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 : 현대 민족 개념의 탄생
흘러간 것들은 언제나 추억처럼 여겨지기 마련이다. 한때 마음을 할퀴어놓았던 악다구니도, 쏟은 정열만큼이나 오한이 몰려와 잠조차 이루지 못했던 불면의 순간들도, 시간의 세례가 눈처럼 내리어 덮이면 어느샌가 아름다웠던 과거들로 포장된다. 역사의 순간들도 그런 감상이 비일비재한데, 이를테면 "혁명"이란 것이 그러하다. 혁명이라는 단어가 주는 마력은, 세느강 물결에 흐드러졌던 프랑스 인민의 피나 역경의 세계사가 낳은 민족주의의 사생아들(가령 히틀러라든지)을 쉽사리 잊혀지게끔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보아야만 한다. 혁명이라는 드라마의 유쾌하지 못한 후속편을.

프랑스 혁명은 현대 민주주의 공화정의 요람으로 여겨지지만, 엄밀히 말해 이 주장은 혁명의 부산물 중 극히 일부만을 바라본 것이다. 한국 술을 이야기하면서 막걸리, 동동주, 안동소주를 놔두고 구태여 맛대가리 없는 희석식 소주만을 이야기하는 것과 같달까? 프랑스 혁명은 민족주의와 자본주의의 시발점으로 보는 것이 더욱 합당하며, 그렇게 탄생된 민족주의와 자본주의가 재생산한 것이 시민참여 정치체제, 즉 시민 공화정인 것이다.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도달점은 결국 같으니, 우리가 영위하고 있는 현대 시민 공화정체에 대한 프랑스 혁명의 지분은 여전하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프랑스 혁명의 단기적인 결과을 동화적인 정의로 쉬이 결론지을 수 없다. 역사의 운명이란 매춘부의 팔자처럼 얄궂은 법이다. 국민들이 각기 국가의식을 갖고 단결케 했던 "민족"이라는 개념은 혁명 한 세기가 지나지 않아 서로의 정수리에 갖가지 문명의 이기들을 겨누게 하는 명분이 되었고, 개인의 (돈 버는) 능력으로써 신분상승이 가능케 한 "자본"이란 개념은 어느덧 그 자체로서 계급이 되어 돈놓고 돈을 먹는 천민자본주의의 뿌리가 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민족과 자본이 담지하는 의미란 무엇이며, 어째서 그 시절에는 그것들이 정의처럼 여겨졌던 것일까?

1. 권력-자본 간 균형의 붕괴 : 권력과 자본은 기본적으로 적대성을 내포한 상호의존적 관계라 볼 수 있다. 전쟁을 하든 정책을 펼치든 권력이 하는 모든 일에는 돈이 들기 때문에 권력가들은 자본을 통해서만 호흡할 수 있으며, 그 국가에서 벌어먹고 사는 자본가들 또한 권력에 기대어야만 자신의 재산권을 온전하게 지켜낼 수 있다. 근대 이전의 유럽에서는 자본가들의 활동 저변이 그다지 넓지 않아 거대한 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에 왕권과 교권이 자본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교권이 왕권을 견제할 수 있었던 원동력 또한, 당시 교회와 수도원들이 독식하고 있었던 지역자본(어째서 당시 교회들이 면벌부를 팔았는지 생각해보자)이었다는 점에서 광의의 권력-자본 균형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대항해시대를 거쳐 무역, 금융 등으로 자본가가 단순히 동네 부자가 아닌 국가 세수의 한 축을 담당하는 거대자본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선물, 보험 등의 주요 금융상품이 바로 이때부터 태동한 것이며, 무역업이 발전하면서 유통업과 금융업이 발전하고, 국경 단위를 넘나드는 거대자본은 국가의 총칼앞에 돈이라는 방패를 세울 수 있게 된다. 상황이 이렇게 된 후에는 국가권력이 자본을 개처럼 부릴 정당성이 사실상 사라지게 된다. 당시 특권층은 자신의 기득권을 오로지 거대자본의 힘으로만 유지할 수 있었으며, 거대자본은 이에 대한 급부로써 자신의 의견이 정치권에 관철되기 원했다. 여기에 귀족 권력을 약화시켜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부르봉 왕조가 부르주아지 세력을 귀족으로 대거 편입시킴으로써, 늘어난 특권층을 떠받치기 위한 평민과 비귀족 부르주아지들의 납세부담은 더욱 극대화되어 불만의 불씨가 가득 내재된다.

