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들어 하도 뒤숭숭한 사건이 많이 일어나면서 한나 아렌트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거론하며 "악의 평범성"을 논하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 세월호 사건으로 나타난 검찰의 무능과 세모그룹의 비리, 임병장 무장탈영 사건과 윤일병 살인 사건으로 만천하에 아직까지 존속하는 것으로 드러난 군대의 부조리 등 한국 사회에서 악이 평범하고도 일상적으로 자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과는 별 관련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악의 평범성"이라는 것을 단순하게 "사회에 악이 만연해있는 상태"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고, 제대로 알지 못함으로 생기는 그런 오해에 기반하여 무리하게 인용하려하니 무언가 어색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 별볼일 없는 소리도 벽안의 색목인이 말하면 뭔가 굉장한 것처럼 여기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종특 때문인지, 그렇게 아렌트의 메시지를 단순무식하게 파악하고서도 뭔가 대단한 것인양 추켜세우니 그 모습이 안타깝지 않을수가 없다. 만약 아렌트가 사회에 악인이 많은 상태라는 단순한 의미에서 악이 평범한 것이라고 하였다면 그 책이 그 정도로 회자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세상에 나쁜 놈들밖에 없다는 이야기는 아렌트가 태어나기 2~300여 년 전에 토머스 홉스가 이미 채어갔고, 수천년 전에도 이미 공자니 맹자니 많이 이야기되었던 사항들이다. 또한 그 정도 원론적인 이야기는 이 잡설 블로그 영화이야기에도 나오는 뻔한 소리 아닌가? 아렌트가 말하는 "악의 평범성" 논의가 특별한 이유는, 개개인의 도덕적인 행위가 사회에 미치는 결과적으로는 도덕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을 하면서 개개인의 무비판적인 도덕률 인식을 꼬집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렌트의 논의를 다음 두 가지 논의로 해석해보고자 한다.

 

1번 논의 : 행위의 결과에 대한 사유의무

 


(이미지 출처 : http://hwanyou.tistory.com/454)

