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이 부분부터를 다루기 위해서 지금까지 소련의 형성과정이나 미국의 건국과정을 봐왔어.


이 두 거대한 세력이 어떻게 세계질서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는지부터 살펴보는게 우선이었거든.


지난 시간엔 지중해 지방으로 힘 좀 써보려고했지만 번번히 미국에게 발렸던 불쌍한 소련에 대해 알아봤어.


이번 시간에는 마셜플랜을 중심으로 2차대전 후 미소가 각 진영을 어떻게 공고히 했는지 알아볼게.


사실 2차대전 말경 루즈벨트 사망전만 해도 미소는 경쟁관계가 아닌 협력관계에 가까웠어.


그러나 트루먼 대통령이 집권하게 되면서, 그리고 소련의 정치적, 군사적 입지가 매우 커짐에 따라 미국이 경계할수밖에 없게 되었지.


소련의 핵개발 자체에 있어서도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어. 이건 출처가 확실하지 않아서 진위여부는 몰라. 일단 참고만 해.


미국 측 루즈벨트가 맨해튼 프로젝트를 계획할 당시 프로젝트의 내용을 소련 측에 전달했고, 미국측의 성공여부 또한 소련에서 이미 감지했다는 거지.


루즈벨트 입장에서는 독일이 핵전력을 보유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소련이 그에 대한 대비를 하는 편이 나았던 거지.


이 루머가 사실이든 아니든, 루즈벨트는 실제로 소련을 협력대상으로 생각했지, 그 커지는 영향력을 경계하지 않았어.


이처럼 전후 소련이 미국과 대등한 경쟁자로 성장할 수 있는 데에는 사실 루즈벨트 대통령의 지나친 대소 협력 및 유화정책의 영향도 커.


무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보자.

 

 

자 냉전이 시작되는 미소 관계에 있어서 정말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한 명 있어.


위에 왠지 우리 한국사 모 대통령과 닮은 조지 케넌이 그 분이지.


조지 케넌은 주소련 미국 대사였고, 미국의 어떤 누구보다도 소련의 국내사정을 잘 알고 있는 직위였지.


트루먼 대통령이 반공, 반소정책을 강화하긴했지만, 당시까지만해도 미국의 여론은 소련을 경쟁자가 아닌 협력자로 생각하고 있었어.


소련의 성장을 매의 눈으로 유심히 바라보던 케넌은


1946년 2월, 스탈린이 최고소비에트 선거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자본주의에 대한 우월성을 표명하자,


이를 미국에 대한 적대행위로 규정, 조국에 긴 전문을 보내어 소련의 국내 정보와 지도부의 의도를 전달해.


케넌이 이때 미국이 소련에 대해 취해야할 정책도 같이 제안하는데 그게 바로 봉쇄정책이야.


봉쇄정책이란 말그대로, 사회/군사/경제 등 전방위에 걸쳐 소련을 고립시키는 정책이었지.


이렇게 케넌 성님이 미국에 소련의 위험성에 대해 전달하는 동안,


영국 전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은 미국의 한 대학에서 강연을 하며


"동독 발틱해부터 유고슬라비아 트리에스테 만까지 철의 장막Iron Curtain이 둘러졌다"는 유명한 연설을 해.


바로 철의 장막이란 용어가 시작된거야.

 

 

미국은 고민에 빠져. 한때 협력자로만 생각했던 소련이 나름의 팽창의도를 갖고 미국의 경쟁자로 급부상하고 있었지.


트루먼 대통령은 트루먼 독트린을 통해 대소정책, 대공정책을 강경히 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지만 달리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지.


그런데 이때, 1947년 조지 마셜이 미국 국무장관으로 취임해.


마셜은 소련이 전후에 시간벌기를 하며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고, 피폐해진 유럽국가의 빠른 재건을 통해 이러한 소련의 성장을 견제해야한다고 생각했지.


마셜은 특히 독일 경제가 제대로 일어서지않은 상태에서 빡친 소련성님들의 요구대로 독일이 배상금을 물게되면 유럽전체가 무너질 수도 있다고 판단했어.


이러한 판단 하에 조지 케넌과 마셜 국무장관은 유럽경제재건계획을 수립하는데, 이게 바로 국무장관 이름을 딴 마셜플랜이야.


재미있는건, 마셜플랜이 계획될 당시에는 원래 동유럽과 소련까지도 그 지원범위에 포함을 시켰었어.


다만 영국과 프랑스의 극심한 반대와 미국 국내에 일기 시작한 반공산주의 여론, 그리고 소련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으로 인해 동유럽과 소련은 배제되지.

 

 

그런데 스탈린은 가만있을 사람이 아니었어.


