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중관계에 대한 질문이 들어와서, 질문과 답변을 올려봅니다. 메일로 답변한 것이라 가독성이 조금 떨어지는데, 향후에 사진과 함께 수정할 예정입니다. 추가적으로 문의사항이 있으신 분들은 언제나 dooky2108@gmail.com으로 메일 보내주시면 아는대로 답변드리겠습니다.

<질문>
안녕하세요 냉전시기시대이후부터의
전반적 과정에서 대한 글을 보고 님 블로그를 알게되었는데요 유용하더라구요!
그래서 2가지정도 질문이 있는데
1번째는 지금 김정은이 집권한 이후부터 북중관계가 안좋잖아요 저는 김정은이 중국이 북한을 먹으려한다고 생각해서 사이가 안좋아졌다고 생각하는데 이에 대한 생각은 어떠신가용..?
그리고 저는 중국이 북한의 저런태도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몰락을 바라지않다고 생각을 해요~ 이거에 대한 생각도 혹시 알수있을까요?

<답변>
안녕하세요. 질문사항에 대해 답변드리겠습니다.

"북중관계의 소원화에 관해"
사실 북중관계가 멀어지게 된 계기는 김정은의 집권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단기적으로 정권이 바뀌었다고 대외정책이, 그것도 북중과 같은 혈맹관계가 바뀌었다고 보는 논리에는 상당한 비약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북중은 형식상의 동맹 위에서 크고 작은 정치적 갈등이 공존하는 그림으로 보시는게 가장 적절합니다.

단언컨대 북한과 김정은 정권은 단독으로 중국과의 관계를 단절할만한 정치/경제/군사적 역량이 없습니다. 네.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습니다. 일본과 같은 경제대국도 중국과 정치마찰을 빚었다가 중국 측의 희토류 수출 금지로 막대한 산업타격을 입고 백기를 드는데, 중국의 식량/중유 원조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북한 폐쇄경제가 거의 유일한 교역상대인 중국을 배제하고 국가의 존립을 보장할 수 있을 리는 없지요. 그렇다고 북한이 중국과 미국을 동시에 적으로 둘 군사적 역량이 있는가하면, 또 그것도 아닙니다.

중국 입장에서 보면 북한은 버릴 수 없는 계륵입니다. 세계시장으로 진출하기 위해 미국을 비롯한 서방권과의 공조가 절실한 중국의 입장에서, 시도때도 없이 핵개발이니 테러지원이니로 중국의 입장을 곤란케하는 북한이 중국에게 달가운 친구일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중국은 (북한 붕괴 시) 한반도 북부에 대한 지분을 주장하기에 자신들의 정당성이 떨어진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북한이 붕괴하면 한반도 전체가 중국과 인접하게 되며, 이 경우 미국의 대중국포위망은 더욱 견고해져 중국의 동아시아 팽창 모멘텀이 크게 제한되겠지요. 좋든 싫든 북한이라는 완충지대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천양지차입니다. 그러니 데리고 있는 편이 낫지요.

개괄적으로는 이렇고, 이러한 북중의 상호의존성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양국 사이에 난기류가 끊이지 않는지 여러 역사적 사건으로 짚어보겠습니다.

1. 중소갈등과 북한의 대처 

 

(1969년 우수리 강에서 충돌하는 중공군과 소련군. 처음에는 양 쪽이 몽둥이와 주먹다짐으로 충돌한 한 편의 희극과도 같은 다툼이었지만, 결국은 소련 기갑부대의 출동까지 낳는다. 양 사회주의권 맹주의 갈등은 이 때부터 가시화된다.)


중소갈등이라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중국-소련 간 국경분쟁만을 떠올리지만, 실상 국경분쟁은 표면적인 사건일 뿐입니다. 중국 마오쩌둥은 혁명 시기부터 소련 스탈린의 지원을 전적으로 받아온 존재였습니다. 이후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며(만주사변과 중일전쟁) 소련의 영향권이 배제된 이후에도 마오쩌둥-스탈린 간 정치공조와 유대는 끊어지기 힘든 것이었죠. 2차대전 종식 이후 양 사회주의 대국이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한 것도 이러한 원인에서 기인합니다.