2. 계급사회의 붕괴 : 이처럼 거대자본이 출현함에 따라, 요람에서 무덤까지 낙인처럼 안고 살아야했던 계급이라는 개념이 붕괴되기 시작한다. 서슬퍼런 국가권력이 이제는 거대자본의 눈치를 슬슬 보기 시작했고, 무역업으로부터 파생된 여러 기간산업들의 발전 가능성은 활짝 열려 있었다. 돈을 움켜쥐면 귀족자리까지도 노려볼 수 있는 사회에서, 왕과 귀족의 권한은 절대 예전과 같을 수가 없었다. 꼭 마르크스주의적 혁명이 아니더라도, 인민들이 계급 상승의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만으로도 계급사회는 충분히 붕괴 가능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 홉스, 루소 등을 위시한 사회계약설은 왕과 귀족층의 태생적 특권을 부정하는 데에 일조했다. 본디 계약이라는 것은 평등한 쌍방의 합의에 의해 체결되는 것으로, 이는 기존 지도층이 국가의 지도권을 가질 수 있는 정당성이 다름아닌 국민의 암묵적 위임 동의로부터 나온 것임을 뜻한다. 고로 신이 내려주신 왕권이라는 것은 구시대적인 개소리가 되어버리고, 왕도 어디까지나 국정권을 위임받은 대리인 정도의 입지로 낮추어진 것이다. 이로써 앙시앵 레짐을 관통했던 계급사회의 유지는 그 당위성을 잃게 되었다. 국민들은 이제와 왕의 백성이 아니라 왕에게 자신의 권한을 위임해준, 근본적으로는 주권인으로 격상되었고, 스스로 프랑스 시민으로서의 의식을 갖게 된다. 더군다나 오랜 세월 동안 여러 국가로 찢어지지 않고 단일국가로 존재해온 프랑스의 경우, 국가적인 민족의식이 고취되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3. 전쟁 양상의 변화 : 보다 국가적인 측면에서 문제를 살펴보자. 프랑스 혁명 무렵에는 화약과 총포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기사 계급이 몰락한지 오래였고, 머스킷총으로 무장한 전열보병이 전장을 지배하던 시대였다. 검술, 창술, 기마술 등은 가르칠 필요없이 그저 사격술만 가르치면 한명의 군인으로서 역할할 수 있는 시대가 오자, 다름아닌 "머릿수"가 중요해진다. 그저 많은 수의 병력만 투입한다면 적국보다 압도적인 화망 구성이 가능하게 되었고, 빗발치는 총알 앞에서는 수십년간 출정다닌 베테랑이나 훈련소 나온지 2주가 안된 따끈따끈한 신병이나 평등하게 죽어나갔다.

따라서 대규모 병력 확보는 곧 그 국가의 육군력과 동의어가 되었으며, 그만큼 많은 병력을 징집하기 위한 명분이 필요하게 되었다. 고대처럼 마냥 노예들을 잡아다 전장에 내보냈다가는 탈영하거나 총 한번 쏘지않고 투항하기 마련이었고, 혹은, 반란이라도 일어난다면 압도적으로 많은 사병들을 귀족 장교단이 진압하기도 매우 곤란해졌다. 더군다나 전열보병 간 전투의 특성 상, 한두명이 전장을 이탈하면 전체 전열이 전의를 상실하고 흩어지게 된다. 이는 곧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민족 의식 주입은 군기 확립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각 개인이 왕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가족, 자신의 고향, 나아가 자신의 조국을 위해 싸우기 위해서는, 그들 스스로가 왕의 하수인이 아니라 프랑스 공동체의 평등한 일원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어야만 했다.

국민군대(레비 앙 마세) 체계를 가장 먼저 확립한 프랑스군은 실제로 전 유럽을 진공청소기처럼 쓸고 다니는 것이 가능했다. 설령 선발대가 전멸한다해도 당시 압도적인 프랑스 인구로 전멸한 병력의 두배 세배가 되는 인원을 징집할 수 있었고, 이 병력을 끊임없이 축차투입하는 프랑스 육군을 당해낼 국가는 사실상 전무했다. 결과적으로 러시아에까지 도달한 프랑스가 길어진 보급선과 혹한을 감당하지 못해 몰락하기는 했지만, 프랑스 육군이 보여주었던 국민군대의 위력은 다른 유럽국가들이 점차 민족주의적 국민군대체제를 확립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족주의 광풍 : 나치가 등장할 때까지
시대가 변하면 단연 그 사회를 지배하는 패러다임 또한 바뀌어야하는 것이다. 싸이언 시절에는 독특한 디자인으로 삼성의 아성을 넘보던 LG전자가 이제와 골골대는 것은, 맥킨지의 시대착오적인 피처폰 특화 전략을 그대로 따름으로써 격변의 시대에 제대로 된 패러다임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당대 유럽의 민족의식은 세느강을 넘어 라인강과 볼가강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이 열망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지도층들은 죄다 단두대에 목이 잘려나갔다. 모가지가 달아나지 않은 좀더 세련된 지도층들은 민족주의를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삼을 필요가 있었다.