나는 윤리와 경제학이 그다지 엮기 쉬운 주제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개개인 입장에서 바람직한 행위의 결과가 어째서 사회적으로는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는지 쉽게 알아보기 위해 잠깐 게임이론의 유명한 예시인 죄수의 딜레마를 짚고 넘어가고싶다. 죄수 A와 B는 사이좋게 범죄를 저지르고 경찰에 잡혀갔다. 만약 둘 모두가 묵비권을 행사하며 침묵한다면 둘다 징역 1년, 둘 모두가 자백한다면 둘다 징역 5년을 받게된다. 그러나 경찰은 이들을 각각 회유하기 시작한다. "네 놈이 자백한다면 네 친구가 10년을 감방에 가는 대신 너는 곧바로 석방될 수 있다"고. 물론 사회적으로(여기서는 죄수 A B라는 공동체의 입장) 보면 둘 모두 묵비권을 행사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러나 각각의 입장에서 한번 보자. 여기서는 B가 묵비권을 행사할 확률과 자백할 확률이 각각 50%이라 한다고 가정한다. A의 입장에서, A가 묵비권을 행사하고 B도 묵비권을 행사한다면 A는 1년을, A가 묵비권을 행사하고 B가 불어버린다면 A는 10년을 감방에서 썩어야한다. 따라서 산술적으로 A가 묵비권을 행사할 경우 평균형량은 1x50% + 10x50% = 5.5년이 된다. 반대로 A가 자백하고 B가 묵비권을 행사한다면 A는 곧바로 자유로운 세상으로 나가게되고, A가 자백하고 B 또한 자백한다고해도 살아야할 형량은 5년이다. A가 자백할 경우의 평균형량은 따라서 0x50% + 5x50% = 2.5년이 된다. 어차피 B가 자백할지 묵비권을 행사할지 모르는 것이니, A 입장에서는 자백하는 편이 더 나은 전략이다. 운이 좋아서 B가 자백하지 않으면 자신은 그대로 풀려나고, B도 같이 자백한다고해도 자신이 묵비권을 행사했을때보다 5년 적은 형량만 살면 되는 것이다. 고로 A와 B 둘의 사회에게 있어서는 서로 입 다물고 있는 편이 가장 최적의 전략이지만, 각각에게 있어서는 불어버리는 것이 더 우월한 전략이 된다. A와 B가 도원결의까지 한 의형제가 아닌 이상, 그리고 무척이나 이타적인 사람이 아닌 이상은, 개개인에게 있어서의 최적의 선택(자백)이 반드시 사회적으로 최적의 선택(둘 모두 침묵)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물론 이 예시가 윤리에도 그대로 이어진다고는 할 수 없다. 그리고 아렌트 또한 게임이론의 측면에서 "악의 평범성"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은 아니니 대충 개인 입장에서의 최선의 선택과 사회 입장에서의 최선의 선택은 다르다는 큰 아이디어만 잡으면 될 것이다. 아렌트는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과연 준법시민만으로 구성된 사회는 반드시 선할까? 모두가 제정된 법을 지키고 살아가기만 한다면, 법은 (우리가 배운 바로는) 지키지 않으면 안될 최소한의 도덕이므로, 공동선의 총량은 더 올라갈 것인가? 나는 이 경우를 1) 구성원을 통제하는 법이 정언명령적인 윤리(보편적인 윤리)에 부합하는 경우와 2) 구성원을 통제하는 법이 정언명령적인 윤리(보편적인 윤리)에 부합하지 않는 경우를 나누어 생각해보고 싶다. 지금 당장은 칸트의 정언명령 컨셉에 반박하지말고 조금 극단적인 두가지 예시를 들어보자. 잘 기억이 안나서 몇몇 소소한 부분에서 틀릴 수도 있고 이 사람이 이러한 의도로 이 예시를 든게 아니라서 오류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잠깐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나오는 이야기를 해보겠다.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된 한 미군 소대가 있었는데, 이 소대는 행군 중에 탈레반 점령 지역에서 민간인 무리를 만나게 되었다. 이 민간인 무리의 처분을 놓고 소대에서는 갑론을박이 벌어진다. 이들을 죽이는 것은 물론 반인륜적인 행위다. 정언명령에 따르자면, 전쟁 중인 적국이라도 군인이 민간인을 죽여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들이 친탈레반 세력이고, 이들을 죽이지 않음으로 인해서 소대의 이동방향이 모조리 누설되어 작전에 실패하고 자신들의 목숨까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를 가능성이 있다면 어떨까?번째 예시로 넘어가보자. 갑국의 의회에서 "을국의 국민들은 미개한 작자들이므로, 그들을 보면 노예로 삼거나 마음껏 죽여도 된다"는 법령이 통과되었다고 가정해보자. 이 법령은 그다지 정언명령에 부합되지 않지만, 그래도 법이니까 준수하는 게 옳은 것일까? 두 경우에서 구성원들이 제정된 준칙을 지켰다고해서, 그러니까 개인 입장에서 준법적인 선택을 했다고해서 사회적으로도 바람직한 결과를 낳는다고 할 수 있는가? 이 예시들을 보면 법이 보편타당하든 보편타당하지 않든, 개개인의 무비판적인 준법이 반드시 공동선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소결론을 내릴 수 있다. 고로 인간은 자신의 행위가 당장 도덕적이라 여겨질지라도, 그것이 결과적으로도 도덕적일지에 대해 사유할 의무가 있다.

 

** 첫번째 예시에 대한 답은 여기서 내리지 않을 것이다. 샌델 형님도 문제를 제시하는 데에는 능하지만 슬쩍 간만 볼뿐 확답을 내지는 않는다.

 

2번 논의 : 도덕준칙의 보편타당성에 대한 사유의무

 


그렇다면 칸트가 주창하는 정언명령의 보편성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정해지는가? 칸트는 "네 의지의 격률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고 했고, 이것을 정언명령의 첫번째 조건으로 제시했다. 이것을 해석하자면 보편적인 준칙을 나 자신의 도덕률과 결부시키라는 의미이며, 쉽게 말하면 "어떤 행위를 할 때에, 다른 모든 사람이 해도 된다고 여겨질만한 행위를 하라"는 말이 된다. 허나 이것을 곰곰이 곱씹어보자. 이 문구에 따른다면, 만약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유태인은 열등하므로 죽여도된다"고 여기고 있고, 나 자신 또한 그 준칙에 세뇌되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보편적인 준칙이기 때문에 나 또한 유태인을 죽여도 괜찮다는 말이 된다. 이 주장이야말로 나치 독일 치하의 모든 독일 국민들을 국가적이고 조직적인 범죄에 휘말리게 한 핵심주장이다. 이를테면 발터라는 사람이 선거에서 나치당을 찍었고, 다수의 지지를 받은 나치당이 유태인의 격멸을 준칙으로 삼는다면, 발터가 유태인을 죽이는 행위는 보편준칙에 따른 양심적인 행위가 된다. 만약 발터가 유태인 학살을 거부할 경우 SS가 발터를 찾아죽일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준칙에 따랐다면(즉, 보편적인 도덕준칙을 따르되, 그것이 개인의 양심으로 동일시되지 않는다면) 모를까, 여기서 더욱 끔찍한 것은, 발터는 그러한 비합리적인 준칙을 자기자신의 양심(도덕률)과 동일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매커니즘을 통해 나치는 자신들의 홀로코스트 범죄에 모든 독일 국민을 실질적이고도 심정적인 공범으로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 독일 국민들이 무자비한 학살자가 된 것은 독일 국민들이 근본적으로 악해서가 아니라, 바로 근본적으로 준법정신이 투철하고 선량했기 때문이다. 어떠한 준칙이 보편적이라는 이유만으로 군말없이 따르는 개인들의 선량함이 사회적으로는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야기하는가? 이것이 "악의 평범성"에 대한 논의다.