그러나 이 관계는 곧 깨지게 됩니다. 스탈린 사망 이후 소련에는 흐루시초프(흐루쇼프, 크루셰프 등등으로도 읽히는)가 집권합니다. 스탈린은 볼셰비키 혁명과 적백내전(러시아 구세력과 볼셰비키 간 내전), 2차대전 등으로 피폐해진 소련의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소련 내 대숙청작업을 벌였고, 이로 인해 스탈린 사후에도 여전히 소련 지도부는 친스탈린적 인사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흐루시초프는 자신의 발언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죽은 스탈린의 그림자를 배제할 필요가 있었으며, 이에 따라 소련 공산당대회에서 스탈린의 독소불가침조약, 우크라이나 기근, 대숙청 등을 격렬히 비난하며 스탈린을 격하합니다.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은 격하한 이면에는 소련의 안전보장 목적도 있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스탈린은 2차대전기 연합국의 편에 서긴 했지만 서방의 반공주의에 대한 경계심이 극에 달한 인물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2차대전 직전에는 나치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폴란드를 나눠먹으며 서방의 뒷통수를 치기도 했지요. 뭐 결국 히틀러는 이 조약을 어기고 소련침공을 단행했지만요. 당대까지 소련이 유일한 사회주의 국가였고, 서방 열강들이 적백내전까지 개입해가며 소련의 팽창을 막으려 했던걸 고려하면 그러한 인식은 아둔하다고 할 수만은 없는 것이었죠.

 

(1949년 소련도 핵개발에 성공함으로써 미국에 의한 핵 독점체제는 과점체제로 이행된다. 그러나 NATO국들과 국경을 인접한 소련은 핵개발로도 안보불안감을 해소할 수 없었고, 이에 따라 흐루시초프가 잠시나마의 서방과의 데탕트를 이끌어낸다.)


그러나 전후 세계 질서는 핵무기를 통해 재편되었고 재래식 전력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1945년 미국이 맨해튼 프로젝트를 완료하고, 그로부터 4년 후인 1949년에 소련도 핵개발에 성공하지만, 여전히 소련은 미국에 핵전력 열세에 놓여있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서방 측에서는 미국 외에도 영국과 프랑스가 핵무장에 성공하면서 유럽 대륙에서의 소련의 안보는 크게 위태로워집니다. 흐루시초프는 이러한 소련의 안보불안을 해소할 필요가 있었고, 이에 따라 미국 아이젠하워와 정상회담을 하며 데탕트 분위기를 이끌어냅니다. 그러는 한편으로 소련 내부에서는 미사일 전력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여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까지 쏘아올리지요. 결과론적으로 쿠바 미사일 위기도 이러한 소련의 안보불안감에 의거해 일어났다고 볼 수 있으며, 또다시 결과론적으로 쿠바 위기에서 소련이 양보한것도 소련의 핵전력 열세 때문이지요.

 

(마오쩌둥 모습. 마오쩌둥은 스탈린을 철저히 벤치마킹하여 자신의 우상화 및 중국의 경제개발 정책을 진행하였으며, 소련에서 스탈린 격하가 이루어짐과 동시에 국내 정치적 입지를 상실한다. 이후 1950년대 후반 대약진운동의 실패와 대기근으로 마오쩌둥은 실각하고 중국의 권력은 류사오치-덩샤오핑으로 이동한다. 류-덩의 실용주의적(이라 읽고 자본주의적이라 쓰는) 정책이 성공하면서 마오쩌둥은 자신의 권력을 영원히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갖게 되었고, 이에 따라 마오쩌둥 친위 봉기의 성격이 강한 문화대혁명을 주도함으로써 다시 권좌에 복귀한다.)

