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 냉전사에서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뒷걸음질을,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소련의 뒷걸음질을 야기해.

두 전쟁 모두 당대 최강의 세력이었던 미국과 소련이 약소국을 상대로 상당히 고전했던 전쟁이고,

원하는 바를 얻지못하고 결국은 철수까지 이르게 된 사건이지.

특히 베트남 전쟁은 이후 제3세계에서의 미소경쟁에서 소련이 우위를 차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소련 몰락의 간접적인 계기가 되기도 하였지.

먼저 종주국 프랑스와 식민지 베트남 간 일어난 제1차 베트남전쟁(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대해 알아보자.

베트남은 원래 프랑스의 식민지였는데, 2차대전 중 일본이 베트남을 점령함으로써 일본 수하에 들어가.

일본은 베트남 내 프랑스 세력을 축출하고 친일괴뢰정권을 세우려고 하지만,

사실상 식민통치의 행정체계는 프랑스가 장악하고 있었어. 즉, 여전히 프랑스의 지배하에 있었던 거지.

이에 대항하여 베트남 북부에서는 1941년부터 호치민이 베트남독립전선(월맹의 전신)을 결성해.

호치민은 사실 공산주의자라기보다는 민족주의자로서의 성격이 더 강했는데,

이는 2차대전이 끝날때까지 호치민이 중국 국민당(현재의 대만)과 미국의 지원을 받고자했다는 점에서 알수있지.

어찌됐건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자 프랑스 세력만 축출하면되었기에,

호치민은 1945년 9월 하노이를 중심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프랑스 정부와 협상에 들어가.

그러나 종주국 프랑스는 지난 시간에 알제리 사태에서도 봤듯이, 식민지를 호락호락 포기할 놈들이 아니었어.

(참고로 말하자면 2차대전 패전국인 독일과 일본의 식민통치와 무자비한 지배에 대해서만 비판이 많은데,

승전국인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정책과 만행에 대해서는 제대로 조명되지 않은 부분이 많아.

누가 누굴 욕할수 있는 처지가 아냐 사실.

물론 독일과 일본이 잘했다는게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정책 또한 비판받아 마땅하다는 거지.)

이에 협상은 결렬되고, 호치민은 프랑스에 선전포고, 제1차 베트남전쟁이 발발해.

전후 국내재건 작업도 제대로 되지 않았고, 일본에게 상당기간 지배권을 내어주었던 프랑스는 패전의 연속이었지.

결국 호치민의 베트남독립전선이 1954년에 프랑스군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섬멸, 베트남이 승리하지.

이렇게 허망하게 식민지 베트남을 잃게된 프랑스는 미국에게 지원을 요청해.

사실 미국은 명분상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난색을 표해.

그렇지만 프랑스는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주장했던 "공산주의 도미노 이론"을 들먹이며

"너네가 안도와주면 아마 호치민 그놈이 인도차이나 반도를 전부 공산화시킬지도 몰라"라며 유혹해.

그러나 미국은 베트남의 배후에 소련과 중국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고,

잘못 건드렸다가는 이들을 자극하는 결과만 불러올거라 생각했지.

따라서 미국은 제네바 협정을 통해 프랑스와 베트남으로 하여금 평화협정을 체결하게 해.

이 협정 내용은 베트남을 월맹(북베트남)과 월남(남베트남)으로 분할하고,

각각의 지역에서 독립적인 자유총선을 실시한다는 내용이었어.

그러나 대소 강경파였던 미국 덜레스 국무장관은 독립총선 따위는 없을것이며,

프랑스 식민지였던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모두를 소련에 대항하여 미국이 수호해야하고,

월맹의 호치민을 축출해야한다고 주장해.

또한 인도차이나 반도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를 조직하지.

월남(남베트남)의 상황부터 알아보자면,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응오 딘 디엠이 대통령으로 선출돼.

이 시기부터 남베트남 지역은 프랑스의 영향력을 완전히 배제하고 미국의 영향권으로 편입되지.

그러나 응오 딘 디엠은 지나치게 미국에 의존할 뿐 아니라, 상당히 부패한 정권이었고 국내 지지도는 떨어져만 갔지.

급기야 응오 딘 디엠은 미국의 지지마저도 잃을 위기에 몰렸고, 결국에는 암살당하고 말지.

한편 월맹(북베트남)은 이러한 월남의 정치적 불안정을 이용하여 공세를 펼치고자 해.

