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본래 역사 이야기-미소 냉전사 카테고리에 있던 글을 옮겨온 것으로, 해당 카테고리의 컨셉과 맞게 구어체로 작성되었습니다.


언제부터, 왜 나뉘었는가?

사실 이 문제가 베를린 장벽 건설부터 붕괴까지의 역사를 관통하는 가장 근본적인 사안이라고 생각해. 유럽에서 생각하기에 1차대전 때 독일이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2차대전까지의 짧은 시간동안 유럽을 제패할만한 군사강국으로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은, 독일을 통일된 그대로 놔두었기 때문이라는 인식이 있었지. 당장 양갈래로 찢어만놔도 독일의 국력은 단기간에 회복할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에서 사이좋게 반띵하여 관리하고 있는 편이 훨씬 안전할거라 생각했어.


2차대전이 독일의 패망으로 끝난 이후 독일은 네조각의 걸레쪼가리로 찢어졌는데, 서부독일 지역은 미국/영국/프랑스의 자유진영에게, 동부독일 지역은 소련이라는 공산진영에게 전리품으로 돌아갔지. 원래 베를린은 완연히 동부독일 지역으로, 누가봐도 공산진영이 가져가야할 몫이었지만 아무래도 그 국가를 대표하는 수도이다보니 자유진영도 베를린에 대한 권리를 주창하고 나섰고, 이에 따라 독일 본토도 동/서로, 동독에 있는 베를린도 동/서로 나뉘게 되는 희한한 현상이 발생하게 돼. 우리나라로 표현하자면 서울이 남서울, 북서울로 나뉘어 북서울은 북괴가 처먹고 남서울은 한국이 갖는 그런 형세가 된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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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이 전후 분할점령된 모습. 우측상단 빨갱이 부분이 소련진영이 가져간 동독지역이고, 그 한가운데에 있는 코딱지가 동/서베를린이다.)


자 위의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아무리 자유진영이 서베를린을 가져갔다한들, 서베를린으로 통할 수 있는 경로는 텔레포트를 하지않는 이상 공산진영인 동독을 거쳐가는 수밖에 없었지. 육로 아니면 항공로. 이걸 갖고 공산진영 측에서 자유진영-서베를린을 잇는 육로의 통행료를 바가지로 쳐받고, 뻑하면 베를린을 봉쇄하겠다 말겠다 하며 들었다놨다 했으니 애초에 베를린은 그냥 공산진영에 포함되었다면 더 나았을거라고 판단하는 이들도 있어. 사실 소련의 거두 스탈린과 흐루시초프조차도 이러한 베를린의 애매한 위치 때문에 자기들이 조금만 더 꼬장을 부린다면 자유진영이 베를린을 포기할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 그러나 수차례의 소련의 꼬장에도 불구하고 자유진영은 끝까지 베를린을 수호했어.


그런데 베를린 문제가 그리 간단한 것만은 아니었어. 바로 서베를린은 공산진영 내부에 있는 상징적인 "선전물"이었던 셈이지. 자 가만 생각을 해보자. 만약에 북한 한복판의 도시인 음 예를들면 "해주"가 반쪼가리로 쪼개져서 해주의 반을 우리가 통제할 수 있다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까? 아마 남한에 소속된 해주 지방은 고층건물들이 쫙쫙 올라가는 반면 북괴에 소속된 해주 지방은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만 득시글거리겠지. 남한의 해주지방을 바라보는 북괴 주민들의 마음은 어떨까? 바로 자신들의 시궁창같은 현실과 공산정권을 비판하게되고, 자유주의에 대한 끊임없는 열망을 갖게 되는거지. 자유진영이 서베를린을 놓지않은 것도 이러한 서베를린의 전초기지로서의 역할이었어.


마셜플랜과 서독의 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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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셜플랜을 통해 자유진영의 최전선 서독을 다시 일으킨 조지 C 마셜 장군)


아무튼 이래저래하여 독일과 베를린은 반띵되었고,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은 각자 먹은 독일지역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확고히할 필요가 있었어. 먼저 자유진영의 조지 C 마셜 장군은 서독을 경제적/군사적으로 재무장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되었지. 물론 나치 독일에 의해 탈탈 털린 역사가 있는 영국과 프랑스는 이에 강력하게 반대를 하고 나섰지만, 자유진영이 공산진영에 대해 대치하고 있는 최전방 지역이 바로 서독이라는 사실에는 이의가 없었어. 또 영국과 프랑스는 마셜의 유럽부흥계획인 마셜플랜의 예비수혜자였기 때문에 마냥 반대만 했다가는 미국이 완전히 등돌리는 사태까지 벌어질 수 있었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전범국가를 다시 재무장시킨다는 상상초월의 생각을 가능케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동독의 경우 소련권과 바로 붙어있었기 때문에 비상상황이 발생하면 소련이 바로바로 병력을 투사할 수가 있었어. 못해도 소련의 위성국가들이 가능했었지. 반면, 서유럽의 경우 소련이 서유럽을 침공하는 비상상황이 발생하게 된다면 (2차대전 이후 폭망한 상황으로서는) 미국의 지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는데, 미국이 대서양 건너 병력을 투사하는 동안 아마 소련의 전차부대가 먼저 서유럽을 점령할 가능성이 컸지. 그렇다고해서 서유럽에 무작정 미군기지를 설립할 수도 없었고. 마셜플랜의 본질은, 이러한 폭망한 상태의 서유럽이 미군 주전력이 상륙하는 동안 어느정도 자위력을 가질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서유럽을 부흥시킨 계획이야.