뭐 왜 이렇게 잡설이 기나 하실겁니다. 북중관계를 이야기하는데 소련 이야기는 왜 나오며, 2차대전까지는 왜 거슬러 올라가는가. 그런데 어쩔 수 없습니다. 사회현상이란 단기적으로 분석될 수 있는 단편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이제는 중국으로 시각을 옮겨 한편 글을 이어나가보도록 하지요.

이러한 흐루시초프 소련의 친서방정책은 중국에게 무척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중국은 국공내전이 끝나지 얼마되지 않은 허약한 거인이었고, 마오쩌둥은 이 허약한 거인을 온전히 지배하고자 애쓰고 있었지요. 집안일이 해결되지 않으면 바깥일도 눈에 안들어오는 법. 중국이 그렇게 국내 권력 공고화에 힘쓰기 위해서는 서방에 대한 안전보장 책임을 소련 측에 전가할 필요가 있었고, 따라서 1950년대 초중반까지 국제무대에서의 중국은 단순히 소련의 거수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흐루시초프의 전향적인 정책은 중국에게 국내외적으로 위험했습니다. 마오쩌둥은 마오이즘이라는 기치 아래 스탈린주의(전체주의화 및 우상화)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었는데, 중국의 혈맹이자 지주라 할 수 있는 소련이 스탈린을 격하하기 시작하자 마오쩌둥의 국내적 입지가 좁아지기 시작한 겁니다. 거기에 더해 중국에서 일어난 대기근,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 실패 등으로 마오쩌둥의 독재기반은 크게 흔들리게 됩니다.

국외적으로도 중국은 손해를 보게 됩니다. 소련이 친서방정책을 펼친다면, 서방의 중국 감시는 더 심해질 것이라 판단했던 것이지요. 또한 더이상 서방에 대한 안전보장 책임을 소련에 전가할 수가 없게 됩니다.

핵 문제로도 말이 많았습니다. 이따가 북핵문제에서도 언급하겠지만, 이 세상에서 아무리 동맹국이라 할지라도 타국의 핵개발을 달가워하는 국가는 없습니다. 영화 <타짜>의 평경장이 말하는대로, 세상엔(특히 국제정치에선)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영국/프랑스의 핵개발을 미국이 거의 막다시피 했던 것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소련에게 있어서 또한 중국의 핵개발은 달갑지 않았지만 미-영-프로 이어지는 서방의 핵전력을 견제키 위해서 중국측 핵개발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런데 뭐 이미 예상하셨을거라 생각합니다. 소련은 이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중국은 또다시 배신감을 느끼고 독자 핵개발을 진행하지요.

cf) 여기서 중국 핵개발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 미국에 유학했던 미사일 권위자 천쒜썬입니다. 마오쩌둥이 이 작자를 너무 신뢰한 나머지, 미사일 학자인 그에게 농법까지 맡겨버렸고, 농삿일을 알 리가 없는 샌님의 뻘짓은 중국 내 대기근에 일조하게 됩니다.

여하간에 이러한 연유로 사회주의권 내 두 맹주는 다른 노선을 타게 됩니다. 소련은 1950~60년대 미국과의 관계가 잠시 개선되었다가 쿠바위기 및 베트남전쟁으로 다시 악화되지만, 중국은 향후 1970년대에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단행합니다. 자 이제 본론인 북한으로 넘어가볼게요.

(중소분쟁 당시 북한의 입장은 불곰과 팬더 사이에 놓인 요크셔테리어와 같았을 것이다. 사진과 실제의 차이라면 소련과 중국은 저렇게 귀엽지 않다는 것 정도.)


강대국 사이에 끼인 약소국이 선택할 수 있는 정책은 거의 없습니다. 편승Bandwagon 혹은 중립 혹은 독자노선 뿐이지요. 특히나 중소갈등 당시 북한에게는 이러한 세가지 선택지조차도 온전하지가 못했습니다. 경제적으로야 소련이 더 뜯어먹을 것이 많았지만, 막상 한국전쟁을 전적으로 도와주었고 국경이 인접하여 더 위협이 되는 중국을 배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일단 중국과 소련 중 한쪽으로 편승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렇다고 중립을 취하자니, 사회주의 양강이 북한의 입장 명확화를 요구할 것이 뻔한 일이었습니다. 결국 북한은 편승도, 중립도 불가능한 상황이었으며, 모호한 독자노선을 밟게 됩니다.

