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한 20년전 내가 다섯살일 무렵 굉장히 즐겨봤던 로보트 만화영화가 있었다. 집앞 비디오가게에 아버지 손을 잡고 가서 아버지가 브루스윌리스나 실베스터스텔론이 나오는 액션영화를 고를때, 나는 항상 그 만화영화 비디오를 한두편씩 빌려와 내방의 낡고 작은 비디오텔레비전으로 보고는 했다. 그 비디오는 총 10편인데, 집앞 비디오가게에는 9편까지밖에 갖고있지 않았다. 9편에서는 내가 그 만화에서 가장 좋아했던 캐릭터가 악의 무리에 포섭되어 동료를 배신하는 내용이었는데, 도저히 10편을 구할길이 없어서, 그 캐릭터가 완전히 동료를 배신하고 만화가 새로운 전개를 띄게될지, 아니면 동료들의 눈물어린 회유에 다시금 정신을 차리고 악의 무리와 싸우게될지 도대체 알수가 없었다. 그렇게 난 그 알수없는 결말을 무려 20년동안이나 궁금해했었다. 항상 그것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살다보면 어느순간에 문득 그 마지막 편이 궁금해서 견딜수가 없었다.

웃기게도, 조금만 노력하면 이 정보화시대에서 그 10편을 구하는게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지만, 실제로 행동에 옮긴것은 바로 어제였다. 구글에서 그 만화영화의 마지막 편을 찾아내었을때, 나는 20년간의 숙원을 풀기직전의 어른처럼, 또 기어코 마지막 편을 비디오방 구석 한어귀에서 찾아낸 5살짜리 어린아이처럼, 오금이 저려오고 가슴이 부풀어올라 견딜수가 없었다.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주제가가 끝나고 나는 20분짜리 마지막 편을 한 장면도 빠짐없이 봤다. 사탕을 물었던 입에는 이제 담배가 물려있고, 낡은 비디오텔레비전은 태블릿컴퓨터로 바뀌어있고, 따스하고 찌개끓이는 소리가 들리던 집은 어디선가 중국인의 통화소리만이 간간히 들려오는 고요하고 어두운 골방으로 바뀌어있고, 내 눈에는 이제 모든것을 순수하게 보지못하게하는 안경이 씌여져 있고, 책장의 동화책들은 모조리 전공서적으로 바뀌어 있었지만, 아버지를 따라 빌려온 비디오를 비디오텔레비전에 넣을때의 그 긴장감만큼은 아직도 빛바래지않았다. 아니, 어쩌면 더 했을지도 모른다.

그 캐릭터는 결국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동료에게 돌아가 힘을 합쳐 악당을 격퇴하고, 용기와 희망이 바로 마법의 힘이라는 뻔한 소리를 하며 결말을 이끌어냈다. 어린애들 보는 만화에서 그 이상의 전개와 결말을 바라는 나자신도 우스운 것이지만 나는 적잖이 실망했다. 예상은 했어도 이다지도 반전없이 솔직하게 허무한 결말을 내 눈으로 보고나니 나의 20년의 탐구가 모조리 물거품이 되었다. 이런 결말이라면 이미 20년전에도 예상했었다. 차라리 죽는 그 순간까지도 그 결말을 궁금해하는 것이 나을 뻔했다. 그렇게 궁금해하며 나는 성숙되고 오염되어가는 나의 시선과 마음으로 나만의 결말을 마음껏 상상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결말을 알아버렸으니 내 자신만의 결말을 내리는 것은 아무래도 틀려버린 일이다.

세상엔 차라리 모르는 것이 속편할 때가 있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결말이 어떨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고 예상할 수 있음에도, 예상되는 결말이 결코 아름답지 못하거나 인정하기에 편한것이 아니기에, 차라리 나의 편협으로 객관을 짓밟아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살면서 아집과 편협이 합리화될 수 있는 유일한 기능이자, 세상과 삶에 대한 인간의 어떠한 마지막 희망이고, 너무나도 뻔한 허무와 무의미에 대한 인간의 마지막 저항이라고도 할수있다. 그렇게 발악하면서 인간은 살아가고, 이 글의 논점에 충실한다면, 사랑한다.