cf) 마셜플랜의 경제적 효과에 대해서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군사적 효용이 더 컸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마셜플랜을 통해 서독을 도와주는 것까지는 자유진영에서도 합의를 봤어. 이제 문제는 서베를린을 마셜플랜의 대상으로 볼것인가 말것인가의 문제였지. 서베를린이 공산진영 한복판에서 고정선전물 역할을 하기위해서도 자금이 필요했겠지? 이에 따라 서베를린도 마셜플랜의 대상으로 포함되었고, 서독은 미국의 지원을 받기 위한 통화개혁을 실시(1947)하였고, 이 통화개혁의 범위에 서베를린도 포함시켰지.


소련, 꼬장의 시작

이렇게 서독의 마셜플랜 수용이 확실시되자 당장 똥줄이 타는 건 다름아닌 소련이었지. 소련이 생각하기에 독일지역은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이 맞붙은 완충지대였어. 일단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동독에서 비상사태가 발생해도 소련은 병력을 투사하기가 쉬웠기 때문에 사실상 독일 문제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고 있었는데 어머나 18... 자신들과의 최전선을 자유진영에서 재무장시킬 계획을 착착 준비하고 있던 것이었지. 따라서 서독측의 통화개혁 이후 소련은 이에 반발, 1948년 3월 20일에 독일관리이사회를 탈퇴하고, 연합국 베를린통치기구에서도 손을 떼게 되었지. 이 뿐만 아니라 1948년 6월에는 베를린으로 출입하는 육로를 모두 봉쇄하기에 이르러. 이에 따라 서베를린의 240만명 시민은 완전히 고립되어 식료품조차도 구할 길이 없게 되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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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말했듯, 당시까지만 해도 소련은 자유진영이 서베를린을 얼마나 중시하는지 잘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고, 이렇게 베를린의 목을 죄는 것만으로도 손쉽게 베를린을 점령.. 까지는 못하더라도 미국의 서독 지원계획을 무마시킬 수 있을거라 생각했어. 그러나 자유진영의 근성은 여기까지가 아니었지. 미국을 비롯한 자유진영은 무려 11개월 간 서베를린에 공수작전을 시행해. 이때 공수된 것은 식료품뿐만 아니라 애들 먹는 초콜릿까지 포함될 정도였고, 그나마도 남아서 저장해둘 정도였다고하니 그 수송량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알겠지? 이로 인해 소련은 혀를 내두르며 베를린 봉쇄를 해제하게 돼. 이걸 계속 봉쇄했다가는 소련은 괜히 주눅만 들 뿐이었고, 대놓고 자유진영과 전쟁을 하기에는 아직까지 미국의 핵무기가 눈에 걸렸지(당시까지만도 소련은 핵무기 개발단계).


시간이 흘러가며 동서베를린은 사실상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망명하는 지름길로 전락하고 말았는데, 1950년대에 이르러 동독 이민자의 거의 50% 정도가 모두 베를린을 망명경로로 선택하였지. 비록 베를린 봉쇄에 한번 실패하긴 했지만 소련이 계속 베를린 문제를 안고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어. 이에 1958년 소련 흐루시초프는 "님들아 우리 이러지말고 서베를린 중립화합시다"하며 자유진영에게 제의했지. 그러나 자유진영은 이미 이전의 베를린 문제에 대한 기싸움에서 승리한 적이 있었고, 서베를린이 톡톡히 자유진영의 전초기지 역할을 해주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제의를 받아들일리가 없었어. 이렇게 다시 베를린 문제는 비화되기 시작했고, 급기야 1961년 동독정부가 베를린 장벽을 구축하여 동서베를린의 교통을 완전히 차단시키기에 이르러.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

