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이후 흐루시초프가 집권하면서 소련이 대내외적으로 해빙 시대를 맞았다는 것을 지난 시간에 알아보았어.

소련 내부적으로는 스탈린 정책에 대한 반동으로 자유주의적인 물결이 일었고, 대외적으로도 서방권과의 관계가 완화되었지.

사실 흐루시초프의 이러한 작은 개혁은 후의 소련 붕괴시 고르바초프의 개혁에도 큰 영향을 미쳐. 흐루시초프 서기장 시절 청년기를 겪었던 인텔리들이 후에 고르바초프 시대의 실세가 되기 때문이지.

국내적 개혁으로 흐루시초프는 인민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스탈린의 중공업 위주 경제체제를 벗어나 경공업 중심의 경제개발을 추진하고, 크렘린궁을 민간에게 개방, 정치범을 석방하기도 하지.

국외적으로는 오스트리아에서 일방적으로 철군하여 오스트리아를 중립화 시켜. 또한 일본과의 국교회복을 시도하는데, 이때 대충 덮어두었던 쿠릴열도에 대한 영유권 문제가 지금 와서 불거지게 되었지.

 

무엇보다도 흐루시초프의 입장에서는 독일이 가장 큰 골칫덩이였어.

흐루시초프의 의견은 독일을 중립화시켜 한국의 비무장지대DMZ처럼 완충지역으로 만드는 것있지.

왜겠어?

서독과 동독이 갈린 전선은 서방권과 소련권이 대치하고 있는 제1전선이라고 말했었지 지난 시간에?

2차대전 직후만 하더라도 서유럽 지대가 쑥대밭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소련입장에서는 크게 두려워할 것이 없었어. 설사 소련권과 서방권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다하더라도 미국이 지원병력을 파견하기 위해서는 대양 하나를 건너야했지.

그러나 마셜플랜으로 인해 이러한 상황이 50년대 중반 이르러 바뀌어버려.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 국가들은 무서운 속도로 경제와 군사력을 복구시켰고, 더 나아가 서독마저도 재무장을 하기 시작했지.

따라서 소련 입장에서 이렇게 강력해져가는 서유럽 국가와 국경선을 맞닿고 있는 것이 굉장히 큰 부담이었던거야.

흐루시초프는 1955년에 "우리도 군을 뺄테니, 너희도 군을 물리고 독일을 중립화하면 안될까? 응? 응?"하며 서방측을 꼬시지만 끝내 거절당해.

거꾸로 서방측은 1955년 5월, 서독을 NATO의 가맹국으로 가입시키지.

흐루시초프는 이내 독일 문제는 아직 한참 멀었다고 한숨 팍 내쉬고, 동구권을 아우르는 군사결성체인 바르샤바조약기구를 결성해.

이러던 중, 1956년은 그야말로 소련 격변의 해였어.

1956년 2월, 소련 제20회 공산당대회 이후에 가지는 뒷풀이에서 흐루시초프는 "스탈린 개새끼!!!"를 외치게 돼. 이게 바로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 연설이지.

자 스멀스멀 기억을 되새겨 2차대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보자.

스탈린은 독소불가침조약을 너무 맹신한 나머지 독일의 소련침공에 대한 아무런 방비를 하지 않고 있었다고 했지?

이러한 스탈린의 2차대전에서의 무능과 무리한 중공업 우선 정책으로 수백만의 인민을 아사시킨 것을 여과없이 비판해.

또 가장 중요한건, "자본주의 진영과의 체제 선의 경쟁을 통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전쟁필연론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하지.

예전 시간에 제국주의에 대한 레닌의 분석을 들여다보면, 거기서 레닌이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했었고, 그에 대한 해결책은 사회주의 혁명 뿐이라고 배웠지?

흐루시초프는 소련의 건국이념의 뿌리를 부정해버린거야.

한가지 더, 흐루시초프는 소련은 더이상 해외의 공산당이 소련의 지침을 따를 것을 강요하지 않겠다고 선언해.

이러한 내용이 들어있는 스탈린 비판은 소련과 중국의 관계균열, 폴란드 사태, 헝가리 사태를 낳게 되지.

스탈린 비판으로 폴란드, 헝가리 공산당은 신이 난거야. 더이상 소련의 눈치 안보고 자율적으로 알아서 잘 살라잖아.

스탈린 시절만해도 이것저것 못 먹고살고 힘들어죽겠는데 맨날 스탈린이 시키는대로만 하니까 아주 죽을 맛이었던게지.

몇년이 지난것도 아니고, 스탈린 비판이 있고나서 딱 네 다섯 달 정도 되니까 폴란드에서 봉기가 일어났어.