달콤한 사랑에 빠지고, 그야말로 손대면 3도화상은 입을듯한 연애를 하고, 절절한 키스와 황홀한 섹스를 하며 사랑의 방식은 너무나도 여러갈래로 나뉘지만, 결국 사랑의 끝은 마치 항성의 마지막 순간처럼 초라하기 짝이 없다. 무거운 항성은 수소핵융합을 마치고 대폭발과 동시에 과거의 찬란함에 비해 초라하기 그지없는 중성자별이 되고, 중간즈음되는 항성은 차츰 덩치가 거대해지다가 이내 다시 쪼그라들어 백색왜성으로 식어버린다. 사랑의 끝 또한 마찬가지다. 얼마나 가슴떨리는 사랑을 했든, 이내는 대폭발을 하며 순식간에 와해되어 끝나버리거나, 혹은 차츰 인지할 수 없을만큼 작은 정도로 계속해서 마음이 무한히 미분되는 함수처럼 식어버린다. 별수없는 과정이다. 사람이 만약 천년을 살 수 있다면, 아무리 사랑에 순수한 작자라도 적어도 마흔번씩은 결혼할 것이다. 결혼이 아닌 단순한 사랑이라면 아마 수백번씩은 할것이다. 단 한 사람, 단 한 사랑을 외치는 것은 아마도 인간의 수명이 길어야 천년의 일할밖에 되지 못함으로 인한 합리화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허나 아무도 태양이 식을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아무도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지 않고, 아무도 사랑이 끝날 것을 생각하며 사랑하지 않는다. 끝을 생각한다면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다. 마치 20년을 기다려온 만화영화의 결말과 같다. 그 끝은 너무나 뻔하고 허무함에도 애써 부정하며 나만의 아름다운 전개를 만들어가고, 굳이 허무한 결말을 상정하지 않으려하며, 실제로 끝에 이르러서야 허무를 일시불로 느낀다. 사랑이란 그래서, 시작할 때 투자한 금액 대비 끝날때 받을 수익을 계산하는 합리성이라는 것으로 설명할 수 없으며(그렇게치면 모든 사랑은 negative return이다), 사랑을 할수밖에 없는 인간존재는 그래서 합리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

나는 인간을 사랑하고,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사랑한다. 인간은 유한한 수명 속에서 무한한 진리를 추구하고, 유한한 호르몬 매커니즘 속에서 무한한 사랑을 추구한다. 마치 높은 계단을 오르지 못하고 낑낑거리는 새끼강아지가 우리를 미소짓게 하듯, "이룰래야 이룰수없는" 인간들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그럼에도 계속해서 이루려고하는 인간이 너무나 아름답다. 인간은 결코 무한대가 될수없지만 무한대로 발산해나가고, 결코 특이점이 될수없지만 특이점으로 수렴해나간다. 특히 사랑스러운 것은, 인간이란 이미 알고있는 무의미와 허무를 부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있다는 것이다. 유의미란 항상 무의미에 대한 부정 속에서 태어난다. 그렇기에 인간은 천년의 일할이라는 일생동안 이따금씩은 허무와 공허를 느낄지라도, 대부분의 시간을 그들 자신에게 의미있는 것으로 연성해낼 수 있는 연금술의 능력을 가질수 있게 된 것이다. 삶도 그렇고, 사랑도 그렇다.

