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하는 시험이 한달 앞으로 다가와 블로그에 글을 쓰는것도 꽤나 오랜만인 것 같다. 요즘 나의 일과는 낡아빠진 접철식 의자를 접고펴는 것만큼이나 단순하다. 아침 8시 즈음에 일어나 세수하며 정신을 차리고 학교 열람실에 앉으면 9시. 1시간여를 공부하다가 10시가 되면 학생회관 식당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마치 유전자가 그렇게 하도록 프로그래밍된 것마냥 자동으로 담배 한대를 태운다. 요즘같은 봄에는 오후 2시 무렵이 가장 고비인데, 이 시간대가 되면 마치 삶과 죽음을 논하는 자세로 집에 가서 잠시 쉬고올 것인지, 아니면 커피 한 잔을 더 마시고 들어와 계속 공부를 할 것인지를 고민한다. 그 고민의 결론을 어떻게 매듭지었든 간에 오후 5시가 되면 나는 내 방 침대에 누워있게 된다. 거의 8시간을 앉아있었는데, 타이머로 재보니 정말 집중해서 공부를 한 시간은 4시간 가량. 중국제 타이머가 내가 안보는 사이에 두배 느리게 흐르며 나를 약올리는 것인지, 아직 제법이나 찬기운이 남아있는 봄바람이 도적질해간 것인지, 도대체 무엇을 했는지조차도 모르게 나머지 4시간이 지나가있다. 효율 50%짜리 공부에 자괴하다가도, 그래도 최소한 자동차 휘발유엔진 효율보다는 양호하다며 자위해야 그날 밤잠을 잘 자격이 있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취직을 준비하든 고시를 준비하든 나와 같은 20대 중반 또래의 청춘들은 대개 내 일과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일상을 보낸다. 작년까지만해도 나만 이런 녹슨 접철식 의자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나 하며 우울했었는데, 확실히 그것은 나만의 피해의식일 뿐이었다. 남들도 속사정은 그닥 나와 다르지 않은데, 같은 열람실에서 거진 반년을 넘게 마주치면서도 단 한번도 인사한 적이 없는 어떤 남학생들 무리와 내가 담배를 피우러 나가고 들어오는 시간이 늘상 거의 정확히 맞아떨어진다는 점과, 그 열람실에 앉아있는 모두가 마치 발악하는 생쥐를 꼼짝못하게 손으로 움켜쥐는 듯 정신을 책에 붙잡아놓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에서 나는 이 세상 청춘들에게 묘한 전우애를 느끼곤 한다. 그러나 남들도 다 나같이 고생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 결코 나를 덜 힘들게 하지는 않는다. 가끔은 이렇게 공부해서 뭣하나, 고등학교 때도 대학가면 무슨 인생 모든 문제가 모조리 해결되는마냥 알았기에 공부했는데 막상 대학오니 감독하는 선생님만 없다뿐이지 공부하는 것은 똑같고, 지금이야 취직하면 모든게 다 탄탄대로로 흘러갈 것 같지만 직장에 들어간다해도 분명 승진이니 연봉이니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살 것이 뻔하다. 그런 비참한 생각이 밑도 끝도없이 나를 우울하게 할 때면 과연 인생을 관통하는 어떠한 항구한 행복이라는 것은 있기나 한 것인지, 만약에 있다면 그것을 죽기전에 느껴볼 수나 있을지 궁금해진다.
그러나 나는 이 고민에 대해서 그래도 나 자신만은 설득시킬 수 있을만한 어떠한 답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것은 행복도 의무라는 것이다. 행복할 수 있을 때, 행복한 일이 있을때만 행복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란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행복해야만 하는" 것이다. 가끔씩 나락에 빠질때도, 환희에 가득찰 때도 있지만, 대개 사람은 살아온대로 살고 생각해온대로 생각하는 관성의 법칙에 지배받기 때문에 사람의 삶 또한 눈에 띄지 않을만큼 서서히 바뀌어간다. 가령 19살 마지막날에는 유치했었는데 20살 첫날에는 성숙해졌다는 것은 있을수가 없는 일이다. 따라서 한번 불행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생각을 바꿔 행복을 찾는 일은 거의 없다. 만약 내가 무엇인가를 목표로 공부하는 와중에 행복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 목표를 이루고나서도 행복을 느끼지 못할 개연성이 크다. 그 목표 또한 나의 노력으로 서서히 성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여러가지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해져오고, 인생이라는 것이 입시 취업 승진 병 죽음에 이르는 불행한 관문의 연속이라고 여겨질 때면 항상 나는 길지않는 25년이라는 시간을 되돌아본다. 그래도 최소한 지금의 나는 10년전의 중학생인 내가 "그렇게 된다면 행복할 것이다" 하고 희망했던 나의 미래모습과 (정확히 같지는 않더라도) 대충 일치한다고 할 수 있으며, 불과 10개월 전에는 통계학 과목을 손도 못대던 내가 이제는 준비하는 시험 모의고사 문제도 몇개 틀리지 않고 풀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지 않았는가? 10년전의 나의 행복의 기준, 10개월 전의 나의 행복의 기준에 따르면 지금의 나는 행복해야 정상이다. 하루하루 눈에 띄지는 않지만 나는 분명히 성장했으므로 지금의 나는 행복해야하고, 앞으로도 눈에 띄지는 않을테지만 더할나위없이 명백하게 성장할 것이므로 미래의 나 또한 행복해야한다.
사람은 끊임없이 "그렇게 된다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목표를 향해 살고, 그 목표를 이루거나 근접해오면 자신의 바람대로 행복해야만 한다. 그것은 과거의 나 자신과의 일종의 약속과 같다. 목표를 향해 성장하는 과정에서 행복하지 못하다면 더이상 그 목표를 향해 노력할 필요조차 없게되는 것이다. 나의 목표를 향해감이 아무리 힘들고 고되더라도, 그것을 향해가며 성장하는 것 자체가 아름답고 행복한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목표가 있지만, 그것을 향해 그 어떤 것도 내가 할 수 있는것이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 불행이라 하는 것이 맞다. 어쩌면 우리는 행복이라는 것을 너무 대단한 것으로 여기고, 어느날 갑자기 강림하는 신적인 어떤것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항상 행복이 자신을 향해 "오지 않는다"고 표현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이 가진 행복의 원천 중 가장 오랜 시간동안 가장 거대한 행복을 창출할 수 있는 것은,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와 같지 않다는 것, 나는 하루하루가 다르게 성장해간다는 점이다. 매슬로우의 욕구5단계 중 가장 최상위단계인 자아실현의 욕구는 판검사나 의사가 되는 등의 대단한 것이 아니다. 어제 되고자했던 내가 오늘의 나고, 오늘 되고자하는 내가 내일의 나라면 그러한 눈에 띄지않을만큼 작은 갈망과 실현의 반복이야말로 자아실현이다. 그 성장의 과정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행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