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미사일위기를 설명하기 전에 왜 그러한 위기가 발생하였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일단은 미국의 중남미 영향권 확보과정에 대해 살펴보자.

결국 쿠바 미사일위기도 표면적으로는 미국의 쿠바 침투 실패가 직접적인 원인이 된 사건이거든.

미국과 소련은 상호의 영향권에는 간섭하지않는 것이 통례였어.

이런 암묵적인 룰 때문에 소련은 동유럽를, 미국은 중남미를 자신의 세력권으로 묶어놓을 수 있었지.

사실 미국이 중남미(라틴아메리카)를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은 방법은 굉장히 간단했어.

① 친미적인 독재정권을 지원

② 정권이 친미성향이 아니라면 군부 쿠데타를 사주

③ 미국의 직접적인 군사개입

이러한 세 방법은 아주 극명하게 나타나는데 일단 브라질부터 살펴보자.

 

2차대전 중 중남미의 대부분 국가는 미국 편에 서서 대독전쟁을 수행해.

그러나 1937년 브라질에는 제툴리우 바르가스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국가근대화를 추진하며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를 모델로 삼아.

미국은 브라질 군부를 지원하기 시작하였고, 군부는 쿠데타에 성공하여 바르가스를 축출하지.

그러던 중 1950년, 축출된 바르가스가 다시 브라질 노동당 후보로 대선에 출마, 당선돼.

바르가스는 석유회사를 모두 국영화하며 미국과의 이해관계를 모조리 단절시켜버리지.

현대의 차베스 베네수엘라를 생각하면 될거야.

미국과 브라질 군부는 바르가스 정권에 공산주의자들이 침투했다고 주장, 바르가스의 인기는 뚝 떨어지게 돼.

또한 치솟는 물가상승률을 잡지 못한것도 바르가스의 정치적 실패였지.

결국은 바르가스는 자살하고말아.

아르헨티나를 볼까? 이게 순서가 우연히 브라질-아르헨티나 순으로 된거지 절대 축구잘하는 순서로 쓴 게 아니야...

아르헨티나는 미국의 영향보다는 영국의 영향이 훨씬 컸어.

국내에 투자된 자본은 대개 미국보다는 영국자본들 뿐이었지.

1943년, 후안 페론은 최저임금제와 노동시간 제한 정책을 추진하며 쿠데타에 성공해.

1945년, 페론에 대항하는 군부와 우파세력이 쿠데타를 시도하고 페론을 체포하기도 했지만,

1946년 페론은 성공적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지.

그는 브라질 바르가스와 마찬가지로 히틀러의 파시즘을 추종했고,

아르헨티나 내에 침투해있던 미국과 영국의 사회간접자본 기업을 모두 국유화 조치해.

1951년부터는 드러내놓고 독재정치를 하기 시작하지.

그러나 페론의 포퓰리즘적 경제 정책은 곧 아르헨티나의 경제붕괴를 낳아.

페론은 조국의 경제를 살리기 위해 자존심을 구겨가며 미국과 영국의 차관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아르헨티나에서 미국의 영향력은 거대해져만 갔지.

후안 페론은 결국 1955년에 쿠데타로 축출되고말아.

포퓰리즘적 경제정책은 경제강국이자 라틴아메리카의 맹호였던 아르헨티나를

순식간에 개발도상국 수준으로 떨어뜨려버렸어.

이외에도 미국은 볼리비아에서는 바리엔토스 군부를 이용하여 좌파 에스텐소로를 축출,

과테말라에서는 아르마스 군부를 이용하여 좌파 아르벤스를 축출해.

미국은 대개 성공적으로 중남미 국가들을 자신의 영향권으로 편입하였고,

민주주의의 표상이라는 미국의 이미지와는 달리 영향권 확보를 위해서는 독재를 지지한 경우도 많아.

그러나 중남미는 미국의 바로 턱밑이었고, 자기들의 턱밑에서 공산주의 세력이 득세하게 놔둘수는 없었어.

다소 명분이 없더라도 당장의 실리를 챙기는 것이 우선이었지.

자 그렇다면 본론인 쿠바 위기로 들어가보자.

1934년부터 쿠바는 미국의 사실상 묵인 하에 풀헨시오 바티스타에 의해 독재가 이루어지고 있었어.

미국은 쿠바의 주요산업이었던 사탕수수를 수입하며 바티스타 정권을 지원했지.

그러나 쿠바 내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목소리가 커졌고, 미국은 명분상 어쩔수 없이 바티스타에게 자유총선을 요구해.

이 총선을 통해 민주주의자였던 그라우가 집권했으나, 쿠바 내 부정부패와 사회적 부조리가 매우 커졌어.

1952년 바티스타는 다시 쿠데타를 통해 재집권에 성공해.

