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사는 우리의 남북관계에서 시사하는 점이 참 많아.


전후에 소련이 아무리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성장했다고는 하지만,


미국이 수수방관하지만 않았다면 대등한 경쟁자로까지 떠오르진 못했을거야.


게다가 미국은 체코를 자기 진영으로 끌어들여 소련의 면상에 칼침을 겨눌수 있는 상황조차도 자기손으로 버리고 말지.


사실 케넌이 그렇게 소련의 상황을 제대로 알려주지 못했다면, 그리고 루즈벨트가 죽지않아 트루먼이 반공정책을 시행하지 못했다면, 소련은 더욱더 큰 세력으로 성장하여 그야말로 유럽 전지역에 영향력을 확대했을 수도 있는거지.


미국의 가장 큰 실수는 바로 이런 소련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단거야.


즉, 북한이 노동당규약에 한반도를 적화통일하겠다고 의도를 명백히 표명해놨는데도 햇볕정책을 명목으로 북한 정권을 지원한 어떤 세력은 어떠한 이유로도 합리화할 수 없어. 무능의 극치 혹은 간첩질일 뿐이지.


저번 시간에는 마셜플랜, 체코의 공산화, 독일의 분열과 베를린 봉쇄, 일본의 상황에 대해 알아봤어.


이번 시간에는 냉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지속해서 변화하는 미소관계에 대해 알아보자.

 

 

자 지난시간에 살펴보았던 마셜플랜과 코민포름의 형성은 서방권와 소련권이 "대외적으로" 결집한 예시였어.


그렇다면 내부적으로는 어땠을까?


내부적으로 이데올로기를 공고화하는 현상은 미국과 소련 모두에서 일어났어.


당연하지 않겠어? 미국은 이미 소련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도 못하고 여론은 "소련은 우리 협력자라능" 하고 있었으니 내부적으로 단결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었지.


먼저 소련부터 살펴보면, 소련은 스탈린의 개인숭배체제를 완성해.


북한 주민들이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부자 동상 앞에서 절하는 그 모습을 스탈린이 먼저 행하였던거지.


스탈린은 이미 중공업 우선의 5개년 개발로 소련 인민들을 굶어죽게 했다는 걸 예전에 알아봤었지?


그런데 멍청한 바보 스탈린찡은 또다시 중공업위주의 5개년 계획을 입안해. 그저 머릿속엔 미국과의 군비경쟁밖에 안들어 있었지.


또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혀갔던 소련군 병사들은 모두 강제노동형에 처하게 되었고, 참전 부상병들 또한 아무런 치료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되었어.


말이돼? 자기는 목숨바쳐 조국을 위해 싸우다가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항복했는데 그런 군인을 처벌하고 치료도 제대로 안해준거야.


여기서 그치지 않았어. 스탈린은 사회 모든 분야에 있어서 이념의 동질성을 강조하지.


쉽게말해 영화든 책이든 음악이든 모든걸 사회주의 찬양하는 방향으로 강제한거야. 마치 우리 윗동네를 보는것 같지?


여담으로, "쇼스타코비치"의 왈츠을 한번 들어봐. 나름 그때의 저항음악가라면 저항음악간데 당시 상황을 반영한듯 왈츠치고 분위기가 우울해.


그러나 소련의 사회적인 불안은 여전했어. 또 체코가 공산화되었던 그 1948년의 흉작이 소련도 덮치게 돼.


이로 인해 200만명의 소련 인민이 굶어죽는 상황에 처해.


이런 사회적 모순에도 어떻게 소련 인민들이 스탈린을 지지할 수 있었을까?


스탈린은 영리하게도 이러한 소련의 사회적 부조리를 부정하지는 않았어. 다시말해 북한처럼 다죽어가는 상황을 강성대국이라며 미화하지 않았단거야.


대신에 스탈린은 이러한 모든 사회적 부조리와 어려움이 자신의 말을 듣지않는 모두 공산당의 간부들 때문이라고 하지.


이래서 당의 간부들은 인민의 불만의 대상이었지만 스탈린만은 이러한 불만의 대상에서 피해갈 수 있었던거야.

 

(사진은 매카시 상원의원)

 

이념의 통제는 소련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이루어졌어.


당시 미국은 생산력이 증대되면서 소비를 증대해야하는 동시에 물가상승도 막아야했지. 소련이랑 상황이 정반대지?


