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전 우리학교 커뮤니티에서 원나잇스탠드에 대한 열띤 토론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과연 원나잇으로 칭해지는 일회성 만남(이라고 쓰고 섹스라고 읽는)이 지탄받아야 하는가에 관련된 것이었다. 나는 나름 우리학교 학우들의 지성을 믿고 있었고, 따라서 다소 세속적인(?) 주제에 비해 배울것 많은 이야기들이 나올 줄 알았는데, 그 논쟁은 그야말로 보잘것 없음의 향연이었다. 자신이 보수적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인간은 동물과 다르다"는 원론적이기 짝이없는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었고, 자신이 진보적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성욕도 여타 욕구와 다를바가 없다는 것이 논리였다. 전자는 인간이 동물과 어떻게 다르며 그 다르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었고, 후자는 배고프면 먹고 마려우면 싸듯 섹스도 하고싶으면 하는 것이라는 논리를 펼쳤다. 이러한 병림픽의 향연에서 나는 그래도 전자 쪽에 마음이 기울기는 했지만, 어찌됐건 이러한 논리라면 두 쪽 모두 마음으로 지지하기는 힘들었다. 특히 나는 원나잇 옹호론자들이 펼치는 "성욕=여타 욕구" 논리가 인간 성욕의 본질을 크게 해하는 것이라 판단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욕을 식욕, 배설욕, 수면욕과 동등선상에서 비교하는 것은 오류다. 비록 "욕구"라는 하나의 분류로 취급되고 있기는 하지만, 성욕의 속성은 다른 여타 욕구들의 속성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성욕을 타 욕구들로부터 차별화하기 위하여 세가지 차원에서 성욕을 바라보고자 하며, 이들은 각각 "해당 욕구에 대한 인간의 선택권이 주어지는가"의 문제, "해당 욕구의 대상이 있는가"의 문제, "해당 욕구는 목적을 가지거나 그 욕구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i) 자기선택권 차원 : 이 기준에 따르면 식욕, 배설욕, 수면욕은 비자기선택권적 욕구이다. 욕구에 대한 인간의 자기선택권이 없다는 것은, 이 욕구를 해소할 것인지 방치 혹은 인내할 것인지에 대한 권한이 인간에게 부재하다는 것이다. 살아있는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해 먹어야하고, 노폐물을 배출키 위해 배설해야하며, 휴식을 하기 위해 자야한다. 이 욕구들은 인간이 하고 싶지 않다고해서 하지 않게 되면 생명유지에 막대한 지장을 주는 것들이며, 애초에 "하지 않는다"는 것이 불가능한 욕구들이다. 또한 이들 욕구는 해소하는 양식이 제한적이다. 극도로 배고픈 사람은 곰팡이핀 밥이라도 먹어야하며, 극도로 마려운 사람은 아무리 지저분한 변기에서라도 싸야하며, 극도로 졸린 사람은 아무리 딱딱하고 찬 바닥에서라도 자야한다. 반면, 성욕은 인간 자신이 성욕을 해소할 것인지의 여부와, 더 나아가 어떻게 해소할 것인지에 대한 여부가 선택이 가능하다. 성욕 자체가 여타 욕구들과는 달리 생명유지에 영향을 주는 요소가 아니고, 그 해소에 있어서 고정된 일련의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인간은 성욕에 대해 자기선택권을 갖는다. 오랜 기간을 섹스를 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해도 자신이 일말의 성적 호감을 느끼지 못하는 상대 혹은 혐오하는 상대와는 섹스하기 힘들고, 그럴 필요도 없다. 또한 어느 상대와 어떤 섹스를 할 것인지, 어떤 성적인 취향을 가질 것인지는 순전히 인간의 자기선택에 달려있는 문제이다. 이 때 매춘의 예시를 들자면, 매춘하는 여성들은 그들 자신의 선택을 통해 돈과 성을 거래한다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그들이 화대를 받는 순간부터 성욕에 대한 자기선택권은 박탈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즉, 매춘은 돈과 성이 거래된다기보다는, 돈과 성적인 자기선택권이 거래된다고 보는 것이 일리가 있다.

ii) 대상성 : 배설욕, 수면욕 등의 욕구는 그 욕구가 지향하고자 하는 대상이 없다. 그나마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향해 식욕을 느끼는 경우가 있으므로 식욕은 여기서 제외되지만, 여기서는 극단적 상황에서의 욕구를 상정하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명유지를 위해 곰팡이빵이라도 먹어야하는 상황에서는 식욕도 넓은 범위에서 비대상성 욕구라 할 수 있다. 인간은 "무언가를 향해" 배설욕을 느끼거나 수면욕을 느끼지는 않는다. 이들 욕구는 대상이 없어도 저절로 느껴지는 욕구들이며 자연적으로 발현된다. 그러나 성욕의 경우 대상이 없으면 발현되지 않는다. 비현실적인 예를 들자면, 자기 이외의 다른 인간을 한번도 접해보지 못한 완전한 비사회인이 과연 성욕을 느낄 수 있을까? 성욕은 철저히 동종 내 자신과 다른 "타자"에 대한 인지와 그 타자와의 관계, 그 관계에서 비롯되는 호의적 감정을 기반으로 한다. 다시말해 성욕은 혼자서 자연발현될 수 없으며, 반드시 대상이 되는 존재(그게 옆집소녀든 연예인이든 여성전체든)가 있어야만 비로소 발현된다. 물론 이 대상성에 있어서도 성욕의 자기선택권이 주어지며, 따라서 인간은 자신이 선택한 대상에 대해서 성욕을 느낀다고 할 수 있다.

