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지막 황제> 감상록은 여기로 http://aceferr.tistory.com/78


서태후와 부의



먼저 부의의 인생이 어디서부터 꼬였는지 부의가 왜 3살의 나이로 황제에 즉위할 수밖에 없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고, 그렇게되면 서태후라는 여걸이 빠질수가 없다. 서태후는 본래 청나라 9대 황제인 함풍제의 후궁이다. 그러나 함풍제는 황후인 동태후와의 사이에서 아들이 없었는데, 한국의 일상적인 아침드라마 레파토리처럼 후궁인 서태후가 아들을 낳게된다. 당연히 함풍제의 유일한 아들인 서태후의 아들이 황위계승자로 지목되었고, 서태후는 후궁임에도 불구하고 황후인 동태후의 그것에 맞먹는 막강한 권력을 갖게된다. 함풍제가 죽고나서는 서태후의 아들이 황제에 즉위하게 되는데, 그가 바로 동치제이며 즉위 당시의 나이가 6살이었다. 황제의 나이가 너무 어리자 청의 황실은 동태후와 서태후의 섭정으로 돌아갔고, 불가피하게 "아들은 없으나 정처인 동태후" vs "첩이지만 아들 낳아준 서태후" 권력다툼 구도가 형성된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서태후와 권력다툼을 벌였던 자들은 대개 납득하기 어려운 죽음을 맞게되었다는 것인데, 이 죽음의 릴레이에서 동태후가 그 첫번째 희생양이다. 정사에 기록된 바로는 동태후의 사인은 계단에서의 낙상으로 인한 뇌진탕인데, 아마 후술할 내용을 더 읽어본다면 이 점에 있어서도 상당한 의구심이 들 것이다. 아무튼 정식 황후인 동태후가 어이없게 죽고, 함풍제의 유일한 아들을 출산한 서태후의 권위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게 된다.

cf) 동치제란, 어릴 동/다스릴 치를 써서 어린 나이로 다스렸다는 뜻인데, 동치제 뿐만 아니라 동치제의 뒤를 이은 광서제와 선통제(부의)도 마찬가지의 운명을 따르게 되었다.

cf2) 동태후와 서태후의 다툼은 비단 권력다툼 뿐이 아니었다. 서태후는 자기의 친아들에게도 굉장히 엄격한 사람이었는데, 이에 동치제는 친어머니인 서태후보다 항상 자상하게 자기를 대해주었던 동태후를 더 좋아했다고 한다.


황제인 동치제가 어리자 권력은 부득불 섭정인 서태후에게 집중되었다. 여기서 서태후라는 인물이 후대 청나라를 제대로 말아먹게되는 삽질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서태후가 먹었던 매 끼니는 현대의 돈으로 환산하면 800만원(!)에 이르며, 이는 당시 청나라의 일반적인 농부가 1년동안 먹는 끼니의 액수와 비슷하다고 한다. 또한 굉장한 패셔니스타(...)로서, 한 번 신은 버선은 또다시 신지 않았으며 옷은 3000여 상자에 달했다. 그러나 서태후가 유명한 것은 정작 따로 있다. 바로 이화원 문제인데, 서태후는 이화원이라는 정원을 건축하는 데에 은전 3000만냥을 소비하였고, 이는 중국 해군 예산의 절반에 해당한다. 물론 이 말이 서태후가 중국 해군 예산의 절반을 횡령했다는 소리는 아니지만, 당시 중국은 중국 본토 침탈을 본격화하려는 제국주의 일본과 당장이라도 전쟁을 해야할 판이었고, 정신이 똑바로 박힌 국가의 지도자라면 이러한 상황에서 고작 니나노거릴 정원 따위를 짓는 데에 해군 예산의 절반을 끌어붓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서태후 시기에 중국의 잘생긴 남자의 씨가 말랐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서태후는 미소년들을 굉장히 좋아해서안그런 여자가 있으려나 눈에 보이는 미소년들은 모두 이화원의 낙수당에 잡아가뒀다고 한다. 서태후는 이렇게 잡아둔 미소년들과 늘상 잠자리를 함께 했을 뿐 아니라, 한 번 잠자리를 함께한 미소년은 서태후와 잠자리를 함께한 사실을 퍼뜨리지 못하도록 무조건 사형시켰다.

cf) 참고로 서태후의 남편인 함풍제가 죽었을 무렵, 서태후의 나이는 27살 정도. 현대의 나이기준으로는 상당히 꽃다운 나이였다고 할 수 있고, 어쩌면 낙수당 미소년 문제에 대해서 변명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나라 상황 봐가면서 해야하는건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 당연한 것.