그런데 미국 내 노동조합들은 대규모파업을 일으키며 공산주의 이념에 동조하기 시작해.


이러한 파업은 미국 산업이 마비될 지경에 이르게 되지.


트루먼 정권은 이러한 파업을 진압하고 주요산업을 국유화해버려.


트루먼의 정책은 사회를 보다 민족주의적이고 보수적인 분위기로 이끌었고, 의회선거에서 공화당이 득세하게 돼.


1946년에는 정점에 이른 노동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공산주의 세력을 색출 및 탄압하는 Red Hunt(쉽게말하면 빨갱이 사냥)가 시작돼.


또 50년대에 들어서 상원의원이 조셉 매카시를 필두로 미국 정부 내에 소련 스파이가 잠입해있다는 주장을 펼치는 세력이 등장해.


바로 여기서 우리나라 좌파 인물들이 뻑하면 들먹거리는 매카시즘이란 용어가 등장해.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마녀사냥이란 뜻이지.


그렇지만 미국의 경제상황은 여전히 호황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사상통제에도 대중의 반발은 크지 않았어.

 

 

자 이렇게 미소가 서로 내외부의 단속을 하던 시기에 1949년 7월, 소련이 뙇!!! 하고 원폭개발에 성공해.


이건 정말 중요한 사건이었어. 원래 핵전력은 미국이 전부 독점하고 있었고, 소련이 중근동에서 혹은 독일에서 미국에게 깨갱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핵전력을 소련이 갖고있지 못했기 때문이지.


그런데 드디어 핵실험에 성공한거야. 이제 대미외교에 대해서 자신감이 치솟게되지.


이에 대해 미국은 1950년 4월, 바로 안전보장계획을 수립하고 수소폭탄 개발을 시작하지.


또 미국은 서유럽의 지상군을 대폭 증강하고 공군기지를 유럽 각국에 배치했어.


이렇게 알력을 하던 중에 1950년 6월 25일에는 한반도에서 북한이 남한의 뒤통수를 후려치며 6.25 전쟁이 터져.

 

참고로 알아둬. 6.25전쟁은 북한의 남침이야.

 

이걸 헷갈려서 북침이니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아 물론 헷갈리는 게 아니라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놈들도 있어. 그건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뿐, 6.25는 부정할 수 없는 북한의 남침이야. 이는 우리가 소련과 수교후 공개된 소련의 비밀 외교문건에서도 공개된 바 있지.

 

똥침이 손가락으로 똥X를 찌르는건데, 그걸 손가락침이라고 안하고 똥침이라 하지? 그러니까 북침이 아니라 남침인거야.

 

(NATO, 북대서양조약기구 가맹국)

 

이렇게 소련의 군사능력이 급속도로 성장하고, 공산권이 한국전쟁에서는 대등하게 미국과 겨루게 되자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똥줄이 땡기기 시작해.


한시라도 빨리 서독을 재무장시켜 최전선을 지키지못하면, 유럽의 서방진영마저도 공산권의 손아귀에서 안전하지 못했지.


이에 미국은 서독을 서방권의 군사결성체인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에 편입하려고 해.


근데 이게 왠걸? 프랑스의 샤를 드골이 반대를 하고 나선거야.


드골은 이미 개인적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자신을 정식 프랑스정부로 인정해주지 않은 것에 대해 미국에 섭섭함을 갖고 있었고, 또 프랑스가 두번이나 독일에게 탈탈 털렸는데 그런 웬수들에게 다시 총을 쥐어주고 싶었겠어?


프랑스는 서독의 NATO 편입은 절대 안되고, 그냥 경제적으로만 통합하자는 슈먼플랜을 제안해.


이 슈먼플랜은 나중에 유럽석탄철강공동시장(ECSC)의 결성의 근거가 되고, EU 통합까지 이어지게 되지.


하지만 결과적으로 프랑스가 서독의 NATO 편입을 막으려는 시도는 실패하고 말아.

 

(위가 아이젠하워. 밑이 체게바라 품에 안긴 흐루시초프;;)

 

이렇게 알력을 하던 중에 1953년, 미소의 지도부가 모두 교체돼.


미국에서는 트루먼이 물러나고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전 NATO 사령관이 대통령직에 당선되고,


소련에서는 스탈린이 사망하고 흐루시초프가 새로운 서기장에 임명되지.


