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10여년 전만 해도 영어과목은 초등 고학년이 되어서나부터 시작했었고, 영어의 중요성이 그다지 부각되지 않았다. 우리 지역이 교육수준이 높지않은것도 한몫했겠지만, 중고등학생이 토익 시험을 치면 점수를 불문하고 어지간히 공부를 잘하는구나 아니면 외국에서 살다왔다보다고 생각했었다. 영어가 중요하다고는해도 여전히 막연한 중요성 그이상 그이하도 아니었고, 외려 영어란 "잘사는집 아이들"의 전유물이고, 평범한 가정의 수재들은 수학과 과학에 집중하고 있었다.

어느순간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영어는 한국의 준공용어화되었다. 대학 강의의 상당수가 수업과 시험을 모두 영어로 진행하는 영강으로 개설되었고, 심지어 국어강의마저도 텍스트는 영어를 쓰는(특히 대다수의 사회과학 과목들은 서양에서 비롯되었기에) 것이 익숙해졌다. 그것도 영강을 의무적으로 몇학점 이상 이수해야한다는 졸업기준까지 생겨나면서 영어 독해와 청해 수준이 일정정도 이상 되지 않으면 수업을 듣는것조차도 불가능, 쓰기와 말하기가 되지않으면 시험답안지를 쓰거나 발표를 하는것도 힘겨워졌다. 분명 이 수준은 대학수학능력시험 외국어 영역이 요구하는 바를 넘어서는 것이다. 대학이란 전공과목을 심화하여 배우는 곳(요즘 대학이 취업사관학교인 사실을 무시한다면...)이므로 어느정도 글로벌한 마음가짐과 테크닉을 갖는것은 그리 나쁜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교수들도 영미권에서 학위를 받은 교수가 아니면 영강진행에 있어서 상당히 힘겨워하며, 학생들이 힘든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국어강의로 하면 훨씬 심화하여 배울수있는 기회를 영강이 모두 뺏어간다. 수준낮고 깊이없는 영강이 대학 영강의 현주소다. 심지어 영어로 강의를 진행하다가 도저히 교수의 회화실력으로 감당하기 힘든 부분에서는 한국어로 진행하기도한다. 이건 교수의 잘못 아니다. 물론 뭐든지 잘하는거야 좋은거지만,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또 경제학과 교수가 반드시 영어회화까지 잘해야할 필요는 없지않은가. 정작 한국인들에게 한국말로 발표하라고해도 덜덜 떨리듯, 영어로, 그것도 수업을 진행한다는것은 상당한 수준의 회화실력을 요구한다. 자기 전공에 전력을 다해도 모자랄 판에 상당수준의 영어실력까지 배양해야하는 것이다.

그뿐이랴. 초등 수준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것은 물론이요, 이제는 영어유치원, 영어학원, 심지어 교회 유치부에서는 예배를 영어로 진행하며, 영어 어린이집까지 생겨났다. 도대체 한국말도 제대로 하지못하는 아이들이 어찌 영어까지 2개국어를 한단말인가? 간혹 유럽의 어느국가는, 저느국가는 하며 들먹이는 사람이 있는데, 참고로 걔네들은 최소한 모국어가 영어와 같은 라틴어계이기나 하다. 즉, 글자시스템이나 문법시스템이 한국-영어 관계만큼 멀지는 않다는 것이다. 가령 영어와 스페인어는 대체적으로 상이한 점도 많지만 단어의 어원 등 유사한 점이 더 많다. 영어-한국어가 서울부산 거리라면, 유럽언어와 영어는 길어봤자 서울수원 거리 정도다. 타 유럽어를 배우면 영어도 곧잘 배우고, 영어를 배우면 타 유럽어를 잘하는게 바로 이 이유에서다. 최소한 알파벳 쓰는건 똑같지않은가? 어릴때 외국어를 배워야 효과가 있다는것은 이런 케이스의 이야기지, 영어와 공유하는 속성이 거의 전무한 한국의 케이스가 아니다. 모국어 베이스가 똑바로 되지않으면 나중에는 영어도 못하고 한국어도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는데, 이 경우가 실제로 매우 많다는 것이다.

부모들이 명심해야할건 그들의 아이가 천재가 아니라는거다. 천재가 아닌이상, 모국어와 다른 외국어를 배우면 그 사고회로는 모국어로 우선 생각하고 이를 외국어로 해석하는 2단계로 나누어진다. 가령 Apple이라고 하면 원어민들은 바로 먹는 사과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한국인들은 "사과"라는 단어를 떠올린 다음에서야 사과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이게 너무 쉬운 예제인가? 그렇다면 Pneumonia라는 단어는 어떠한가? 이걸 보고 바로 폐에 염증이 생겼다는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는가? 즉, 한국어로 인식하고 사고하면 1단계로 끝날 사고회로가, 불필요하게 2단계로 나뉘게되면 그만큼 사고의 낭비인 셈이다. 영어 텍스트를 읽으면, 기본적인 내용이 이해가 가지 않아서가 아니라, 영어 문장 자체를 해석하기 힘들어서 난관에 부딪힐 때도 많다. 가끔 한국말을 쓰면서도 영어단어를 쓰는 사람들 있지않은가? 그건 유식한게 아니다. 굳이 영어단어를 차용하지않아도 한국말로도 충분히 소통할수 있는 단어(가령 워크숍이나 컨퍼런스는 회의라고 해도 충분히 알아듣는다)를 영어 그대로 쓴다는것은 그만큼 모국어 어휘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아예 영어로 하려면 영어로 하고, 한국어로 하려면 한국어로 하든가, 이게 제대로 안돼서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쓰는것은 자기가 많이 배웠다는 방증이 아니라, 영어를 모국어로 제대로 옮길줄도 모르는 돌대가리라는 방증일 뿐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건 한글은 과학적이고 뭐시기하는 민족주의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다. 분명 영어는 세계공용어이고, 영어 잘해서 나쁠건 하나도 없다. 그러나 영어를 신봉함으로 인해서 우리 사회는 얼마나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있는가? 강단에 서는 교수들이 그들의 전공지식이 아닌 영어실력으로 강의력을 평가받고, 아이들은 모국어를 제대로 알기도 전에 영어를 배워 영어도 한국어도 이상한 문장이나 써대고, 교과서를 읽으면서도 바로바로 원하는 정보를 얻지 못하고 인식-해석-인지라는 사고의 낭비적 사이클이 계속되고 있다. 영어는 모국어 베이스가 충분히 쌓인뒤에 해도 늦지않다.

부모를 뭐라할 것도 없는것이, 대학이, 기업이, 사회가 자꾸만 영어를 요구한다. 그러나 영어가 경쟁력이 될수없음을 단한마디로 축약하고자한다. 영어는 아무리 국내에서 공부해봤자 외국에서 나고자란 사람에 비할바가 못되며, 외국에서 나고자라 영어를 높은 수준으로 구사한다고해서 사고력이 그만큼 높은것도 절대로 아니다. 영어는 단순한 도구일 뿐이다. 조각의 조 자도 모르는 사람에게 최고급 조각칼을 주면 뭐하나? 문맹에게 순금 만년필을 쥐어주면 뭐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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