1969년에 이르러서는 서독 사회민주당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공산진영 국가들과의 외교관계 정상화에 힘썼고, 이를 동방정책이라고 하는데, 사실 이는 겉보기와는 달리 슨상님의 핵볕정책과는 상당히 그 궤를 달리해. 핵볕정책이 북괴에 대한 퍼주기가 북괴의 문을 열어제낄 것이라는 망상적 사고방식에 근거한데 반해,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은 동독을 제외한 동구권 국가들과 연계하여 동독을 점점 고립시키려는 시도였지. 표면적으로는 이 시기 동서독이 서로를 별개의 국가로 인지하기 시작했지만, 깊숙히 파고들자면 미국이 중국에게 화해의 손을 내민것과 다름없었어. 미국이 중국에게 접근한 것은 소련을 고립시키기 위해, 서독이 동구권에 접근한 것은 바로 동독을 고립시키기 위함이었지. 브란트 총리는 이 공로로 71년에 노벨 평화상어디선가 많이 본듯하다까지 받아먹었고, 동서독의 관계는 70년대에 잠시 유화분위기에 이르러.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 시기까지 많은 일들이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사이에 벌어져왔고, 이 모든 부분을 서술하자면 사실 수십편의 연재 시리즈가 되어야할테지만, 여기서는 단순히 동서독 통일과정만 다루기로 했으니까 모두 건너뛰고 소련권이 서서히 몰락하는 시점으로 와보자.


1980년대 중반 집권한 소련의 고르바초프는 대외적으로는 "신사고", 대내적으로는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표방하며 사회주의의 개혁을 추진하고 있었어. 정확히 말하면 사회주의 자체를 종말시키자는 것이 아니라, 당시까지 문제가 되어왔던 소련 지도부의 부패와 무능, 소련권 경제와 사회의 경직화와 비효율화 등을 타파하자는 개혁이었지. 미국과의 군비경쟁은 심해져만 가는데, 계획경제체제의 비효율성으로서는 도저히 미국의 성장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었고, 동유럽 곳곳에서는 폭동과 혁명이 들끓었어. 89년에 이르러 대외적으로는 헝가리와 폴란드에서 자유민주주의 개혁을 요구하는 시위가 발생하였고, 소련연방 내부국가였던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야, 발트3국에서도 시위가 발생하는 등 소련은 대내외적으로 거의 공중분해될 지경에 이르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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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 사태가 도저히 손쓸수없는 지경까지 흘러가자 소련은 대외문제에 대해서 거의 손을 떼기 시작했어. 1988년 12월, 고르바초프는 UN연설에서 "모든 국가들이 선택의 자유를 갖게되는 것이 소망"된다는 말을 하며 동유럽이 각자 독자노선을 채택해도 좋다는 식으로 허용하지. 이 상황이 어느정도였냐면, 소련은 혁명진압에 지원을 해달라는 폴란드 공산당의 요청을 거절하였고, 오스트리아-헝가리 국경에서 누가 철조망을 절단하여 동독인들이 자유진영으로 도주하는 상황이 발생했지만 소련은 이에 방관적인 입장만 고수했지.


이에 더해 고르바초프는 소련 자신들의 살길부터 찾자는 정책의 일환으로 자유진영과 손잡게 되었는데, 이 중에는 서독도 포함이 되었어. 89년 6월, 고르바초프는 서독의 콜 수상과 회담하며 유럽에서의 다자공동체 형성과 군비축소를 의논하는데, 서독 콜 수상이 "야 근데 소련 너네가 유하게 나와도 동독 저새끼들이 눈에 쌍라이트 켜고 있는데 그게 소용이 있겠음?"하며 동독문제를 은근슬쩍 끼워넣었지. 이에 한낱 위성국가에 불과한 동독 때문에 개혁의 앞길을 망치고 싶지않던 고르바초프는 당시 동독의 호네커 수상에게 개혁개방 정책을 요구했어. 그러나 소련보다 동독의 경제상황이 낫다며 자부하던 호네커 수상은 이를 거절했고, 결과적으로 고르바초프는 호네커를 축출하고 크렌츠를 새로운 동독의 수상으로 취임시키지. 새로 부임한 크렌츠 동독 수상은 서독을 방문하고자 하는 모든 국민에게 비자를 발급하겠다고 선언했지.


재미있는 것은 이때부터야. 동독의 크렌츠 수상이 애초에 공약한 건 단순히 동독민들의 서독으로의 "여행자유화"였는데, 각국의 언론들이 이를 잘못 받아들여 베를린 장벽 자체를 없앤다는 소리로 와전이 된 것이었지. 당연히 이 와전된 소문을 듣게된 동서독 국민들은 베를린 장벽으로 몰려들었고, 각자 집에서 들고온 연장들로 베를린 장벽을 때려부수게 되었어. 이로써 냉전기의 산물이었던 베를린 장벽은 완전히 붕괴하게 되었지.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베를린 문제를 개성공단과 연계시켜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 과연 개성공단이 냉전기 서베를린과 같이 우리의 전초기지 역할을 할 수 있느냐, 또 우리가 북괴놈들의 농간에도 그렇까지 개성공단을 지켜내야할 가치가 있느냐는 거지. 나로서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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