당시 유럽 전역은 이미 민족의식이 고취될대로 고취되어 군대도 거대화되어 있었기에, 서로 전쟁이라도 하려치면 국가의 존망 자체가 뒤흔들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토가 유린당하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젊은 남성의 대부분이 전쟁에서 죽거나 불구가 되면 아무리 승전국이라 할지라도 국가의 미래를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 이는 나폴레옹 전쟁, 크림전쟁, 보불전쟁 등으로 증명되었다. 또한 전쟁의 대규모화는 전장에서 군인과 민간인의 구분을 희미하게 하였다. 젊은 남성의 대부분이 징집당하는 전시에는 나머지 인구가 모조리 전시생산체제의 일원이 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전쟁에 관여하지 않는 "순수한 민간인"이 사라졌다는 뜻과 같다. 국민은 전쟁의 가해자가 되든 피해자가 되든 빠져나갈 길 없는 선택의 기로에 선 것이다.

또한 기독교라는 사상 아래 어느 정도의 교집합을 갖고 있던 유럽인들이 각자의 민족주의에 의거해 사고하기 시작하면서, 자기 민족의 생존을 위해 타 민족을 배척하는 쇼비니즘 또한 이때 태동한다. 전쟁은 더이상 지도층 대 지도층이 아닌, 민족 대 민족의 투쟁이 되었으며 민족의 외연은 무섭게도 군인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는 항공기술의 발전과 함께 2차대전 당시 적국 민간시설에 전략폭격을 감행케 하는 주요 논리로 작용한다. 적국을 조질 때에는 문제시되는 적국 지도층에 투표한 민간인들 또한 징벌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런다면 자연히 적국 지도층은 국민 지지를 잃고 백기를 들 것이다. 이런저런 무시무시한 사상이 판치면서 유럽 전역은, 특히 다민족지역이었던 발칸반도는 스파크 한번에도 꽝하고 터질 폭탄과 같았고, 민족주의는 그 폭탄의 도화선 역할을 수행했다.

그렇게 불안정한 유럽 정세의 키플레이어가 바로 독일이었다. 기껏 통일해놓은 조국에 경쟁국들의 총칼이 겨누어질까 두려웠던 비스마르크는 독일을 유럽 제1의 국가로 일으켜세운 보불전쟁 이후에도 (프랑스를 제외한) 타 유럽국을 자극할만한 팽창정책을 자제한다. 다른 유럽 국가들 또한 독일에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면서도 전쟁의 두려움으로 쉽사리 싸움을 걸 수가 없었다. 빌헬름 2세가 이 모든 것을 망쳐놓기 전까진. 그러나 독일이라고 민족주의적 열망이 왜 없었겠나. 영국과 프랑스는 아프리카니 아시아니 확장하며 식민지를 개척하는데, 유럽 제1의 강대국 독일이 뭐가 못났다고 가만있으랴. 비스마르크 퇴임 후부터 노골적으로 드러난 독일의 민족주의적 열망은 사사건건 유럽국가들과 충돌하기 마련이었고, 이는 결국 1차대전의 발발로 이어진다. 허나 1차대전을 민족전쟁으로 인용하기에는 애매하다. 당시까지만도 전 유럽의 지도층이 인척관계로 얽혀있었고, 지리멸렬한 참호전의 양상 때문에 각국의 국토가 직접 점령당하는 일도 많지 않았으며, 소수민족이 많아 민족주의 확산을 극히 꺼려하던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는 여전히 전근대적인 왕정체제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작 민족문제는 전쟁 중이 아니라 1차대전 이후 전후처리에서 불거진다. 독일은 1차대전 후 라인강 유역을 무장해제 당하고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부담하는 등, 패전의 쓴맛을 제대로 보았으나 여전히 모종의 착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패전 당시에도 독일 국토는 거의 침범당하지 않은 상태였으며, 전투력 또한 베를린까지 점령당한 2차대전에 비하면 거의 온전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패전 당시 더이상 전쟁수행이 불가능할만큼 파탄난 독일 재정 따위 안중에도 없는) 독일 국민들 생각으로는 "져준" 전쟁이나 다름없는데 승전 연합국들이 물린 천문학적인 배상금으로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일어나고 국내 경제가 붕괴 직전에 이른 것은 퍽 부당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이 역린을 꼬집고 들어온 역사적 인물이 바로 아돌프 히틀러다.

