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내 군시절 함께했던 중대장님의 결혼식에 다녀왔다. 제대 삼개월 후 절친했던 후임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던 장례식 이후로 군시절 인연들이 거의 모두 모였다. 다른 아이들은 이제쯤 우리또래와 네살정도밖에 차이나지 않는 중대장님을 형님이라고 편하게 부르지만, 나는 여전히 중대장님이라는 호칭을 버리지 않는다. 그것은 그 사람을 내가 중대장님이라고 불러왔던 과거 2년간의 중대장-중대원의 관계가 사회에 나온 지금까지도 고착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진정 그 사람이야말로 한 집단의 리더가 될 자격이 있고, 그 집단에서 내가 제외된 지금까지도 그를 리더로 인정하고싶은 나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느 집단에서건 대다수의 리더들은 허울좋은 솔선수범과 이해를 입으로만 외칠뿐, 자신이 하는 것이라고는 별수없이 계급적 하위구조에 있는 피지배세력에게 여러가지를 지시하는 것 뿐이다. 집단의 간부는 항상 공은 부하에게 책임은 자기에게 돌려야하고, 이는 수많은 간부양성 교육과정에서 귀따갑도록 듣는 말이나, 사실상 한국 군대를 비롯한 거의 모든 집단에서는 리더 개인의 솔선수범이 그의 역량평가에 있어서 그다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며, 부하를 이해하기는커녕 더많이 부려먹고 더많이 착복하는 자가 더욱 높이 출세하는 경향이 크다. 더군다나 한국의 리더들은 으레 "아랫사람 부려먹는 놈들"이라는 대중의 인식이 결코 오명이 아님을 그들의 행동으로 직접 보여준다. 아직까지도 한국에서의 리더는 "평등한 사람 중의 일인자"가 아니라, 리더가 되는 순간부터 군중과는 같이 묶일 수 없는 귀족적 특권세력의 의미가 훨씬 큰 것이다. 선거철에는 재래시장을 돌던 국회의원 후보가 당선된 이후에는 "감히 국회의원에게!"라는 말을 국민에게 아무런 거리낌없이 내뱉는 의회와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 또한 바로 이끄는 리더가 아닌 군림하는 리더에 대한 본능적인 반감 때문일 것이다. 리더라는 상위구조도 결국은 본질적으로 하위구조로부터 그 정당성과 존재가치를 얻음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중대장은 내가 이등병으로 자대배치를 받은지 얼마되지않아 우리중대로 부임하였고, 내가 말년병장 때 부대해체로 모두 뿔뿔이 흩어지기까지 나와 항상 마주보며 군생활을 해왔다. 더군다나 나는 중대행정반에서 근무했기에 하루 중 중대장을 보는 시간이 안보는 시간보다 훨씬 많았었다. 이사람 자체가 어떤 사람이라고 내가 감히 속단할 정도로 많은 시간을 같이한 것은 아니나, 확실히 이 사람은 내가 보아왔던 그리고 보게될 리더 중 거의 유일하게 리더로서의 자격을 갖춘 사람인 것은 확언할 수 있다. 한번은 서초구 우면산 방면에 산사태가 일어나 우리 부대에서 대민지원을 나간적이 있었는데, 중대장은 중대원들이 잠시 담배 한까치씩을 태울 휴식시간을 주면서도 결코 자기자신은 손에 쥔 삽을 놓지 않았다. 리더가 휴식까지 반납하며 솔선하는 상황에서 중대원들이 과연 마음놓고 쉴 수 있었을까? 솔선은 하향적 행위이다. 영이 서있는 집단이라면 리더가 솔선함으로 해서 눈부신 생산성의 향상을 낳을 수 있다. 리더 자신이 군림하려는 자가 아닌, 솔선하는 자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데에 성공한다면, 집단의 생산성 향상에 있어 그만한 방도도 없을 것이다.
