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강철이라 연재가 늦어졌어 미안ㅠㅠ

이번에는 이집트에서 일어난 수에즈 위기와 세계가 미소 양극체제로 완전히 재편되는 과정을 살펴볼거야.

물론 2차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의 영향력이 독보적으로 커진 것은 사실이지만,

수에즈 위기는 그야말로 영국, 프랑스 등의 유럽 기존 제국주의들이 완전히 몰락하고

국제체제가 미소 양극체제로 전환되는 본격적인 시발점이야. 시발이란다고 이상한 생각하지말고...

 

먼저 중동 지역에서 아직까지도 이를 갈고 있는 이스라엘 문제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자.

그래야 이집트가 왜 중동~북아프리카 지역에서 맹주국가가 되려고 했는지 알 수 있으니까말야.

현대의 중동 문제는 그 뿌리가 1차대전까지 올라가.

1차대전 때, 영국과 오토만(지금의 터키)은 서로 적국이었어.

대부분의 아랍 지역은 거리상 가까운 오토만 제국의 영향권 하에 있었지.

영국은 이 아랍지역에 진출하기 위해 "너네 오토만으로부터 독립시켜 줄테니 내 편해라"하며 꼬드겼어.

또 영국은 멍청하게도 유태인에게 중동지역에 정착지를 마련해주겠다고 이중약속을 하지.

이게 바로 발포어 선언이야.

100만의 유태인들은 발포어 선언에 따라 팔레스타인 지방으로 집결해.

제일 억울하게된 건 팔레스타인 거주민이었지.

팔레스타인인들은 자신들의 땅을 빼앗기고 주변 아랍국가로 유랑하게돼.

또한 주변 아랍국가들의 시선도 고울리가 없었지. 따라서 UN과 소련까지도 이스라엘 건국을 승인했지만,

아랍국가들은 이스라엘을 승인하지 않아.

이스라엘 건국과정부터의 이러한 대치가 후에 몇십년 간 중동의 전쟁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지.

자 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수에즈 위기에 대해 설명을 해볼게.

이집트에서는 1953년 파로크 국왕이 축출되고, 이듬해 1954년에 쿠데타 실세였던 낫세르(나세르)가 집권해.

낫세르는 이집트를 군사/경제적으로 성장시켜 북아프리카~중동 지역의 맹주가 되고자 했지.

당시 이집트가 맹주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현안들을 해결해야만 했어.

① 이집트 자체의 영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 : 1954년 영국으로부터 수에즈에서의 영국군 철수 약속

② 북아프리카~아랍 지역에서의 제국주의 청산 : 프랑스 치하 알제리의 알제리민족해방전선 지지

③ 이스라엘 견제 : 팔레스타인 난민 수용, 수에즈 운하에서 이스라엘 선박 통행 금지

이 세가지가 이집트가 맞닥뜨린 임무였고, 낫세르는는 하나하나 해결해나가.

먼저 낫세르는 1955년 9월, 흐루시초프 소련과 군사원조조약을 체결하고, 동시에 미국에게도 경제적 원조를 구해.

무려 7천만 달러라는 거금을 미소 두 진영에 교묘하게 기대어 뜯어낸거지.

그러나 소련과 붙어먹은 낫세르를 미국이 고운 시각으로 볼 리가 없었어.

낫세르가 이중계약을 했다는 사실을 안 미국은 이집트에 대한 경제원조를 중단해버려.

돌파구가 필요했던 낫세르는 이에 따라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를 단행해.

위치 상으로 수에즈 운하는 매우 중요한 지점이야.

만약 영국의 무역선박이 아시아로 간다고 생각해보자.

수에즈 운하를 거치지않으면 선박은 아프리카 최남단을 돌아서 가야해.

그러나 수에즈 운하를 거치면 어마어마하게 시간과 금전이 절약되었지.

전통적인 해상무역국가인 영국에게 이러한 수에즈 운하 국유화는 매우 치명적인 것이었어.

영국은 낫세르를 치기 위해 프랑스, 이스라엘과 물밑협상을 하게 되지.

낫세르가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을 지원하면서 프랑스 입장에서도 낫세르는 눈엣가시였고,

이스라엘 또한 군사적으로 성장하며 자기들을 견제하는 이집트를 두고볼 수가 없었지.

1956년 10월 29일, 영국/프랑스/이스라엘 연합군은 시나이 반도 침공을 시작으로 이집트를 공격해 들어와.

이게 바로 제2차 중동전쟁(수에즈 전쟁)이지.

공격 4일만에 이스라엘군이 시나이반도를 장악하였고, 영국과 프랑스는 수에즈에 공수부대를 투입하는 데 성공해.

연합군의 작전은 대성공이었던 셈이지.

그러나 미국과 소련은 이러한 영국/프랑스/이스라엘을 맹비난해.

겉으로는 이집트 침공이 그들의 제국주의적 침탈이라고 비판하였지만, 실상 영/프/이스라엘 연합군이 이집트 침공전

미국 측과 일말의 상의도 없이 자기들 멋대로 공격을 개시했던 게 아니꼬왔던거야.

소련의 흐루시초프는 무려 영국과 프랑스에 대해 핵공격을 하겠다며 위협해.

이집트 낫세르 입장으로선 아주 든든한 친구가 생긴 셈이지.

어찌됐거나 1956년 11월 6일, 침공 개시 2주도 안되어 영국/프랑스/이스라엘 연합군은 이집트로부터 철수해.

이때부터 기존의 제국주의 국가들은 완전한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고,

세계는 온전히 미국과 소련의 양강 체제로 들어서게 되었지.

자 이제 다시 미소관계로 포커스를 맞춰보자.