이러한 서태후 밑에서 동치제는 어느덧 장성하게 되었지만 서태후는 권력을 내놓지 않았고, 동치제는 불가피하게 자신의 어머니와 권력투쟁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곧 동치제는 실패하였고, 여기에 더하여 동치제의 황후(그러니까 서태후의 며느리)였던 효철의황후도 서태후의 미움을 사 자살하게 된다. 동치제도 실의에 빠져 정무에 완전히 흥미를 잃은채 유흥만을 탐닉하다가 천연두(혹은 매독이라는 설도 있음)로 사망한다. 서태후 혼자서 정처 죽인 첩, 친자식 죽인 친모, 며느리 죽인 시어머니 역할 다하는 본격 막장드라마를 인생으로 몸소 실천한 것이다. 동치제가 죽고 황제자리는 또 비었는데, 이미 권력의 맛을 본 서태후는 제대로 황위를 정할리가 없었고, 자신의 조카인 광서제(11대 황제)를 황위에 세운다. 광서제 또한 즉위 당시 4살이었기에 서태후는 다시 길고긴 섭정을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광서제도 16세로 장성하였지만 서태후는 광서제에게 국정을 넘겨주지 않았다. 광서제는 동치제와 달리 이미 서태후의 기에 눌릴대로 눌린 성격이어서 달리 국정실무를 찾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광서제는 결혼할 황후를 정할 때에도 아무런 갈등없이 서태후가 선택해준 황후를 선택했다고 한다.


이후 청나라는 청일전쟁에서 패하게 되고, 본격적으로 제국주의 일본의 군대가 청의 본토로 진입하게 된다. 서태후가 아주 업적이 없는 것은 아닌데, 서태후는 서구열강이 청에 유입되면서 비교적 온건하게 서구의 문명을 받아들이자는 양무운동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결과론적으로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하게되면서 서태후의 유일무이한 업적마저도 무너지게 되었으며, 청에는 망조가 들기 시작한다. 청에는 지방군벌이 난립하기 시작했고, 가장 유력한 군벌이었던 위안스카이가 광서제를 독살하기에 이른다. 서태후는 광서제가 죽자 또다시 오랜 기간 권력을 틀어쥘 생각으로 어린 황제인 선통제에게 황위를 물려주었지만, 광서제가 죽은 바로 다음날 자기자신도 이질에 걸려 죽게된다. 이것이 바로 영화 <마지막 황제>의 시작 부분이다.

cf) 서태후가 이질에 걸린 이유는 어이없게도 "늙은 나이에 너무 많이 먹어서"였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서태후는 죽기 직전 "다시는 나처럼 여자가 정사에 나서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것이다. 본인의 삽질을 잘 알고 있었던걸까?


부의의 삶 : 영화와 실제 역사

(이상 내용은 엔하위키 선통제 부분을 참고하여 각색/보충한 것입니다.)


(오른쪽이 부의, 왼쪽은 황후 완룽)


서태후에 의해 3살이라는 나이에 제위에 올랐지만, 막상 서태후는 부의가 제위에 즉위하기도 전에 사망하였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 중국에서는 황실의 권위가 완전히 부정되었지만, 혁명세력은 급격한 민심혼란을 막기위해 부의를 상징적인 황실로 남겨둔다. 이때부터 황실의 실권은 완전히 사라지고, 입헌군주제의 형태를 띄게 된다. 그러나 혁명세력의 실력자이던 위안스카이가 사망하면서, 혁명세력은 분열을 일으키게 되었고, 군벌 사이에 권력투쟁이 심화되면서 내전이 일어난다. 이 내전 중 공화주의 군벌인 펑위샹이 부의를 완전히 폐위시키기에 이르고, 영화에서 부의가 자금성에서 쫓겨나는 것이 바로 이 사건이다.