이때 나오게된 것이 북한의 주체사상입니다. 그 사상이 감히 철학이라는 말도 붙이기 부끄러운 병신쓰레기일 뿐 아니라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도 아니라는 점은 차치하고서, 사상의 적시성만을 놓고 보았을때는 북한이 중소 양강 사이에서 모호한 독자노선을 탔다는 시도이기도 하지요. 물론 주체사상은 김일성이 종파사건으로 북한 내 실력자들을 제거한 이후 자신의 체제를 공고히하기 위해 만든 면도 있지만, 사실상 이러한 대외적 필요에 의한것이라 보는것이 우리의 논의에서는 더 적절합니다.

북한은 그야말로 중소간의 물타기를 시도합니다. 물론 소련은 비교적 유럽에, 중국은 비교적 아시아에서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기에 물타기라 해도 중국과 가까울 수밖에 없는것은 필연적이지만요. 그러나 중국도 당시까지는 장기가 다 털린 거인이나 마찬가지였고, 북한은 언제나 소련과의 공조의 길을 열어둘 필요가 있었습니다. 한편 이때부터 중국은 북한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게 됩니다. 한국전쟁 때 소련이 한것이라곤 북한에 무기지원해주고 전쟁 승인해준것 밖에 없고, 막상 피는 중국이 봤는데 너희가 감히 이럴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2. 북한의 핵개발

 


이제 무대는 현대로 옮겨 옵니다. 중소갈등에서 독자노선을 채택한 북한은 어느 한쪽에도 의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독자 핵개발을 추진합니다. 이게 1980년대부터입니다. 혹자는 남한 보수정권의 북한 압박이 북한을 자극하여 핵개발을 낳았다고 하는데, 이건 개소리 중의 개소리에 불과합니다. 핵개발이란 상대국 정책이 마음에 안든다고 욱해서 단기간에 할 수 있는것이 절대 아니며, 그러한 비대칭전력을 갖는 대가로 입게되는 막대한 정치경제적 손실을 감당해야하기 때문입니다. 북한은 mb고 김대중이고 그 훨씬 이전부터 이미 핵개발에 착수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아무리 동맹국이라 할지라도 핵개발을 달가워할 국가는 없습니다. 동맹국의 정치적 발언권이 강해지면 당장 피보는 것은 적국뿐 아니라 동맹의 맹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힘을 가진만큼 딴데로 튀기도 쉬운 법이지요. 그것이 달가운 것이라면 한국과 일본의 핵무장 담론에 미국이 알레르기적인 거부반응을 보일 필요도 없는 것이지요. 심지어 미국은 우방국 중에서도 최우방국인 영국의 핵개발 공조 약속을 깨뜨린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이는 소련이 보는 중국의 핵개발, 중국이 보는 북한의 핵개발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실 중소분쟁 시기는 북한이 누구의 눈치도 보지않고 핵개발에 착수하기에 적기였습니다. 한반도라는 냉전의 최전선을 중소 모두 포기할리도 없었고, 특히나 중국이 외교적 고립을 탈출하기 위해 북한/베트남 등을 포섭하려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불필요한 외교마찰을 피하고자 북한은 핵개발 착수를 대외적으로 드러내지는 않고 있었는데, 소련이 붕괴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게 됩니다.

