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시작 1년이 지난 지금까지 3만명의 사람이 내 글을 읽었고, 요즘은 어쩐 이유인지 매일매일 방문객 수가 200명 가까이 되고 있다. 나는 제대후 페이스북에 이런저런 글을 올렸었고 그 반응이 크게 나쁘지 않았지만, 그러한 공개적인 장소에 내 생각을 쓰는 것은 분명 나 자신을 유지하게 힘들게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나만의 서재같은 조용한 공간이 필요해서 시작했던 이 블로그에 처음에는 참 공격적이고 분절적인 포스트를 많이 썼었다. 그러나 방문객 수가 늘어나면서 나 또한 내 포스트에 대한 일종의 책임의식 같은 것을 가지게 되었고, 예전처럼 정제되지 않은 포스팅은 자제하고 있는 편이다. 그것은 내가 고의로 그런 목소리를 내지않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 또한 이런저런 주제로 포스팅을 하면서 나 자신에 대한 반성 내지 성장을 하고 있다고 믿고싶다.
내 친구들은 내 블로깅 행위(?)에 대해서 여러 의미있는 질문을 던져주었다. 나는 과연 나 자신만의 만족을 위해 글을 쓰는가, 아니면 남에게 보이기 위한 글을 쓰는가? 어차피 세상 모든 것과 삶이라는 것이 무의미의 연속이고, 내가 글을 쓰는 것은 무의미에서 단지 또다른 무의미를 창조하는 행위는 아닌가? 내 글이 너무 길고 정치적인, 다시말해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삶과 인간의 문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있지는 않은가? 사실 나는 이 질문으로 인해 살짝 자존심이 상했던 적도 있고, 내 블로그가 아닌 다른 블로그의 글을 즐겨보는 친구들에게 일종의 질투같은 것을 느꼈던 적도 있다. 그러나 내가 자존심이 상했다는 것은 이 질문들이 나의 생각에 대한 매우 정확하고 통렬한 비판을 하고 있다는 뜻이고, 제일 가까운 사람마저도 나의 블로그를 읽지 않는다는 것은 내 글이 그만큼 흡인력과 공감능력이 떨어진다는 방증일 것이다. 나는 위 질문들이 매우 유의미하다고 생각하고 매 글을 쓸때마다 주의를 기울이고 있으며, 어쩌면 친구의 저러한 질문들이야말로 의도적으로 찾아들어와서건 아니면 얼떨결에 이것저것 정보를 얻으러와서건 나의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내가 알량한 위선을 떨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변호할 수 있는 주제들이라 생각한다. 오늘은 내 마음을 콕콕 찌르는 위의 통렬한 질문에 대해서 나 자신에 대한 변론을 해보고자 한다.
나는 과연 나 자신만의 만족을 위해 글을 쓰는가, 아니면 남에게 보이기 위한 글을 쓰는가?