그래서 민족국가를 조질 때는 언제나 섬세해야만 한다. 자칫했다가는 마찬가지로 민족의식을 갖고있는 패전국의 국민들을 자극할 개연성이 충분한 것이다. 어차피 민간인이라는 것이 면죄부가 될 수 없다면, 죽기살기로 싸우는 것만이 답이다. 가뜩이나 승전국들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차있던 독일 민족은 히틀러의 게르만 우월주의에 매료되기 십상이었다. 유대인과 집시 학살이나 선천적 장애아를 안락사시킴으로써 "민족의 순수성을 고취"시키고,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 병합을 통해 "민족의 힘"을 증강하여 승전 연합국들에게 한방 먹이겠다는 히틀러의 웅변은, 사과 하나를 사기 위해 마르크화 더미를 수레로 나르던 당시 독일 국민들에게 정의로 여겨졌을 것이다.

히틀러는 민족주의의 사생아라 여겨지고는 하지만, 필자의 의견으로는 민족주의가 언젠가 낳을 수밖에 없는 필연적 적통이라 본다. 실상 히틀러 뿐만이 아니라 전 유럽이 민족주의적 우생학에 사로잡혀 식민지 주민들에 대한 수탈과 탄압을 정당화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까지만도 타 민족에 대한 학살이나 차별이 바람직한 것은 못 되어도 불의한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나치 독일의 만행 초기에 이들의 도덕성을 갖고 걸고 넘어지는 유럽 국가는 없었다. 여기에 더해 1차대전의 트라우마로 여전히 방어적인 외교정책을 고수하던 유럽국가들은,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에 대한 히틀러의 막무가내식 요구에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독일 국민들은 일련의 외교적 도박을 쉽게 성공시킨 나치를 더욱 신뢰하게 되었으며, 자의든 타의든 독일 국방군 혹은 친위대에 입대하여 전 유럽에 하켄크로이츠 깃발을 꽂는 데에 일조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패전 이후 독일에게 있어 "민족의 원죄"가 된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민족의 책임

베를린이 함락되기 전 2주간을 그린 영화 <몰락>에서 나치 선전부장관 괴벨스는 자신들을 뽑아준 것은 게르만 민족이니, 패전 이후의 고통 또한 게르만 민족이 짊어져야할 짐이라는 말을 한다. 우습게도 이는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와 같다. 민족의 전장에서 민간인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국가가 제시하는 어젠다의 보편성을 의심치 않는 선량함, 즉 "사유불능" 또한 씻기 힘든 죄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프랑스 혁명과 사회계약설에서 고취된 가장 핵심적인 민족의식이란, 지도층을 우리 민족의 합의로 선출한 것이니 지도층이 엇나갈 때에는 우리 손으로 끌어내릴 수 있다는 "저항권"의 개념이다. 독일 국민들은 나치가 자행한 유대인 학살에 도덕적 보편성을 물어보아야만 했고, 그것이 인류 존엄성을 파괴하는 행위라면 나치에 항거했어야만 했다는 것이다. 설령 나치의 어젠다가 당시 독일 국민들에게 더 없이 정의로운 것이라 해도 말이다.

쉽게 말해 민족이 지도층과 동등한 입지의 주권자가 되었다면, 그에 따르는 책임 또한 지도층에 준해야 한다는 것이다. 복종의 정의 이전에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존엄성의 전제가 있고, 아이히만이 복종으로써 사수한 정의보다도 나치에게 도덕적 보편성을 묻지 않은 책임이 더욱 크다. 따라서 "시키는대로 했을 뿐이다"라는 변론은 면죄부가 될 수 없을 뿐더러, 나아가 그 자체가 자신의 죄, 즉 사유불능의 죄악을 드러내는 것이다. 아렌트는 사회 통념이 주입한 정의관에 대해 개인이 항시 의문을 던지고 비판해야만 하는 의무를 역설하였으며, 이는 민간인-군인(여기서는 문자 그대로 싸우는 군인이 아니라 지도층까지 아우르는) 간 구분이 없어진 현대 민족 간 투쟁에는 무고해보이는 개인 또한 암묵적 가해자로서 역할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 사태를 바라보며 친박세력에게서 아이히만을 보았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들의 모습에 아이히만을 대입하는 것은, 아이히만에게도 적잖은 실례다. 통념상 정의에 의문을 던지지 않은 것은 "그게 나쁜건지 몰랐다"고 변호할 수 있어도, 옳지 못함을 알면서 그대로 묵인하고 따른 것에는 마땅한 변론조차 없다. 이들은 아렌트가 말한 "평범한 악인"이 아니라 정상참작의 여지도 없는 순수한 악인일 뿐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관한 글은 http://aceferr.tistory.com/143 참조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