쿠바의 정치경제는 점점 더 미국에 종속되기 시작하였지.

이에 1959년 1월, 피델 카스트로가 쿠바 혁명에 성공해.

카스트로는 1953년 1차 쿠데타에 실패 후, 혁명조직을 재건하여 1956년부터 혁명을 계획하였지.

그의 혁명동지인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와 함께말야.

바티스타 정권 축출에 성공한 카스트로는 대대적인 토지개혁을 실시하고, 사회주의 이념을 쿠바에 이식해.

이 과정에서 쿠바의 지주세력은 미국 플로리다로 탈주하게 돼.

이에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959년 7월, 쿠바의 사탕수수 수입을 중단해.

쿠바는 그야말로 미국 눈앞에 겨눈 칼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공산세력의 혁명은 미국을 크게 자극했지.

1959년 12월, 아이젠하워는 쿠바 망명자들과 CIA에게 쿠바침공을 지시해.

그러나 쿠바 망명자 군대는 쿠바 혁명군에 의해 계속해서 패주해.

어느새 미국에서는 아이젠하워가 임기를 끝내고 케네디 정부가 들어섰지만, 쿠바에 대한 공세를 멈추지 않아.

케네디는 쿠바에 대해 4천 건 이상의 군사작전을 계속 실시하지.

카스트로는 정권을 수호하기 위해 소련과 연계할 수밖에 없었어.

사실 이념적인 동조라기보다는 현실상의 선택에 가까웠지.

자신들의 적 미국의 얼굴에 겨눈 칼이 자기들에게 도와달라고 SOS 요청이 왔으니 거절할 소련이 아니었어.

또 소련의 핵능력이 많이 고취되었다고는 해도, 선발주자인 미국에게는 여전히 열위에 있었지.

소련과 동구권은 쿠바의 사탕수수를 수입하고, 쿠바를 미국의 2차 침공으로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해.

또한 1962년 9월부터 소련은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하기 시작하는데, 이게 Anadyr 작전이야.

정확히 한달 후인 1962년 10월, 소련의 핵미사일 기지 건설과정은 미국 정찰기에 의해 포착돼.

미국 대통령 케네디는 TV연설을 통해 미국민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쿠바를 중심으로 500마일 반경에 해상봉쇄선을 설정해.

미사일기지 부품을 적재한 소련 선박이 이 봉쇄선을 넘었다가는 소련과의 전면전도 불사하겠다는 것이었지.

이에 25척의 소련 선박이 쿠바 영해로 접근하다가 봉쇄선 바로 앞에서 철수하는 드라마틱한 장면을 연출해.

사실상 미국이 소련과의 기싸움에서 또 승리하게 된 것이지.

지난 시간에 소련이 제안한 베를린 통첩을 서방측이 거절함으로써 소련이 기싸움에서 한번 졌었지?

이번으로 소련은 두번째 기싸움에서 또 지고만거야.

낙담한 소련 흐루시초프는 그래도 마지막 자존심을 챙기려고 하는데,

쿠바의 소련 미사일 기지를 철수하는 대신에, 터키의 미국 중거리미사일 기지를 철수할 것을 제안하지.

그러나 미국은 이러한 소련의 제안을 무시해버리고, 쿠바에 대한 불가침만을 약속해.

소련이 쿠바에서 완전히 철수하고, 미국이 쿠바 해상봉쇄를 해제함으로써 쿠바미사일위기는 마무리되지.

쿠바 위기는 미국과 소련 모두에게 큰 교훈을 주었어.

일단 미국의 케네디 정권의 인기는 폭발적으로 오른 반면, 소련 흐루시초프는 권력을 잃게 되지.

또한 이러한 상호충돌이 미소의 커뮤니케이션 부족으로 판단, 미소 간 핫라인을 개설하기도 해.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핵전략의 변화에 있어.

나중에 핵전략 연재글에서도 언급하겠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핵전략의 기본원칙은 대량보복전략이었어.

그러나 쿠바 위기는 사실 미국과 소련이 핵전쟁을 수행할만큼 큰 사건은 아니었어.

상대가 날 바늘로 찔렀다고해서 내가 상대에게 총을 쏜다면 그건 융통성이 떨어지는 대책이지.

무엇보다도, 날 바늘로 찌르든 칼로 찌르든 내가 무조건 자기에게 총을 쏠것이라는 걸 아는 적이라면,

내게 더 큰 도발을 주저하지 않을거야. 어떤 도발을 해도 내가 총맞고 죽는건 똑같으니까 말이지.

이에 따라 미국과 소련은 각자 정교한 핵전략을 세우게 돼.

전략핵과 전술핵이 기본적으로 나뉘게 된 계기로 볼 수도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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