원래 마셜플랜에 동유럽과 소련도 포함되었었음에도 스탈린이 거절한 이유는 두가지야.


1) 소련의 정치와 경제가 미국에 종속될 우려

2) 독일을 견제하고자하는 소련의 방침과 위배


두번째 이유가 크다면 가장 큰 이유인데, 실상 마셜플랜의 중심목표는 독일경제의 부흥이었고,


왜 독일 경제가 중요하였냐? 하면


나중에 독일의 상황을 언급할때 따로 설명하겠지만, 독일은 서방권과 소련권 군대가 점령하여 동서독으로 나뉘어 있는 상태였어.


동독을 소련권이, 서독을 서방권이 점령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소련권과 서방권이 직접 대치하고 있는 제1전선이 바로 독일이었던거야. 마치 남과 북이 대치하고 있는 한반도의 휴전선과 같은 곳이었지.


그런데 소련권이 독일을 압박하려고만 했던것과 달리 서방권은 왜 독일을 지원하려 했을까?


똑같이 독일 때문에 피해입은건 마찬가진데말이야.


바로 소련군은 독일에 비상사태가 생겨도 소련대륙에서 바로 군사파견 조치가 가능했지만,


서방세력은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 세력이 2차대전으로 탈탈 털린 상태였기 때문에 비상사태가 발생해도 바로 조치가 불가능했던거야.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력 입장에서는 눈물을 머금고 지난날의 적을 지원하면서까지도 소련을 견제해야 했던거지.

 

 

이후에 마셜플랜의 논의를 위해 미국은 파리회담에 스페인을 제외한 모든 유럽국가를 초대해. 동구권 국가까지 말이지.


그러나 소련은 동구권국가들에게 파리회담에 가면 좋지않은 꼴을 보게될 것이라 위협하지.


스탈린은 마셜플랜에 대항하여 동구권국가 간의 결속을 유지하기 위해 코민포름을 결성하게 돼.


소련은 서방측의 마셜플랜이 유럽의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의 전쟁을 야기시킨다며 비판하지.


무튼 이렇게 소련권과 서방권은 자신들의 세력을 결집시키며 유럽에서 팽팽히 대치하기 시작했어.


그렇다면 다른 유럽국가들은 얼마나 어떤 모양의 피똥을 싸고있었는지 한번 살펴볼까?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던 체코슬로바키아야.


원래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는 자유주의 성향이 강한 국가들이었고, 더군다나 체코는 원래 소련권에서 빠져있었어.


체코는 공산주의 세력과 보수주의 세력이 서로 손에 손을 맞잡고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있었지.


사실 좀 애매한 상황이었지. 위치적으로는 동구권에 가까웠지만 사회분위기는 중립적이었어.


그러나 1948년, 체코에서 큰 흉작이 발생해. 식량원조를 얻어야할 정도로 대형 흉작이었지.


체코 외상은 먼저 미국에게 달려가 식량원조를 요청하지만, 미국은 "너네 마셜플랜 참가하면 줄게. 참가 안하면 안줄거임"


거절아닌 거절을 때려.


그런데 체코가 마셜플랜에 참가안한건 안하고 싶어서가 아니었어.


체코에서 마셜플랜을 수용하려했을때 스탈린이 체코 총리를 모스크바로 소환하여 "너네 이런식으로 미국 응딩이 붙잡으면 그건 소련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가써"하며 위협하지.


체코는 별수없이 소련에게 식량원조를 요청하기로 했고,


스탈린 성님은 우쭈쭈 내새끼 잘했쪄요 하며 체코에게 식량원조를 승인해줘.


미국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서방진영으로 끌어들였다면 소련권의 얼굴에 칼을 겨누는 거나 마찬가지였는데


소련에게 참 어이없게 넘겨준 셈이 되어버린거지.


체코 국민여론은 친소련적으로 기울기 시작하고, 급기야 체코 내각에서 비공산세력이 모두 사퇴함으로써 체코는 공산화돼.


정말 소련은 총 한발 안쏘고 체코를 자기 영향권으로 편입한거지.

 

 

자 이제 패망해버린 독일은 어떤 운명을 맞이했을까?


독일과 오스트리아에는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4개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어.


서독에 미국, 영국, 프랑스가, 동독에 소련이 주둔하고있었지.


수도 베를린은 조금 특이했는데, 베를린은 원래 지리적으로 동독 안에 있어. 원래대로라면 소련권이어야 맞는거지.


그런데 수도라는 특수성 때문에 베를린도 동서부로 나누어 4개국이 점령해.


문제는 이렇게 나뉘어있다보니 경제체제도 나뉘어지기 시작했어.