1956년 6월 28일, 폴란드 공업지대 포즈난Poznan에 있는 자동차 엔진공장의 노동자들이 경제적인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시위를 해.

노동자들 뿐만 아니라, 일반 폴란드 시민들 또한 폴란드의 자유화와 경제난 해소를 위해 이 봉기를 지지했지.

이때 중심이 된 정치적 인물이 바로 고물카(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였는데, 이 사람은 유고슬라비아의 티토와 스탈린 소련이 사이가 안좋을 때 티토주의(독자적 공산주의)를 옹호하다가 투옥되었던 인물이야. 바로 폴란드의 독자적 공산주의를 외치는 정치가였지.

소련은 즉시 고물카를 비롯한 신정권의 지도부를 모스크바로 소환했지만, 배짱좋은 고물카는 이를 거절해.

별수없이 흐루시초프가 폴란드 바르샤바를 전격 방문하여 고물카와 만나게 되었지. 위성국가 배짱좋지?

흐루시초프는 고물카를 배신자라고 비난하며 폴란드의 자유화 운동을 무력진압하겠다고 엄포해.

그렇지만 고물카는 영리한 정치인이었어.

그는 흐루시초프에게 "야 니가 스탈린 비판하면서 뭐라그랬어? 기억안나? 독자적 공산주의 용인해주겠다 그랬잖아. 우리 딱 독자적 공산주의만 하고 너네 배신안때리고 계속 소련에 남아있을게"라며 설득을 해.

흐루시초프도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까 그건 맞는 말이거든. 지가 지입으로 소련의 지시를 안받아도 된다고 해놓고선 폴란드 사태를 무력진압하겠다말겠다 하는 꼴이 웃긴거야. 그리고 계속해서 소련권에 남아있겠다는데 더 압박해봐야 폴란드 여론만 안좋아질 판이었지.

흐루시초프는 본래 스탈린처럼 독한 인물이 아닌지라(지난번에 흐루시초프 사진봤지?) "어? 그래? 그러고보니 그렇네. 알겠음 ㅇㅇ"하며 모스크바로 돌아가. 그리고 고물카를 폴란드 공산당 서기장으로 임명하여 폴란드의 독자 노선을 존중해줘.

이렇게 폴란드의 독자적 공산주의 정권이 소련의 설득에 성공하자 헝가리에서도 임레 나지가 주축이 되어 1956년 부다페스트에서 폴란드 동조시위가 발생해.

그렇지만 소련 입장에서는 폴란드가 자신들의 손아귀에서 반쯤 벗어나버리는데 성공했기 때문에 헝가리까지 똑같은 꼴이 되길 원하지 않았어.

주헝가리 소련 대사였던 유리 안드로포프(나중에 소련 서기장까지 해먹어)는 소련 중앙에 헝가리 사태를 보고하였고, 1956년 10월 25일에는 3만명의 소련군이 부다페스트로 진입해.

그러나 시위세력의 저항은 생각보다 거셌고, 소련군과 시위군 사이에 시가전이 벌어져.

저항이 거세봐야 시위군이 그 막강한 소련군을 이길 수 있었겠어?

더이상 저항하다가는 자신의 세력이 박살나버릴 것이라 계산한 임레 나지는 "폴란드처럼 너네 배신안때리고 계속 소련에 남아있을게"하며 흐루시초프를 설득해.

우리 착한 흐루시초프는 또 이걸 믿고 부다페스트에서 소련군을 철수시키지.

흐루시초프도 자기 자신이 제국주의자란 오명을 쓰기 싫었기 때문에 폴란드 사태에서건 헝가리 사태에서건 최대한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싶어해.

그렇지만 이렇게 착한 흐루시초프의 뒤통수를 나지가 때려버리지.

나지는 서방권에 "우리 좀 도와주소"하며 중립을 선언, 이윽고 바르샤바조약기구에서 탈퇴를 선언해. 이는 소련권에서의 이탈을 의미하지.

막상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입으로만 소련을 비판하고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나지의 행동은 소련만 열받게 한 꼴이 되고 말았어. 서방권은 원래 동유럽은 소련권이라고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지.

흐루시초프는 열이 받을대로 받게 되었어. 나지의 이러한 선언은 소련에 전면 도전하는 최후통첩과도 같았거든.

소련은 무려 15개 사단병력을 부다페스트에 투입, 시위대를 진압하고 나지를 처형해버려.

헝가리 사태는 임레 나지가 서방측의 지원을 지나치게 맹신했다는 데 그 원인이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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