처음에는 나 자신만의 만족을 위해 블로그를 시작했다. 분명 공개적인 장소에서 글을 쓰며 내 자신을 유지하는 것은 너무나 힘겨운 일이었고, 비교적 익명성이 보장되고(그래서 이 블로그의 아이디는 내가 여타 사이트에서 쓰는 아이디와 다르다) 조용한 공간이어야만 내가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편하게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허나 나 또한 허영심 많은 평범한 인간 부류 중의 하나라서 남에게 보이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의 게으름으로 인해 연재가 자꾸 미뤄지고 있는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는 아예 처음부터 남들이 보기 편하게 경어체로 작성하였고, 다른 카테고리의 글들도 점차 방문객이 늘어가면서 "남에게 보이는 나"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이는 내 글에서 진한 색으로 강조가 되어있는 바로 상징되며, 이 강조표시된 문장이야말로 내가 하고싶은 중요한 말이니 특히 명심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나의 욕심이 반영된 결과이다. 사실 글을 쓰는 작자가(내 자신이 글을 쓰는 작자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 말도 안되는 글들을 싸질러 놓은 나 자신에 대한 자의식 과잉이겠지만) 자기만족만을 위해 글을 쓴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끔찍한 위선이다. 글이라는 것은 생각전달의 매개체이며, 그런 글을 뻔히 검색해야 들어올 수 있는 블로그에 올리면서 자기만족이라고 하는 것은 눈가리고 아웅하는 것에 불과하다. 많은 사람이 나의 글을 읽어주고 공감 혹은 비판해주는 것은, 나의 사고가 "나"의 한계에서 벗어나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고 유일한 매커니즘이며, 이 매커니즘을 깔끔하게 포기할 수 있는 글쟁이는 세상에 없다. 만약 세상과 소통하지 않으려하는 글쟁이가 있다면 필시 그 사람의 생각은 편협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글쟁이란 모름지기 자신의 이율배반에 대한 타자들의 이성적인 비판에서 쾌락을 느끼는 합리적 마조히스트여야한다. 아령을 들고 근육이 찢어져야 그 찢어진 자리에 새로운 근육세포가 생기고 이두근이 발달하듯이, 글쟁이는 자신의 논리 허점을 파고들어 찢어버리고야마는 통렬한 비판을 먹으며 성장한다.
어차피 세상 모든 것과 삶이라는 것이 무의미의 연속이고, 내가 글을 쓰는 것은 무의미에서 단지 또다른 무의미를 창조하는 행위는 아닌가?
나는 세상을 얼마 살지 않아서 삶의 의미라는 것을 모르고, 계속 살아가서 내 머리가 백발로 성성해져도 삶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인간은 세상과 삶의 의미라는 것을 영원토록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이 "없다"고 상정하고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이러한 염세주의적인 결론에 다다랐던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허나 나는 이 부분에 있어서 키에르케고르와 생각을 같이 한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의 유한성이 신중하게 받아들여질 때,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진리는 그 유한성에 대한 추구일 뿐"이라고 했다. "이데아"로 비추어지는 절대적 진리는 영원불변한 것으로서, 죽음으로서 그 존재를 끝낼 수밖에 없는 유한하고 무상한 인간존재는 이데아에 다다를 수 없다. 그러나 인간존재는 그 영원불변한 것을 계속 추구하는 "열정"으로써 살아간다. 즉, 영원불변하는 이데아가 의미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영원불변하는 것을 "추구하는 행위" 그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이다.
나는 키에르케고르의 이 생각을 접하기 전에 이러한 비유를 하고는 했다. 삶이란 모래사장이다. 수많은 모래알이 깔린 모래사장에서 모래알 하나하나의 존재가치는 0에 수렴한다. 인간은 이 무의미의 모래사장에 홀로 떨구어져있다. 그러나 무의미가 자신을 집어삼킬듯 지배하는 상황에서 정신적으로 버텨내기 위해서는 그 무의미들을 어찌저찌 유의미한 것으로 만들든, 그것마저도 불가능하다면 자의적으로 의미를 불어넣든 해야한다는 것이다. 가령 모래성을 쌓는 것이다. 그 모래성 또한 무의미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 인간에게 있어서는 "성"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그렇게 인간은 무의미의 모래사장에서 유의미를 창출하며, 혹은 가공하며 살아간다. 인간은 필시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 아니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 무의미를 "무의미"라고 부르는 순간부터 인간은 자신이 존재해야할 가치를 잃게 된다. 이것은 뚱뚱한 사람이 뚱뚱하다는 말을 듣기싫어하는 것과 같다. 삶과 세상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냉혹한 사실이지만, 그것을 인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내가 글을 쓰고 생각을 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내가 글을 쓰는 거의 모든 주제는 무의미하다. 그러나 그러한 무의미 속에서 의미를 찾으면서 혹은 만들어내가면서 나는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인지한다.