서독은 자본주의의 서방진영이, 동독은 공산주의의 소련진영이 점령하고 있었으니 단일의 경제체제를 갖기는 불가능했지.


그리고 미국이 마셜플랜으로 서독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서독의 경제체제를 개혁할 필요가 있었어.


1947년 서방측은 서독의 통화개혁을 실시해버리지.

 

 

소련이라고 가만 있을 수 있었겠어? 방금 동독 안에 있는 베를린도 동서부로 나뉘어져 있었다고 내가 말했었지?


원래 서방측은 동독의 육로를 통해서 서베를린에 가곤 했는데, 소련은 서베를린으로 통하는 육로를 봉쇄해버리고 서방측의 출입을 금지하지.


이게 바로 소련의 베를린 봉쇄(1948.6.24)야.


이 때문에 서베를린에 사는 240만명의 시민은 고립되어 먹을것조차도 구할길이 없게 되어버렸어ㅠㅠ


이는 빡친 스탈린이 "이렇게까지 베를린을 봉쇄해버리면 미국이 베를린을 포기하고, 베를린은 소련권으로 넘어오겠지?"하는 판단이었지.


그런데 서방측 지도부의 근성은 롤하다가 발린다고 나가버리는 그런 놈들의 근성이 아니었어.


미국을 비롯한 서방측은 무려 11개월간 서베를린 시민에게 필요한 물자를 항공기로 실어날라.


이걸 바로 베를린 공수작전이라고 하지.


원래말야 소련은 미국이 베를린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에 대해 궁금했었어.


소련에겐 베를린 또한 동독안의 서방측 지역이었기 때문에 마치 어금니에 낀 고깃조각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내심 이렇게까지 베를린을 봉쇄해버리면 서방측이 쉽사리 베를린을 포기해버릴거라 생각한거야.


그걸 빼려고 보니 생각보다 어? 미국이 베를린을 중요하게 여기는거야. 체코는 그런식으로 버렸으면서.. 불쌍한 체코...


결국 소련은 베를린 봉쇄를 해제할 수밖에 없었어. 이게 1949년 5월 12일에 일어난 일이야.


당시까지만해도 소련은 미국에게 빌빌 길수밖에 없었어.


혹시나라도 무력으로 충돌하게 되었을때를 생각해보면, 자꾸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떨어졌던 그 원폭들이 떠올라 감히 부딪힐수가 없었던거지.

 

자 이제 전후 일본의 상황에 대해 알아볼까?


일본이 패망한 이후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에 대항할 자는 정말 아무도 없었어.


미국은 맥아더를 사령관으로 하여 일본을 군사적으로 점령하여 전후 산업기지로 건설할 작정이었지.


먼저 일본이 그렇게까지 간댕이가 배밖으로 나올수 있었던 원인으로 미국은 군국주의 엘리트들의 독단정치를 꼽아.


따라서 도쿄전범재판을 열어 전범을 재판에 회부하고 군부와 재벌을 해체하려 하지.


그렇지만 군부 해체 외에는 제대로 된 것이 없었어.


특히 재벌의 경우, 상위 10개 기업이 일본 경제의 90%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재벌을 해체하는 순간 일본경제도 동반붕괴하게 되는 구조였지. 마치 티눈하나 뽑기 위해 발전체를 도려내는 기분이랄까?


또 미군의 폭격으로 초토화된 일본 본토의 주요도시들은 모두 파괴되었고,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은 하늘높은줄 모르고 오르고 있었어.


1946년에는 일본 내 노동자들의 파업이 드디어 절정에 이르러 산업 자체가 마비되어버리는 지경에 이르지.


맥아더와 연합국최고사령부(SCAP, Supreme Command of Allied Powers)는 노조와 좌파를 통제하고 억압하기 시작해.


이렇게 안습이었던 일본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당시 미국 전쟁성 차관이었던 드레이퍼라는 사람과 존 닷지라는 사람은 일본을 방문해.


여기서 닷지 플랜이라는 일본경제 부흥대책을 마련하는데 이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1) 일본 노조에 대한 대대적 탄압

2) 노조의 권리 보장 내용 등의 정책 모두 폐기

3) 공무원의 파업권 박탈

4) 경찰대(현재 자위대의 전신) 설치하여 노조운동 탄압


이었지.


이런식으로 맥아더 군정이 노조운동을 억압하자 공산주의 세력이 판을 치기 시작해.


1940년대 말, 일본 총선에서 공산당이 무려 10%의 의석을 차지하게 돼.


원래 공산당이란 게 반사회적정당이기 때문에 의회 내에서 저 정도의 의석을 차지하는 건 정말 이례적인 일이야.


이러한 일본의 안습적인 경제는 1950년 6.25전쟁을 통해 다시 부흥하게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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