자 먼저 우리는 흐루시초프에 대해서 알아보자.


아까 소련 국내에서는 스탈린 개인에 대한 숭배체제가 완성되었다고 했었지?


그런데 소련인민 모두가 존경해마지않던 인민밖에 모르는 바보 스탈린이 갑자기 죽어버린거야.


권력의 구심점이 없어진 소련은 국내적으로 무척이나 불안해지기 시작하지. 스탈린이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거라곤 예상을 못했거든.


흐루시초프는 이런 소련을 국내적으로 안정시키는게 급선무였어.


따라서 대외적으로 미국과 계속 경쟁하는걸 도대체가 신경쓸 겨를이 없었던거야.


또 워낙에 스탈린 중심으로 질서가 재편되어 있던터라 자신의 지도자로서의 권위도 나락으로 추락해있던 상태였지.


흐루시초프는 뭐랄까? 좀 전통적인 관료출신이 아니라서 사람이 세련되지가 못해. 감정적인 대처로 유명하고, 나중엔 이게 자신의 실각으로 이어지는 인물이야.

 

 

도대체가 미국과 경쟁할 겨를이 없던 흐루시초프는 잠시 서방과의 화해전략을 구사해.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소련과 서방권이 갈기갈기 찢어 점령하고 있었다고 지난 시간에 배웠지?


1955년, 흐루시초프는 그 중 오스트리아에 주둔하던 소련군을 모두 철수시켜버려.


또 우리 저번에 그리스 사태에 대해서 배웠잖아 기억나니?


그리스를 지원해준게 유고슬라비아의 티토였고, 소련은 오히려 그걸 말렸는데 욕은 소련이 다먹은 눈물나게 억울했던 사건.


그때부터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자인 티토와 소련은 사이가 많이 안좋게 되었는데, 흐루시초프는 티토와의 관계를 개선하려고 노력하지.


또 초기 소련 시기에 스탈린이 권력투쟁에서 승리했을때, 소련이 워낙 어려우니 세계혁명은 포기하고 소련이라도 잘살자는 1국사회주의를 주장했다고 했지?


무튼 흐루시초프는 다시금 세계혁명의 꿈을 이루겠노라 다짐하고 전세계의 공산세력에 대한 지원을 약속하지.


이런 흐루시초프의 정책변화는 두가지 이유였어.


1) 소련 내부상황의 해결

2) 스탈린체제를 탈피해서 자신이 제1지도자로 떠오르기 위함


이 사람은 1956년 2월, 공개석상에서 스탈린 비판을 한걸로도 유명한데, 이 스탈린 비판으로 얽힌 일화들도 많으니 이건 다음시간에 설명할게.


그리고 마셜플랜에 대항하기 위한 소련권의 결성체이던 코민포름도 해체해버려.

 

 

사실 소련이 이렇게까지 파격적으로 평화의 손길을 내밀었음에도 미국의 아이젠하워는 떫떠름 했어.


아이젠하워는 북한놈들이 평화를 외치는 것처럼, 소련도 입으로만 평화라고 하고나서 미국의 뒷통수를 때릴거라고 생각했지.


특히 당시 공화당 출신인 국무장관 덜레스는 동유럽을 소련으로부터 해방시켜야한다고 주장할만큼 대소 강경론자였어.


그러나 미국도 국내사정이 군사보다는 경제에 치중을 해야하는 상황이었고, 소련과 누가 피 더 많이 흘리나 내기를 해도 얻을 것이 없었지.


(여담으로, 아이젠하워의 이러한 재정축소 정책에 따라 군사력이 핵무기위주로 증강되기 시작했어. 진정한 핵전력의 시대가 도래했지)


미국과 소련이 각자의 일로 바빠 서로 대결할 여유도 없고, 또 소련도 원폭을 가짐으로써 미국이 예전처럼 소련에게 고자세로 나갈수도 없게되자 미소는 잠시 해빙 분위기를 맞이하게 돼.


1955년 7월에는 제네바에서 미소 정상이 회담을 가지고, 10월에는 미영불소의 외상들이 회담을 갖지.


이 때 흐루시초프는 미국을 방문할것을 약속하고, 실제로도 방문을 해.


대신에 미국에서는 소련을 방문할 길이 쿠바미사일위기로 사라지게 되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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