한번은 선임병이었던 내가 사고를 친적이 있어서 영창에 갈 위기에 놓인적이 있었다. 연대장에게 나 대신 수없는 욕지거리와 쓴소리를 듣고도 중대장은 나에게 욕 한마디 하기는커녕 선임병으로서의 입장을 이해해주는 것을 우선시했다. 이것 때문에 나의 어머니가 아들이 걱정되어 사단에 전화하는 바람에 연대장이 더욱 노발대발하였고, 나와 중대장은 다시 호출당해 한시간 여를 욕을 먹게 됐다. 나는 나의 어머니로 인해 조용히 넘길 수 있었던 일이 더욱 커지게되어 영창에 가게되는 것보다는(사실 그런일로 처벌이 더 커질것도 아니었고), 그 당시 우리부대에 와서 1년만에 처음으로 휴가를 받아 친구들과 놀러갔다가 바로 호출당해 복귀한 중대장에 대한 미안함으로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사실 나는 그때 중대장에게 속된말로 쌍팔년대 군대 때처럼 죽지않을만큼 맞아도 할말이 없다는 생각을 했었고 차라리 그랬다면 내가 지금까지도 그에게 일말의 마음의 빚 같은 것을 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어머니를 원망하며 난생 처음으로 빈말이 아닌 미안함에 의한 사죄를 하는 나에게 중대장은 "어머니를 원망하지말라. 누구나 아끼는 자식이 그런 상황에 처하면 그렇게 안할 어머니는 없다. 절대로 이 일로 어머니에게 화를 내거나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때까지만도 사실 오기에 북받쳐 될대로되라고 생각했던 나는 한없는 미안함에 담배를 피우며 20대에 들어선 처음으로 펑펑 울었다.
리더를 이루는 힘은 권위다. 그런데 권위는 재미있는 것이어서, 억지로 찾고자하면 되려 멀어지고, 버리고자하면 나에게 가까워온다. 권위는 바로 솔선과 부하입장에 대한 이해로 권위를 버림에서 나온다. 어쩌면 이 두개는 너무나도 뻔하고 추상적인 리더의 덕목일지도 모른다. 동시에 너무나도 상투적이리라. 그럼에도 이 두 덕목 중 하나라도 제대로 지닌 리더는 거의 없다. 그러나 중대장은 내가 본 사람 중, 나의 이상적인 리더관에 가장 근접한 유일한 인물이었고, 이것이 비단 나와의 인연 때문에 확대해석한 것이 아님이 내가 사회에서 더많은 사람과 더많은 "리더라고 자칭하는" 리더들을 만남으로써 증명되어가고 있다. 내가 나중에 누군가의 리더가 되어 중대장의 반쯤이라도 따라할 수 있는 그릇이 된다면 분명 성공한 리더이리라.
어느 집단에서건 대다수의 리더들은 허울좋은 솔선수범과 이해를 입으로만 외칠뿐, 자신이 하는 것이라고는 별수없이 계급적 하위구조에 있는 피지배세력에게 여러가지를 지시하는 것 뿐이다. 집단의 간부는 항상 공은 부하에게 책임은 자기에게 돌려야하고, 이는 수많은 간부양성 교육과정에서 귀따갑도록 듣는 말이나, 사실상 한국 군대를 비롯한 거의 모든 집단에서는 리더 개인의 솔선수범이 그의 역량평가에 있어서 그다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며, 부하를 이해하기는커녕 더많이 부려먹고 더많이 착복하는 자가 더욱 높이 출세하는 경향이 크다. 더군다나 한국의 리더들은 으레 "아랫사람 부려먹는 놈들"이라는 대중의 인식이 결코 오명이 아님을 그들의 행동으로 직접 보여준다. 아직까지도 한국에서의 리더는 "평등한 사람 중의 일인자"가 아니라, 리더가 되는 순간부터 군중과는 같이 묶일 수 없는 귀족적 특권세력의 의미가 훨씬 큰 것이다. 선거철에는 재래시장을 돌던 국회의원 후보가 당선된 이후에는 "감히 국회의원에게!"라는 말을 국민에게 아무런 거리낌없이 내뱉는 의회와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 또한 바로 이끄는 리더가 아닌 군림하는 리더에 대한 본능적인 반감 때문일 것이다. 