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제에 대해서는 그다지 과학적일 것도 없다. 몇몇 혈기왕성한 계몽주의자들은 과학의 잣대를 들이밀며 종교 대 과학의 전쟁구도를 보이고는 하는데, 이는 그들이 원하는 신성모독임과 동시에 과학에 대한 모독이기도 하다. 수천년 인간 역사의 산물이자 이성의 총체인 과학을 기껏 종교를 비판하는 데에 써서야 되겠는가? 나는 종교와 똑같이 유형적인 신이 존재함을 전제하고 몇가지 사항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보려한다. 종교를 부정하는 데에 있어서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단계까지 갈 필요조차도 없다. 여기서 신이라는 존재는 전지전능하며,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세상을 이끌고자하는 경향성을 가진다고 전제한다.

1. 사디스트적 신
이 논의는 종교 레짐이 신의 가치관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다는 전제(신=종교레짐)와 신이 세상에 요구하는 일종의 고정된 선의 형태가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된다. 신이 인간을 창조한 근원적인 조물주라면, 인간이 갖고있는 자유의지 또한 신으로부터 주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때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은 신(혹은 종교레짐)이 어떠한 가치관을 선으로서 추구하며 이를 인간에게 강요한다고해도, 인간은 이 가치관을 부정하거나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신이 세계의 효율적인 경영가이고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를 원한다면, 애초부터 인간을 자유의지가 박탈된 존재, 그러니까 자신의 뜻을 거스르지도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지도 못하는 존재로 창조했어야한다. 그렇다면 신이 인간에게 구태여 자유의지를 부여해준 이유는 두가지로 좁혀진다. 첫째는 인간이 자신의 뜻에 따라 자신의 자유의지를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신적인 섭리에 굴종하는 삶을 살기 희망했기 때문이거나, 둘째는 극단적으로 생각하여 "신벌을 내릴 사람"을 만들어내기 위해서이다. 두 경우 모두, 신은 인간에게 불필요하게 자유의지를 부여해줌으로써 인간들이 갈등하고 고통받는 것을 즐기는 사디스트라는 말이 된다. 무엇보다도, 신의 모든 행위는 인간에게 있어서 유의미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 논의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인간 자신에게 있어서 무의미한 것이 된다. 따라서 모든 것에는 신의 뜻이 깃들어있다는 명제는 거짓이 된다. 따라서 사디스트 신을 숭배할 이유는 없어진다.

2. 전지전능하지 못한 신
1번 논의에서 계속하여 이렇게도 생각해볼 수 있다. 인간이 자유의지로서 신을 부정하고 신적 섭리에 반발할 수 있다는 그 자체로만도 인간존재가 신적존재에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신적존재는 인간존재가 자기자신을 부정하는 것을 금지시키지 못한다. 즉, 인간이 신에 대하여 인정투쟁을 벌일 수 있는 소지가 얼마든지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이 말이 곧 신과 인간은 평등한 존재라는 논리의 비약으로 이어지지는 않지만, 최소한 인간존재와 신적존재가 완전한 수직적 지배-종속 관계는 아니라는 것과, 신은 인간존재의 정신까지는 통제하지 못하므로 전지전능하지는 않다는 소결론 정도를 내는 데에는 충분하다. 전지전능하지 못한 신은 자신의 뜻대로 세상을 움직이지 못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수많은 인간들의 다양한 자유의지로 부정당할 것이며 배반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시한번 우리는 신을 믿지 않아도 될만한 이유가 생긴다.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는, 즉 전지전능하지 못한 존재를 인간존재의 상위관념으로 상정하고서 숭배하는 것은 허망한 일이기 때문이다.

3. 관조자적 신
이 논의는 종교 레짐이 신의 가치관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있다는 전제(신≠종교레짐)와 신이 세상에 요구하는 일종의 고정된 선의 형태는 없다는 전제에서 시작된다. 신은 세상에서 행해지는 선과 악(이 기준마저도 주관적이기는 하지만)을 단순히 관조만 할 뿐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조율하거나 자신의 뜻을 관철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즉 신적인 섭리의 존재가 없는 상황이다. 그것만으로도 인간존재가 신을 숭배해야할 이유가 사라지는 것이다. 선과 악의 기준으로 삼을 특정 신적 가치관이 부재한 상황에서 종교레짐은 단순히 자의적인 도그마를 확대재생산하는 집단일 뿐이고, 우리가 종교를 믿는 행위는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같은 인간으로 구성된 종교레짐 그 자체를 믿는 행위가 된다. 신은 그저 종교레짐의 바짓사장에 불과하며 종교레짐이 사회에서 군림할 수 있는 정당성만을 제공할 뿐이다.

4. 잘못 받아들여지는 신
이 논의는 종교 레짐이 신의 가치관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있다는 전제(신≠종교레짐)와 신이 세상에 요구하는 일종의 고정된 선의 형태가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된다. 3번 논의와의 차이점은 신 자신이 상정하는 신적 섭리가 분명 존재하긴 하지만, 종교레짐이 상정하는 신적 섭리와는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이 모순은 인간이 신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함으로 인해서 생겨난다. 이를테면 이 경우에는 인간존재가 아무리 신의 존재를 믿고 신적 가치관을 찾으려 노력한다고해도 영원히 그것에 도달할 수 없다. 고로 신을 숭배해봐야 별 쓸모가 없게된다. 또 한번 2번 논의에서와 같이, 인간은 신적 존재를 따르려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종교레짐이 자의적으로 생산해낸 인위적 도그마에 의존하게될 뿐이며, 또다시 인간은 신이 아닌 같은 인간을 믿게되는 상황에 빠진다.

5. 새로운 신
4번 논의에 이어 신적섭리가 향후에 밝혀진다고해도 문제점은 남아있다. 이제 1번 논의와 유사하게 된다. 철저히 인간세계에 맞게 구성된 현재의 선악 패러다임은 지금의 인간존재에게는 너무나도 당연시되는 것들인데, 만약 신적섭리가 이것과 다른 것으로 밝혀질, 그래서 우리의 선악의 기준과 상이할 가능성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이 때 인간은 현재까지 구축해온 선악의 패러다임을 버리고 새로 밝혀진 신적 섭리에 일치하도록 세상을 바꿀 유인이 있을까? 인간에게 유리한 것으로 인식되고있는 현재의 패러다임을 버리고 인간에게 불리할 수도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는 것은 무척이나 위험스러운 일이다. 혹은 밝혀진 신적 섭리가 인간의 가치관과 일치할 경우에도, 인간은 신에 대한 제대로된 인식 없이도 자신들만의 힘으로 선악의 패러다임을 구축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뜻이 되므로 구태여 새로이 신적 존재를 숭배할 필요가 없게 된다.

이따금씩 신이라는 존재는 인간의 직관으로 알수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난 그것이 인간이 신을 숭배해야하는 이유로 충분하다고는 생각하지않는다. 또한 신의 뜻이 얼마나 선하고 심오하든 인간이 감히 알수없는 것이라면 구태여 그것을 숭배할 필요도 없다. 나는 인간이 신을 믿지 "말아야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신을 믿을 필요가 있나?"하고 회의하는 것에 가깝다. 이를테면 무신론적인 종교이자 유신론적인 비종교이다. 신의 존재를 긍정한다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인간이 신을 숭배하고 자발적으로 종속되어야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신을 믿는다는 행위가 반드시 바람직하라는 법은 없으며, 신을 믿기 이전에 신적 존재에 대해 한번쯤 회의해보는 것이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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