호치민은 비무장지대를 우회, 라오스를 경유하여 베트남 남부 지역에 게릴라 병력을 투입하고,

1960년 12월에는 월남의 공산주의 세력을 지원하여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을 결성해.

한국으로 따지자면 북한 전체주의 집단이 한국에 간첩을 파견하였고, 그 간첩의 규모가 일개 정당의 수준이었던 거지.

호치민의 목적은 월남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배제하는 것이었어.

이때 외세의 배척과 민족자주통일 등의 문구가 나오게 되지.

마치 한국의 모 진보세력을 보는 것 같지 않아?

그러나 호치민은 미국의 본격적인 개입을 방지하기 위해 대대적인 공세를 펼치지는 않았어.

그러던 중 1964년 8월, 통킹만에서 월맹의 어뢰정이 미군 구축함을 공격해.

이로 인해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 뒤 대통령직을 승계한 린든 존슨은 통킹만에의 대대적인 폭격을 지시하지.

이게 바로 베트남 전쟁의 시작이었어.

미국은 초기에 월맹 게릴라를 차단하는 전술이 아닌, 게릴라 근거지를 색출 및 섬멸하는 전술을 구사하였어.

그렇지만 월맹의 땅굴이 말해주듯, 게릴라는 고정된 기지를 갖고 있는게 아니야.

따라서 게릴라 근거지를 섬멸하는 것은 베트남 전역을 샅샅이 융단폭격해도 불가능한 일이었지.

정글투성이인 베트남에 고엽제와 소이탄을 폭격한 것도 바로 게릴라 근거지를 색출하기 위함이었어.

그러나 게릴라는 계속해서 창궐되고 억울한 민간인의 피해만 속출하는 악순환이 연속되었지.

참고로 9탄 탈식민지화 에서 알아봤듯이, 영국은 공산주의 레지스탕스의 섬멸을 목적으로 하지않고,

주민의 여론을 포섭하는 쪽으로 작전을 펼쳤어.

반면 미국은 그저 적군을 섬멸한다는 구시대적인 작전에 목을 메며,

월맹이 월남의 주민들을 심리전으로 선동하는 모습을 그대로 방치하고말았어.

베트남전에서 미국이 실패를 거듭하자 미국 사회 내에서도 여론 결속이 붕괴되기 시작해.

젊은 층을 중심으로 자본주의 국가와 제국주의적 팽창에 반대하는 반전여론이 탄생하기도 하지.

2차대전 이후 소련과 대립하면서 묶어두었던 여론이 와해되기 시작한거야.

1967년에 이르러서는 미국 대부분의 도시에서 대규모의 반전 시위가 발생하기도 했어.

대표적인 현실주의 정치학자인 한스 모겐소 또한 미국이 베트남에서까지 전쟁을 수행할 이익이 없다고 비판했어.

이러한 여론을 다시 재결집하기 위해 대통령 린든 존슨은 1968년 1월, 미국이 승리하고 있다고 홍보하지.

그러나 월맹은 당월 구정 대공세를 펼치고 미군이 점점 수렁에 빠짐으로써 미국민의 미국 정부 불신은 높아졌지.

이로 인해 미국에서는 린든 존슨이 재선에 실패하고 리처드 닉슨이 대통령으로 당선돼.

닉슨은 1968년 5월부터 평화교섭을 위해 파리회담을 주최하였지만,

1970년에 이르러 베트남 전쟁은 캄보디아까지 확대되지.

이에 닉슨은 미국의 아시아 문제 개입을 최소화할 것이라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어.

이는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얼마나 큰 부담감을 느끼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었지.

결국 1973년 1월, 미국과 베트남은 정전협정을 체결하게 돼.

이렇게 미국이 베트남에서 물러나기는 했지만, 계속해서 월남을 지원하며 공산주의 세력을 견제하고자 했는데,

이때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하게 되고, 미국의 월남지원은 약화되었지.

1975년, 월맹은 이 시기를 놓치지 않고 월남을 대대적으로 침공, 4월에 이르러 베트남을 적화통일해.

베트남의 공산화는 미국의 위상에 심각한 타격을 가하였고,

미국은 정부불신과 심각한 경제적 손실, 반정부 여론 등으로 피폐해져갔지.

베트남 또한 본토가 전장화되어 막심한 피해를 입었지만, 증강된 군사력을 통해 동남아시아에서의 맹주로 떠올라.

후에는 중국과의 영토분쟁에서 승리하기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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