 

그러나 우리는 이 보편성이라는 것이 어떤 준칙을 정언명령이라 분류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이 될 수 있는지 생각해보아야한다. 간혹 "다수결"이라는 것, 즉 민주주의적으로 결정된 사안이 정언명령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말도 안되는 소리다. 그 말이 맞다면 집권정당에 따라 개개인이 따라야할 도덕률도 달라진다는 소리나 다를바 없는 것이고, 그것은 "보편적"이라는 수식어의 시계열적인 측면은 쏙 빼고 횡단적으로만 분석한 궤변이다. 또한 나치의 사례처럼 민주적으로 결정된 보편준칙이 어떠한 악을 상정하고 있다면 그것 또한 정언명령이라 할 수 없다. 즉, 어떠한 준칙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된다해서 그것이 반드시 도덕적인 행위임을 뜻하는 것은 아니며, 이 준칙은 이성적으로 합리적이고 타당해야만한다. 이에 따라 칸트는 정언명령의 두번째 조건을 내걸었다. "네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우하도록 행위하라"며 인간존재의 존엄성을 주창한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도덕준칙이 타자의 존엄성을 자신의 존엄성과 동등하게 여기고 그것을 지키는 방향으로 귀결되어야만 보편타당한 준칙이 될 수 있고, 그래야만 정언명령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런고로 윗 문단의 예시 속 발터는 비록 자신을 포함한 다른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보편준칙을 지켰지만, 유태인의 존엄성을 자신의 존엄성과 동등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타당한 준칙을 지켰다고는 할 수 없다. 이것은 보편적이라고 받아들여지는 도덕률에 대한 사유의무로 이어진다. 인간은 자기자신이 따르는 보편준칙이 결과적으로 다른 인간존재의 존엄성을 해하지는 않는지에 대해, 즉 그 준칙이 보편적임과 동시에 타당한 것인지에 대해 사유할 의무가 있다. 아렌트는 정확히 말해서 칸트철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뻔하디 뻔해서 잊혀져버린 정언명령의 두번째 조건을 강조하려 하는 것이다. 인간은 보편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도덕준칙을 무작정 준수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회의함으로써 정언명령에 따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시계 속 톱니바퀴와 인간존재 : 사유태만에 관한 이야기

 


