약속대로 이란에서 철군을 실시하지만 소련은 석유자원이 풍부한 이란에서 순순히 물러날 생각이 없었어.

바로 그때 이란북부 아제르바이잔이 이란으로부터 분리독립운동을 전개하지. 아제르바이잔은 이란 위, 소련 아래 있는 지역이야.

소련의 입장에서는 이 분리독립을 지원한다면 아제르바이잔을 자신의 세력권에 편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영국과의 약속을 어기고 이란에서 철군을 하지 않아.

이란은 아제르바이잔 분리독립을 진압하려 하지만, 소련은 분리독립운동을 지원하며 이란의 진압작전을 계속 방해해. 그리고서 결국 아제르바이잔은 독립에 성공하지.

소련의 팽창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어.

소련은 이란에 계속 주둔하면서 쿠르드 족의 분리독립 등을 지원하며 이란 정부에 지속적인 압박을 가해.

소련의 목적은 바로 카스피해의 관리권을 획득하는 것이었지.

그러나 미국과 영국은 이러한 소련을 강력하게 비판했고, 당시까지만 해도 핵무기는 미국이 독점하고 있었기에 소련은 이란에서 발을 뺄수밖에 없었지.

수세에 몰린 이란을 구해준 대가로 미국은 이란에서의 영향력을 확보하게 돼. 미국은 이란의 석유개발에 착수하고 이란 군경의 조직을 위탁받게 되었어.

바로 소련의 무리한 요구가 미국에게 어부지리를 안겨준 셈이야.

자 이제 터키로 시점을 옮겨보자.

이란사태가 진정되면서 터키에서도 비슷한 종류의 위기가 발생해.

터키 또한 원래 영국과 제정 러시아의 지배권 하에 있었고, 제정 러시아 시절부터 터키는 지중해 항구의 확보를 위해 압박당하는 신세였지.

1943년, 소련은 터키 정부 측에 지중해 해협을 공동통제하자는 제안을 해.

그러나 터키가 끝내 거부의사를 표명하자, 소련은 터키와의 접경지역에 25개 사단을 전진배치하지.

미국 입장에서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

루마니아와 불가리아가 공산화된 데 이어 터키마저도 소련의 영향권에 편입된다면 지중해에서의 미국 영향력이 현저히 낮아질 위기였지.

따라서 1946년, 미국은 현재 제6함대의 전신인 제12함대를 지중해로 파견하여 영구히 주둔시키겠노라 선포해.

그리스에서는 사실 미국과 소련이 직접 충돌한 건 아니야.

2차대전이 끝난 이후 미국을 필두로한 서방측과 소련을 필두로한 동구권은 유럽에서의 영향권에 대해 합의를 하게 돼.

그리스는 본래 서방측의 영향권에 편입되기로 결정된 터라, 소련은 이에 개입하는 걸 꺼려했어.

1941년에 나치 독일이 그리스를 점령한 후로, 그리스 내 공산주의자들은 주변의 알바니아와 유고슬라비아의 지원을 받아 그리스민족해방전선을 조직해.

독일로부터의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그리스민족해방전선(민전으로 서술하겠음)은 유력한 정치적 세력으로 떠올랐지만, 그리스는 서방측 영향권에 편입되기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내전이 일어나지.

이 내전으로 인해 민족해방전선은 거의 몰락 직전까지 갔고, 주변 공산국인 알바니아와 유고슬라비아는 그리스 민전을 지원하고자 해.

그러나 소련은 그리스 민전 지원을 다음과 같은 이유로 거부해.

① 그리스 민족해방전선을 지원했다가는 서방측과의 영향권 합의를 깨뜨리는 꼴이 되기 때문에. 더군다나 서방측, 특히 미국의 핵전력에 대항하여 군사적 충돌을 감수할 수 없음

② 스탈린의 1국사회주의. 소련 내 전후복구에도 국력이 심히 소요되고 있었음.

이렇게 주변 공산주의 세력을 지원하는 데서 의견이 갈리자, 소련의 스탈린과 유고슬라비아의 티토의 관계는 틀어져버려. 티토 유고슬라비아는 이후 소련권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공산주의 노선을 밟게 되지.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서방측은 그리스 민전에 대한 지원이 소련의 탓이라고 비난, 소련 입장에서는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는 셈이었지.

미국은 그리스 내전에 직접 개입하여 4억 달러에 이르는 군사적 원조를 실시하고, 해군기지를 그리스 땅에 건설해.

이렇게 소련의 지중해지역에서의 팽창시도는 번번히 실패로 돌아갔어.

가장 큰 이유는 미국의 핵전력 때문에 소련이 함부로 미국과 군사충돌을 일으킬 수 없다는 것이었지.

반면 미국의 입장은 조금 달랐어.

전후 미국은 유일하게 본토 타격을 진주만밖에 입지않았고, 제조업 자산은 외려 1939년보다 65%가 증가하는등 미국은 전쟁으로 오히려 수혜를 입었지.

이러한 막대한 생산력을 내수가 충족을 시키지못하니 가장 유력한 시장이었던 유럽으로 진출할 필요성이 있었고, 유럽이 소련의 손아귀에 떨어지는 걸 필사적으로 막아야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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