내 글이 너무 길고 정치적인, 다시말해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삶과 인간의 문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실 자아비판을 많이 했다. 정치와 사회라는 것도 인간에 대한 통찰이 없다면 함부로 논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나는 길지 않은 25년을 살면서 인간 개개인의 본성과 사회의 본성은 결코 같은 것이 아님을 느끼게 되었다. 개개인의 인간을 보면 모두가 대체적으로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다. 허나 이들이 모여 사회를 이루게되면 홉스의 리바이어던과 같이 새로운 인격을 가진 또다른 존재로 승화되고, 이 리바이어던(홉스의 저작에서 쓰인 바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사회공동체 그 자체를 말한다면)의 행위는 개인의 합리성과는 괴리된 양상을 지닌다. 이것은 정치학이 철학에 기반하는 동시에, 철학과는 그 연구주제가 완전히 다른 학문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즉, 철학이 본질적으로 인간 개개인의 의미에 대한 탐구라면, 정치학은 그러한 개개인의 인간들이 집단으로 모였을 때에 대한 탐구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철학의 외연상으로 인간은 무한한 합리성을 행할 수 있지만, 정치학의 외연상으로 인간은 항상 집단에 의해 제한된 합리성만 행할 수 있으며, 나는 인간의 무한한 합리성이 아닌 집단속에서 억압된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논의를 하고싶을 뿐이다.
글이 길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한 변론은 이렇다. 나는 사실 어려운 글을 혐오하고, 동시에 어려운 글을 즐겨읽을만큼 머리가 영민하지 못하다. 물론 내포하고 있는 메타포가 심오하여 불가피하게 이해하기 힘들게 된 글은 모르겠지만, 다시한번 말하지만 글의 본질이란 생각의 전달이고, 어려운 글은 그 해석가능성에 따라 중의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기에 글의 본질에서 벗어나게 하는 원인이다. 나는 어려운 문장을 통해 대중을 혼란시키고, 그 혼란 속에서 나 자신에 대한 선민의식을 느끼는 사디스트가 아니다. 나도 한번 읽어서는 도저히 이해하기가 힘든 어려운 문장이나 책은 읽기 힘들다. 생각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그 문장을 끝끝내 해석해내었을 때 그것이 뭘 그렇게 대단한 것을 말하고 있는지에 대한 회의감 때문이다. 글은 항상 읽기 쉬워야 한다. 이 때 난삽한 문장 한줄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왜곡함이 없이 쉬운 문장으로 표현하려면 세줄 네줄이 되기 십상이다. 그에는 유치하고 비현실적이나마 비유도 들어야하고, 예시도 들어야한다. 따라서 쉬운 글은 길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는
사실 이 글의 결론을 어떻게 내야할지 곤란하다. 이것은 나의 생각에 대한 생각이고, 내 글에 대한 글이다. 뭐 대단한 생각이고 글이라고 이렇게까지 하느냐고 말한다면 물론 할말은 없지만, 1년간 블로그를 하며 그간 느껴왔던 것을 정리하고 나 자신에 대한 비판을 한 데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앞으로도 많은 쓰잘데없는 잡설들을 올릴 것이다. 그것들은 또다시 남에게 보이기 위한 글일 것이고, 무의미한 글일 것이고, 너무 정치적이고 길 것이다. 그렇게 또 나는 앞으로 타자의 비판을 달게 받아먹고, 무의미 속에서 유의미를 찾아가며, 최대한 어려운 것을 쉽게쉽게 표현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주제있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에 대한 잡설 (4) | 2014.03.25 |
---|---|
내가 겪은 리더 (0) | 2014.03.01 |
자기계발서적은 당신의 인생을 책임져주지 않는다[수정] (5) | 2014.02.18 |
원나잇과 성욕 (6) | 2014.02.03 |
정치외교학과의 수업/시험/진로에 대한 전공생의 생각 (103) | 2013.12.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