90년대 초반은 북한의 외교정책이 급변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사회주의권의 맹주인 소련의 붕괴는 북한의 안보불안감을 가속시켰으며, 소련붕괴와 동시에 동유럽 구소련 위성국들의 민주화는 북한 김씨 세습정권의 지위를 크게 위협했습니다. 게다가 90년대 중반에 이르러 김일성의 사망, 그리고 부자상속으로 대를 이은 김정일의 권력 정통성 문제, 고난의 행군으로 일컬어지는 대기근, 외교적 고립은 북한으로 하여금 핵개발을 부추기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뭐 속된 말로 그게 아니면 김정일 가오 살려줄 그 무엇도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중소분쟁 시기와 달리 소련 붕괴 이후 탈냉전기는 북한의 핵개발이 대외적 정당성을 가지기 힘들었습니다. 경제적으로 급속성장하기 시작한 1990년대의 중국은 자신의 혈맹인 북한을 입단속시키기에 바빴습니다. 중국이 본격적인 국제경제 행위자로 자리잡은 2000년대에 이르러서는 북한의 핵개발이 중국의 팽창력 자체에도 해가 된다는 인식이 강해졌지요. 이미 중소갈등을 통해 영원한 친구가 없다는 것을 체득한 중국의 입장에서, 북한의 핵탄두가 베이징을 겨냥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이제부터 북한과 중국은 본격적으로 충돌하기 시작합니다. 혈맹이라는 명목하에 북한을 그저 감싸주기만 하기에는 중국의 외교/경제적 리스크가 무척이나 커졌으며, 러시아 또한 소련 붕괴 이후 맥을 못추면서 자칫 북중 양국이 사이좋게 국제왕따로 전락할 수도 있게 된 겁니다. 이러한 상황은 현대 중국이 북핵문제에 대해 미국과 공조체제를 확립하게 되는 주요한 원인입니다.

북한의 폭주는 당장 중국의 입지에도 큰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북핵문제가 한국/미국/일본의 삼각동맹에 의해 일방적으로(전쟁이든 협상이든) 해결된다면, 북한은 분명 이들을 중심으로 개방경제로 이행할 것이며, 이때는 중국이 그간 북한에 쏟아부었던 피와 돈이 모조리 날아가게 됩니다. 때문에 북한 몰락이 기정사실화된 지금에 이르러, 중국은 차라리 서방의 편에 서서 북한의 핵개발을 저지하는 것이 향후 한반도에 대한 지분 확보에도 유리할 것이라 판단하게 됩니다.

3. 북한의 고립과 핵 정책
이제 북한은 완전히 고립됩니다. 사실 이란을 보아도 알수있듯, 외교/경제적으로 고립되면 고립될수록 그 국가의 정권이 자신들의 명줄을 늘리기 위해서라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핵무기입니다. 결국 핵개발 저지를 위한 외교정책은 그 국가가 직접 핵을 포기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핵개발 국가를 옭죔으로써 고사하거나 제풀에 지쳐 항복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북한이 바로 이러한 단계에 놓여 있으며, 3차례에 걸친 핵실험과 대포동 장거리미사일 발사 등도 대내적 결속 목적 내지는 서방권에 대한 협상카드로서의 목적이 강하다 할수 있습니다.

북한의 핵정책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차피 그정도 핵전력으로는 그치들이 주장하는대로 미국과의 전면전 따위는 꿈도 꾸지 못하고, 그것은 북한도 매우 잘 알고있는 바입니다. 그들은 어떻게든 핵이라는 사안을 하나의 단일사안이 아닌 여러사안(장거리 미사일 문제, SLBM 문제, 핵실험 문제 등등)으로 나누려하고 있고, 핵 프로그램 전체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잘게 나눈 작은 카드를 하나씩 포기하면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합니다. 이는 한국이 한반도 비핵화 및 신뢰 프로세스 등 핵 문제 전반을 놓고 이야기하는 반면, 북한이 계속 다양한 형태의 도발을 일으키는 외교적 근원이기도 하지요. 그래야만 북한 입장에서 얻을 수 있는게 많고 다양해지니까요.

북중관계는 이 점에서 조금 묘해집니다. 중국은 원칙적으로 북한의 핵개발을 찬성해줄 어떤 유인도 갖고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북한이 붕괴하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습니다. 그랬다가는 바다에서 일본과, 육상에서 한국과 면면 대립하게 되니까요. 따라서 북한이 핵 정책을 잘게 슬라이스로 썰어 서방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는 것에는 중국이 비교적 찬성하는 입장입니다.