자 그럼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으로 돌아와보자. 아이히만은 건실한 가장이자 선량한 친구였으며 바람직한 준법시민이었다. 다만 그가 맡은 일이 공교롭게도 유태인을 가스실에 쳐넣는 것이었고, 그는 그저 주어진 임무를 착실하고 효율적으로 수행했을 뿐이다. 그런 그가 어째서 유태인 홀로코스트의 죄목을 쓰고 뉘렌베르크 전범 재판에 서게 되었을까? 그는 그에게 주어진 도덕준칙을 그저 자기자신의 도덕률과 결부시킨 준법시민일 뿐이다. 설령 이 도덕준칙이 타당하지 않더라도, 그것이 보편적인 준칙이라면 개인의 힘으로는 그것을 거부하기 힘들다. 아이히만은 그러한 점에서 자신을 변호한다. 자기 자신을 "나치 독일의 톱니바퀴" 쯤으로 표현하며, 자신은 맡은 바 임무를 다하고 지켜야할 법을 준수했으므로, 홀로코스트라는 결과물 그 자체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고 말한다. 마치 오토매틱 시계의 1mm짜리 톱니바퀴와 같다. 1mm 톱니바퀴는 그저 작은 원주를 따라 돌아갈 뿐이지만, 그러한 작은 돌아감들이 모여 오토매틱 시계가 일정한 시각을 표시하게 한다. 시계가 잘못된 시각을 표시하는 것은 전체적인 시스템의 문제이지, 1mm짜리 톱니바퀴 탓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일면 이러한 아이히만의 주장은 굉장한 설득력을 보였고, 전범 재판 당시에도 이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위 변론의 근본적인 문제는 자기자신을 독립된 행위자로 생각하지 않고 "전체 속의 하나"로 생각함에 따른 변명이라는 것이다. 이 관념은 굉장히 무서운 것인데, 이를테면 혼자서 범죄를 저질렀을 때보다 집단으로 범죄를 저질렀을 때에 죄책감이 분산되는 원리와 비슷하다. 범죄행위에 대한 지분을 나눔과 동시에 죄책감 또한 그 지분에 따라 나누는 것이다. 이것이 발전되어 국가적 범죄행위가 되면 개개인이 갖게되는 죄의식은 거의 0에 수렴된다. 그러나 한명의 범죄자가 한명의 희생자를 죽였을 때와 비교하여, n명의 범죄자가 한명의 희생자를 죽이면 그 책임이 1/n이 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면 그 희생자를 때린 사람, 칼로 찌른 사람, 시체를 묻은 사람, 범죄를 계획한 사람 등 역할별로 책임감이 나뉘어질 수 있는가? 결과적으로 모든 가담자는 희생자를 죽이겠다는 같은 목적으로 행위한 것이고, 그것에 대한 책임은 그 사람이 맡은 역할이나 공범의 숫자와는 무관하게 동일하다. 설령 살인한 현장에서 시체를 묻을 곳으로 자동차를 운전만 해간 사람이라고 해도 그 살인에 대하여 책임을 갖게 된다. 그것은 그 운전자가 자신의 행위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모르고 있었다고 해도 적용된다. 그 운전자는 자신의 운전행위가 어떤 행위를 초래할지, 또 어째서 이 야심한 시각에 서너명의 사람이 알 수 없는 포대를 가지고 야산에 데려다달라고 했는지에 대해 한번쯤 의심을 해보아야 당연한 것이다. 이 책임은 개개인이 범죄자가 아닌 준법시민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사회에 속한 톱니바퀴이기 이전에 하나의 독립된 사유주체이며 행위자다. 1mm짜리 톱니바퀴가 아니라 "한 명의 인간"이라면 자신이 하는 행위가 바람직한 결과로 산출될지에 대해 고심해야하고(1번 사유의무), 또 자신에게 요구되는 도덕률이 진정으로 보편타당한 도덕률인지에 대해 회의해야한다(2번 사유의무). 이러한 점에서 아렌트는 이 두가지 사유의무를 다하지 않은 아이히만의 "사유 태만"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자신이 어떠한 준칙을 따를 때에, 그 준칙을 따르면 결과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또 그 준칙이 과연 옳은 것인지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않고, "나는 시키는대로 따랐으니 책임없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죄악이라는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쓴 이유는 잘못 받아들여지고 있는 "악의 평범성" 논의를 지적하기 위한 것이다. 세월호 사태의 이준석 선장이나 28사단 살인사건의 악마 병장은 개개인이 이미 확립되어 있는 준칙을 준수하지조차도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므로 아렌트가 제시한 "악의 평범성"과는 핀트가 어긋난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게된 글이니만큼 이왕 조금 달리 마무리를 하자면, 준법행위라고 해서 그것의 결과와는 무관하게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은 시키는대로만 했다고, 주어진 문서에 찍어야할 도장만 찍었다고해서 그 결과물에 대한 책임까지 회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이것은 이준석 선장과 살인자 병장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선장이 시키는대로 했다던 3등항해사에 대한 이야기이고, 살인사건을 주도한 병장이 시키는대로 그대로 따랐던 후임 상병장들에 대한 이야기다. 악한 사람들의 사회가 아니라 선량한 사람들의 사회에 대한 이야기다. 악의 없는 악행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은 상사와 선임의 명령을 군말없이 따르는 훌륭한 부하이자 후임이었을지는 모르겠지만, 한 명의 인간으로서의 자격은 제로다. 또한 이 주제에서 왜 전후 독일의 사과가 세계무대에서 진정성있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다. 일본의 경우 자신들의 제국주의를 "일부" 군국주의 세력의 탓으로 돌리려는 경향이 크고 자신들은 묘하게 그러한 책임으로부터 빠져나가려는 경향이 큰데, 독일의 경우 "모든" 독일 국민이 실질적으로든 심정적으로든 나치에 동조하였음을 인정하고 그에 대한 국민 개개인의 책임까지도 모조리 인정하는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주제있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신력 이야기  (0) 2014.11.11
나눔문화에 대한 간단한 분석  (0) 2014.10.28
우리가 신을 믿지않아도될 이유  (0) 2014.08.06
아웃사이더  (5) 2014.05.16
행복할 의무  (2) 2014.05.05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