스탈린 사망 이후 흐루시초프가 소련 국내 문제에 집중하기 위해 서방세계와 잠시 해빙무드를 가졌다고 배웠어.

그런데 이러한 해빙무드는 채 10년이 가지 못하게 붕괴되고, 미소는 다시 서로에게 이갈리는 적이 되고말지.

먼저, 미국과 소련은 각자의 지역(미국은 라틴아메리카, 소련은 동유럽)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공고히 해.

바로 옆에 붙어있는 국가들이 자신을 따르지 않으면 그만큼 심각한 안보위협도 없기 때문이지.

각자의 지역에서 팽창하는 미소의 모습은 다음 시간에 알아보기로하고,

일단은 미소 해빙무드가 왜 깨졌는지 알아보자.

해빙무드라고는 해도 미국과 소련은 수없는 경쟁을 했어.

1957년 10월, 소련은 세계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를 발사하는 데 성공해.

우주산업과 로켓이란 게 순수하게 과학적 목적으로 진행되는 걸까?

나중에 내가 연재할 핵전략에서도 알아보겠지만, 기본적으로 로켓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원리는 거의 같아.

다만 로켓이 우주로 쏘아올리면 끝인 한편, 미사일은 쏘아올렸다가 다시 대기권으로 진입한다는 점만 다르지.

즉, 소련의 인공위성 발사성공이란 건, 소련의 핵개발(1949년)이 미국보다 늦었지만,

핵탄두 전송(전송받는 사람은 원치않는) 능력에 있어서는 미국을 능가하였다는 의미가 있어.

이미 미국은 서유럽 지역에 많은 군사기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대륙간탄도탄에 대한 요구가 크진 않았어.

그냥 서유럽 지역에서 소련권으로 밀고들어가면 그만이었으니깐말이지.

그러나 소련의 대륙간탄도탄 개발은 크게 두가지 의미가 있었어.

① 미국 본토를 공격하려면 대양을 건너 상륙작전을 펼쳐야했던 소련이 버튼하나로 미국 본토를 핵 사정권에 넣음.

② 서방권(북대서양조약기구) 내에서의 미국의 군사적 열위에 대한 불안감 고조

따라서 미국도 절대 가만히 있을수가 없었던거지.

미국은 1957년 12월, 사거리가 5000km에 달하는 최초의 ICBM인 아틀라스를 개발해.

또한 이듬해 1958년 2월, 인공위성 익스플로러를 발사하고 우주산업에 박차를 가하지.

또 하나의 경쟁은 바로 독일 문제를 둔 경쟁이었어.

서독에서 "라인강의 기적"이 일어나며 동서독의 경제적 격차가 점점 커지고,

군사적으로도 서독이 재무장을 하며 소련권을 지속적으로 견제하니까

흐루시초프는 어서 독일을 완충지역으로 만들고자 했지.

특히 베를린은 동서베를린으로 나뉘어 각각 소련과 서방측이 분할점령하고 있었는데, 위치가 동독 안에 있었어.

소련 입장에서는 자신의 세력권 안에 서방측의 군대를 둔다는게 영 마음이 편치가 못했지.

흐루시초프는 1958년, 베를린 통첩을 통해 베를린으로부터 4개국 점령군을 6개월 내로 철수하자고 제안해.

만약 서방측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소련이 단독으로 철수하고 베를린을 동독 관할에 둘 것이라 선언하지.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서방측은 이러한 제안을 단칼에 거절해버리고,

1959년 3월, 흐루시초프는 베를린 통첩을 철회해.

베를린 통첩 때문에 소련은 미국과의 기싸움에서 꼬리를 내려버린 꼴이 되고 말았어.

당연히 흐루시초프의 국내적인 지지는 하락하게 되었지.

살살 틀어지고 있는 서방과의 관계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흐루시초프는 서방측에 "4년이내 일반완전군축"을 제안해.

일반완전군축이란, 특정 무기체계만 줄이자는 게 아니라, 전면적인 전체 군비를 다 줄이자는 거야.

군비란, 군사비, 군사에 지출되는 금액이기 때문에 군비를 줄인다는 건 군사력을 축소한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지.

흐루시초프는 실제로 소련의 1/3을 축소하겠다고 주장하고, 그만큼까지는 아니지만 축소를 하기도 했어.

그렇지만 줄어든 지상군을 전략로케트군을 창설하여 핵전력으로 메우기 시작했지.

자 이때 미국과 소련의 아슬아슬한 동침이 끝나게되는 일이 발생해.

바로 1960년 5월 1일, 미국 U-2 정찰기가 소련 영공에 고공으로 침투하였다가 미사일에 격추당한거지.

이를 바로 U-2기 사건이라고 해.

원래 U-2는 엄청난 고공으로 비행하기 때문에 소련의 지대공미사일로 격추가 불가능했는데,

해당 기체가 엔진 이상으로 고도를 낮춘 사이 소련 방공부대가 발견하고 격추시켜버린거지.

흐루시초프는 쾌재를 불렀어.

자기들은 미국한테 간쓸개 내줄거 다 내줘가며 해빙무드를 지속시키려고 하였는데, 미국은 거의를 거절해버렸지.

이로 인해 흐루시초프의 소련내 인기도 점점 떨어지고 있었고말야.

그런데 U-2기 사건으로 미국이 꼼짝못하는 빌미가 생겨나자 다시 주도권이 소련의 손에 잡힌거야.

소련은 미국의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했지만, 아이젠하워는 사과를 하지 않았어.

이에 따라 미소가 잠시동안 맺었던 파리정상회담, 군축회담 등은 모두 무산되었지.

즉, 잠시동안의 미소 데탕트는 여기서 막을 내린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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