혹 북한이 붕괴될 것이라고 해도, 중국은 북한의 핵개발 자체엔 반대할지언정 핵정책에는 반기를 들지 않아도 됩니다. 북한 핵정책의 핵심은 결국 북한 정권의 수명을 꾸역꾸역 연장하는 데에 있으며, 이렇게 연장된 시간은 중국이 북한으로 침투하는 데에 필요충분한 시간이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혹 북한이 붕괴하더라도 중국이 한반도 북부에 대한 지분을 주장하기 수월하게 됩니다.

4. 김정은 정권

 


자 이제 김정은의 이야기로 넘어가지요. 북한은 서방도, 사회주의권도, 심지어 자신의 혈맹인 중국도 어찌 변호할 수가 없는 심각한 약점을 갖고 있습니다. 바로 세습왕조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민주주의가 왕조에 비해 가질 수 있는 우위란게 결국 권력의 정통성이며, 북한의 권력은 김정일이고 김정은이고를 막론하고 이러한 정통성 자체가 부재합니다.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도 혈통세습을 긍정한 적은 없으니까요. 오히려 공산주의는 러시아의 제정을 비롯한 수많은 왕정을 붕괴시키는 데에 일조한 사상입니다. 그런데도 중국이 북한을 그냥 두는 것은, 부자세습을 지지해서가 아니라 아예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서 북한이 동맹으로부터 완전히 이탈하게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함이지요.

이러한 정통성 문제는 김씨 정권이 군부를 장악하는 데에 심각한 결함이 됩니다. 북한 군부는 북한의 경제/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의 몇십배 이상으로 성장해 기형화되고 대형화되었으며, 군부의 권력욕을 김정일 내지는 김정은 단독으로 억누르기 힘든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김정일과 김정은의 직함이 북한 주석이나 수상이 아니라 국방위원장인 이유도 바로 북한의 제1권력인 군부를 장악하기 위함이고, 리영호 등의 군부실세를 숙청하는 것, 보위부와 정치장교 제도를 통해 이중으로 군부를 감시하는 것 또한, 북한의 김씨 정권이 군부의 폭주를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래서 김씨정권이 설령 서방에 대한 악감정이 없다해도, 강경한 군부를 통제키 위해서는 일련의 군사도발을 감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이러한 경향은 김정일과 김정은이 집권한 초기, 그러니까 그들의 권력기반이 가장 약할때에 두드러집니다. 북한 경제가 망가질대로 망가진 김정은 시기에 이르러서 발생한 도발들도 이런 시각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도발은 상기 서술한 이유로 중국에도 외교적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김정은이 국내 권력을 잡기 위해 폭주하면 폭주할수록, 중국이 북한을 맹목적으로 지지기하기는 더욱더 어려워집니다. 이에 따라 북중간의 갈등은 김정은이 북한 내 군부와 권력을 완전히 독식할 때까지는 계속 심화될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이 북한을 먹으려하기 때문에 김정은이 반발한다 라... 이건 사실 정치학을 전공하지 않은 아저씨들의 술자리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입니다. 현대 사회는 예전처럼 영토적 팽창이 쉽지않고, 특히나 그렇잖아도 미국/일본의 견제를 받는 중국이 북한을 영토적으로 지배하겠다는 야욕을 보이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 없습니다. 그야말로 3차대전의 개막이지요. 대신 중국이 북한 붕괴 이후에도 한반도 북부에 완충지대를 유지하고 싶어하는 것은 사실이며, 이를 위해 어떻게든 북한에 경제적 침투를 하고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이는 달리 동맹국이랄게 중국밖에는 없는 북한 입장에서 불가피한 것이며, 김정은은 딱히 반발할 의지도 역량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5. 결론
결국 결론은 서론에서 말한 바와 같습니다. 북중관계는 기본적으로 상호필요에 의한 것이며, 북중관계가 아무리 막장으로 치달아간다해도 서로를 완전히 포기하게 될 일은 없습니다.

답변이 도움이 되었길 바라며 이만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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