*

하숙집 1층에는 논산훈련소 시절 같은 소대였던, 또 같은 학교 동기인 나보다 한살 많은 형이 산다. 이 형을 만나게된 계기도 우연 이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어서 이야기를 풀자면 재미있지만, 아무튼 그런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루기로한다. 형과 나는 이따금씩 시간을 맞춰 하숙집에서 같이 저녁식사를 하곤했고, 식사후에는 내가 담배 한개비를 천천히 피우는동안 형은 고맙게도 오들오들 떨면서도 줄곧 말상대를 자처하고는 했다. 어제는 어쩌다가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가 나왔는데, 형은 고교동창회를 나가지 못한다고 했다. 왜? 라고 물으니 고교시절 사귀다가 깨진 여자친구가 같은 반이어서 나가기가 애매하단다. 어쩌면 흔히 들어볼 수도 있는, 배경만 "같은 대학 같은 과"가 아닌 "같은 고등학교"로 바뀐 이 이야기가 나에게는 생소하면서도 흥미롭게 들려왔다. 남중 남고를 나와 10대의 대부분을 남자들과 지내온 나로서는 중학교시절이나 고교시절에 연애를 한다는 것을 꿈꾸어본 적도 없다. 한 친구는 나에게 물었다. 마음만 먹으면 남자학교라도 나와서 사귈수 있잖아? 그래 물론 그게 맞다. 고등학교 때야 논밭이라는 감옥에 갇혀 기숙사생활을 했기에 어쩔수 없었지만, 분명 중학교 때는 그정도는 아니었다. 중2때까지 다녔던 학원에서는 인근 여중의 아이들과 합반이었고, 초등학교 시절부터 줄곧 연락을 이어온(심지어는 제대 직후까지) 친구들 중에서도 여자애는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중에서 누군가에게 연애감정을 느껴본 적은 단한번도 없었던 것 같다. 2차성징이 한창일 무렵이라 성욕은 분명히 왕성했음에도, 성욕과 연애감정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 말로 표현은 못해도) 결코 같은 것이 아님을 그때도 알고 있었으니, 나는 비교적 이것이 거짓이 아님에 당당하다.

10대 시절에 연애 못해본 나의 전철을 합리화하기 위한 너절한 변명일지라도, 내 기억으로는 그때까진 그 흔한 짝사랑조차도 해본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공부에 방해될까봐? 책임을 질 수 없을까봐? 아니. 그런 대단한 이유는 아니었다. 만약 그 시절에 정말로 좋아했던 여자아이가 있었다면 분명 연애를 하지 않았을리가 없다. 정말로 절절하게 짝사랑했던 여자아이가 있었다면 분명 기억하지 못할리가 없다. 그때 나는 그쪽 방면으로는(이런 표현이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완전히 텅 비어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좋아하지 않았기에 괴로울 수도 없었고, 외로울 필요도 없었으며, 구태여 지금에 와서 아쉬울 것도 없고, 다시 그시절로 돌아간다고해도 "연애"라는 것을 할수는 있겠지만 누군가를 좋아하지는 못할것이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많은 정도로 변했지만, 최소한 연애와 이성관에 있어서는 거의 변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아직 그때보다 성장하지 못한건지, 그때 이미 성장해 있었던건지는 잘 모르겠다.

삼류 사랑노래의 가사처럼, 어쩌면 사랑을 하는 그 즉시부터 상처는 시작될지도 모른다. 가끔씩 내 친구들은 여자친구와 잘 되지않을때 나와 상담을 하곤하는데 (도대체 왜 나같은 놈과 상담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해주는 말은 늘 하나뿐이다. 사랑 또한 행복하려고하는 것이다. 행복하지 않으면 더이상 사랑의 가치는 0이 된다. 마치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란 노래제목과 같다. 구태여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아도 우리의 인생에는 도처에 행복이 널려있으며, 당장 사랑하지 않는다하여 자신의 남성성이나 여성성을 상실하는 것도 아니다. 사랑 또한 넓디넓은 인생이라는 시계 속 희미하리만치 작디작은 톱니바퀴일 뿐이고, 그 톱니바퀴가 잠깐 작동을 멈춘다해서 인생시계가 가지않을 리가 없다. 사람들은 어떠한 착각을 하고있음이 분명한데, 사랑은 해야만하는 것이 아니라, 할수있으면 하는것이다. 그것이 마치 인생의 전부인양, 사랑받지 못해서 외로워하고 사랑하지 못해서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성인이 되었으니, 대학에 왔으니, 혹은 나이가 찼으니 연애를 해야하고 결혼을 해야한다는 것 따위는 없다. 그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랑이 끝났을때 아쉬움이 없도록 마음껏 사랑하다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없으면 또 다른 행복에 전념하며 지내면 된다. 에리히 프롬이 소유로부터 행복을 찾지말라고 했던가? 나는 여기에 추가하여, 구태여 사랑으로부터 행복을 찾을 필요 또한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난 10대에 연애 한번 해보지 못했지만, 그렇다해서 10대가 행복하지 않았다고 할수는 없다. 그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내가 20대에 접어들어서야 찾아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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