이후 제국주의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동아시아의 서부"이던 만주에까지 마수를 뻗친다. 만주사변의 주축이 된 것은 중국 본토에 주둔하던 관동군이었지만, 이들은 정통성 확보를 위해 부의를 포섭한다. 이에 1934년에 부의는 만주국의 초대 황제 강덕제로 즉위한다. 그러나 실상 부의는 일본의 거수기에 불과한 역할을 담당했고, 이 또한 부의가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부의는 일본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애쓰는 장면이 있는데, 이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이러한 괴뢰황제 시절이 끝난 것은 1945년 일본 패망 이후로, 피난사정의 여의치않자 부의는 소련군에 의해 생포된다. 이후 중국인민해방군 측에 넘겨졌고, 부의는 전범교도소에서 10년간 복역한다.


그러나 부의를 친일파라고 매도할 수 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일례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고종의 일곱번째 아들인 영친왕도 일본에 볼모로 잡혀가 일본군 중장의 위치까지 올랐다. 그러나 영친왕과 부의를 친일파라고 보기는 애매한 것이, 일본은 조선과 청을 점령하면서 그들의 정통성 확보가 필수적인 상황이었고, 가장 좋은 방법은 기존 황실의 인물을 내세우는 것이었다. 이러한 일본의 필요에 따라 영친왕과 부의는 모두 철저히 이용당한 입장이었지, 그들 자신이 나서서 친일 행위를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조국과 조국의 인민들이 제국주의 일본에 의해 핍박받는 상황에서 수백년간의 기득권이던 그들이 자의든 타의든 민족의 원흉에게 빌붙어 일신의 안위를 꾀한 것은 분명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참고로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는 부의의 황후 완룽이 부의의 운전기사와의 밀애로 아이를 낳았고, 일본 측에서 만주국 황실의 권위 하락을 막기 위해 독극물을 주사하여 아이를 죽이는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실제로 완룽은 일본 장교와 간통한 것이었고, 부의가 이 아이를 화로에 던져 죽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영화 속에서도 부의는 후손을 갖지 못한 것으로 나오는데, 이전에는 부의가 게이라는 설(...)이 있었지만, 1962년에 부의와 재혼한 이숙현에 의하면 이는 부의의 발기부전 때문이었다고 한다. 또한 젊은 시절의 부의는 굉장히 사치스럽고 능력없는 한량이었다고 한다.


쓸쓸히 정원사로 일생을 마감하는 영화와는 달리, 부의는 상당히 평화로운 말년을 보냈다. 그도 그럴것이, 같은 공산주의 국가인 러시아에서는 혁명과정에서 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가족을 모조리 총살한다. 반면, 마오쩌둥은 부의를 특별사면해주었을 뿐 아니라, 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위원이라는 감투를 씌워주기도 한다. 이는 한국에서 국회의원에 해당된다고 한다. 중국 공산당이 부의를 포용한 것 또한 부의를 이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960년대 초반 당시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수천만명의 중국 인민들이 기근으로 죽어나갔으며, 이로 인해 마오쩌둥의 지위는 땅바닥으로 추락했기 때문이다. 이는 곧 중국 공산당 일당독재체제의 정통성에 심각한 위협을 가한 사건이었고, 부의의 포섭은 중국 공산당이 이를 타개하기 위해 벌인 일련의 미시적인 전술이었던 셈이다.


영화 <마지막 황제>는 상당 부분을 실제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부의의 삶을 지나치게 미화한 감이 없잖아 있다. 실제 그의 삶은 황제 해먹다가, 쫓겨나서 사치부리면서 한량으로 살다가, 일본에 이용은 당했지만 또 황제해먹다가, 수용소에 갇혔다가 다시 나와서 높은 자리까지 해먹은 여느 동아시아의 부패한 지도자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물론 영화의 핀트 자체가 격변하는 시대 속의 기회주의자 부의가 아닌 인간 부의를 묘사하는 것이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후손들의 입장에서는 그닥 와닿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상황 자체는 완전히 달랐지만,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왕실이 쏟아지는 독일의 폭격 속에서도 국민을 버릴 수 없다며 버킹엄궁에 머물렀던 것에 비하면, 대한제국 영친왕과 청나라 부의는 할말이 없다. 임진왜란기 선조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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