iii) 목적성 : 식욕, 배설욕, 수면욕은 생명유지 외에 다른 여타 목적을 갖지 않고, 그 자신이 목적이 될 수도 없다. 이 말인즉슨, 생명유지 이외에 자신이 추구하는 무언가를 하기 위해 먹고 싸고 자는 일은 없고(다시말해 그냥 먹고 그냥 싸고 그냥 자는 것), 먹기 위해 싸기 위해 자기 위해 사는 삶 또한 없다는 것이다. 잘 먹고 잘 싸자는 혹자들의 모토 또한 "잘 살자"는 것이 목적이지, 잘 먹고 잘 싸는 그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이들 욕구는 별수없이 해야만 하는 생물학적 의무일뿐, 개별 인간이 추구하는 목적은 아니다. 그러나 성욕은 개개인별로 무한하고 복합적인 목적을 지니며, 그 자체로서도 목적이 될 수 있다. 성욕의 목적에는 가장 대표적으로 쾌락의 획책, 상대방과의 애정확인, 종족번식 등이 있는데, 이들은 단 한가지의 목적으로 나타나기보다는 여러 목적이 복합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례로, 원나잇 옹호론자들이 "쾌락 목적으로서의 섹스"만을 강조하지만, 그들 자신의 파트너에 대해 일말의 애정욕을 느끼지 않는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들 자신도 어떤 호감도 갖지못할 상대와 하룻밤을 같이 하진 않기 때문이다. 위에서 살펴본 성욕의 대상성 측면에서, 성욕은 애초에 자신이 선택한 대상에 대해 느끼는 욕구이기 때문에, 애정욕이 없는 순수한 쾌락목적의 섹스는 있을 수 없다. 또한 사회적으로 바람직하게 여겨지지는 않지만, 섹스 자체가 인생의 목적이 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게 있다.

따라서 일부(가 아니라 내가 보기엔 거의 전부) 원나잇 옹호론자들이 펼치는 논리 중 하나인 "먹고 싶으면 먹고, 싸고 싶으면 싸는 것이 나쁘지 않듯, 섹스하고 싶을때 섹스하는 것이 뭐가 어떠냐?"는 말에는 동의하기가 힘들다. 성욕을 여타 식욕, 배설욕 등과 동등선상에 놓는다는 것은 자기선택권, 대상성, 목적성을 크게 위배하는 짓인데,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나는 내 성욕해소 여부와 성욕해소 양식에 있어서 어떠한 선택권도 없는 창녀 혹은 창남이자, 성욕을 느끼는 대상을 가리지않는 강간마이며, 섹스가 나의 삶에서 갖는 의미와 영향력에 대해서는 일절 생각해본 적이 없는 무뢰한이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설령 원나잇을 옹호한다하여도, 성욕을 여타 다른 욕구들과 동등선상에 놓는 것은 애초에 전제부터 잘못된 것이므로 차라리 다른 근거를 대라는 것이다. 물론 이 글의 논지 자체가 성욕은 다른 여타 욕구와 동등시될 수 없다는 것이고 원나잇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나는 원나잇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은 아니다. 원나잇은 섹스가 인간에게 지녀왔던 심리학적, 생물학적, 더 나아가 역사적인 의미는 모두 무시하고, 단순히 "쾌락"이라는 단일가치를 추구하는 행위로 간주한다. 이들은 섹스가 다른 여타 목적이 아닌 "쾌락"만을 목적하기에 원나잇이 합리적이라고 하지만, 위에서 설명했듯 애초에 성욕의 목적은 쾌락뿐만이 될 수가 없고, 그걸 떠나서라도 섹스의 목적을 쾌락에만 국한하는 것은 원나잇 옹호론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섹스를 천박하고 무의미한 행위로 전락시킨다. 그들이 공공연히 성욕이라는 것을 "당당히 드러내야할 욕구"라고 외치는 것과는 사뭇 모순된 이야기인데다가, 섹스 자체에 대한 모독이기도 하다. 또한 언뜻 보면 원나잇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 듯한 자기선택권은 상대방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아닌 단순히 하룻밤만을 보내기 위한 상대를 찾는 단기적이고 단편적인 범위 안에서만 행사되며, 이를 "성적인 자기결정권 극대화"라고 포장하는 데에는 어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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