리더라는 상위구조도 결국은 본질적으로 하위구조로부터 그 정당성과 존재가치를 얻음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중대장은 내가 이등병으로 자대배치를 받은지 얼마되지않아 우리중대로 부임하였고, 내가 말년병장 때 부대해체로 모두 뿔뿔이 흩어지기까지 나와 항상 마주보며 군생활을 해왔다. 더군다나 나는 중대행정반에서 근무했기에 하루 중 중대장을 보는 시간이 안보는 시간보다 훨씬 많았었다. 이사람 자체가 어떤 사람이라고 내가 감히 속단할 정도로 많은 시간을 같이한 것은 아니나, 확실히 이 사람은 내가 보아왔던 그리고 보게될 리더 중 거의 유일하게 리더로서의 자격을 갖춘 사람인 것은 확언할 수 있다. 한번은 서초구 우면산 방면에 산사태가 일어나 우리 부대에서 대민지원을 나간적이 있었는데, 중대장은 중대원들이 잠시 담배 한까치씩을 태울 휴식시간을 주면서도 결코 자기자신은 손에 쥔 삽을 놓지 않았다. 리더가 휴식까지 반납하며 솔선하는 상황에서 중대원들이 과연 마음놓고 쉴 수 있었을까? 솔선은 하향적 행위이다. 영이 서있는 집단이라면 리더가 솔선함으로 해서 눈부신 생산성의 향상을 낳을 수 있다. 리더 자신이 군림하려는 자가 아닌, 솔선하는 자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데에 성공한다면, 집단의 생산성 향상에 있어 그만한 방도도 없을 것이다.
한번은 선임병이었던 내가 사고를 친적이 있어서 영창에 갈 위기에 놓인적이 있었다. 연대장에게 나 대신 수없는 욕지거리와 쓴소리를 듣고도 중대장은 나에게 욕 한마디 하기는커녕 선임병으로서의 입장을 이해해주는 것을 우선시했다. 이것 때문에 나의 어머니가 아들이 걱정되어 사단에 전화하는 바람에 연대장이 더욱 노발대발하였고, 나와 중대장은 다시 호출당해 한시간 여를 욕을 먹게 됐다. 나는 나의 어머니로 인해 조용히 넘길 수 있었던 일이 더욱 커지게되어 영창에 가게되는 것보다는(사실 그런일로 처벌이 더 커질것도 아니었고), 그 당시 우리부대에 와서 1년만에 처음으로 휴가를 받아 친구들과 놀러갔다가 바로 호출당해 복귀한 중대장에 대한 미안함으로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사실 나는 그때 중대장에게 속된말로 쌍팔년대 군대 때처럼 죽지않을만큼 맞아도 할말이 없다는 생각을 했었고 차라리 그랬다면 내가 지금까지도 그에게 일말의 마음의 빚 같은 것을 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어머니를 원망하며 난생 처음으로 빈말이 아닌 미안함에 의한 사죄를 하는 나에게 중대장은 "어머니를 원망하지말라. 누구나 아끼는 자식이 그런 상황에 처하면 그렇게 안할 어머니는 없다. 절대로 이 일로 어머니에게 화를 내거나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때까지만도 사실 오기에 북받쳐 될대로되라고 생각했던 나는 한없는 미안함에 담배를 피우며 20대에 들어선 처음으로 펑펑 울었다.
리더를 이루는 힘은 권위다. 그런데 권위는 재미있는 것이어서, 억지로 찾고자하면 되려 멀어지고, 버리고자하면 나에게 가까워온다. 권위는 바로 솔선과 부하입장에 대한 이해로 권위를 버림에서 나온다. 어쩌면 이 두개는 너무나도 뻔하고 추상적인 리더의 덕목일지도 모른다. 동시에 너무나도 상투적이리라. 그럼에도 이 두 덕목 중 하나라도 제대로 지닌 리더는 거의 없다. 그러나 중대장은 내가 본 사람 중, 나의 이상적인 리더관에 가장 근접한 유일한 인물이었고, 이것이 비단 나와의 인연 때문에 확대해석한 것이 아님이 내가 사회에서 더많은 사람과 더많은 "리더라고 자칭하는" 리더들을 만남으로써 증명되어가고 있다. 내가 나중에 누군가의 리더가 되어 중대장의 반쯤이라도 따라할 수 있는 그릇이 된다면 분명 성공한 리더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