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지막 황제>의 배경역사는 여기로 : http://aceferr.tistory.com/79
<마지막 황제> 줄거리
부의(중국명 푸이)는 청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이자, 만주국의 초대 그리고 마지막 황제 강덕제이다. 어찌됐든 두 나라의 마지막 황제였으니 영화 제목은 그 점을 상당히 잘 캐치하고 있는 셈이다. 부의는 선친황제 강서제의 사망으로 3살배기의 나이에 황제에 즉위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부의는 친모와 생이별을 하고 유모에게 의지하게 된다. 아직까지 엄마의 품이 그리운 부의는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나이 지긋한 신하들이 자신에게 엎드려 세 번 절을 하고, 자신의 투정에 환관들이 어쩔 줄 몰라하며, 친아버지조차도 자신에게 폐하를 붙이며 존대를 한다.
소년기의 부의는 이러한 황제대접을 당연하게 여기기 시작한다. 자신을 찾아온 친모와 동생에게 거들먹거림은 물론, 나이 지긋한 환관에게 생먹물을 마시라고 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부의의 망나니 황제짓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그의 동생으로 인해 담장 너머의 자금성 담벼락 너머의 세상을 훔쳐본 부의는 이미 바깥 세상에는 신해혁명으로 인해 대통령이라는 "진짜 황제"가 있고, 부의는 그저 답답할 정도로 담장이 둘러진 자금성 안에서만 황제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자금성 안의 모든 신하와 환관들이 자신을 황제 폐하라며 떠받들고 있지만 그뿐이었다. 실상 중국의 "새로운 황제"로 떠오른 공화정부가 기존의 황제인 자신을 자금성이라는 감옥 속에 유폐시킨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부의가 충분히 성장했다는 이유만으로 부의가 남모르게 연정을 품었던 유모마저도 부의의 곁을 떠나게 된다. 이제 자금성은 그저 부의의 눈과 귀를 막고 있는 담벼락이자 지긋지긋한 감옥일 뿐이었다.
청소년기의 부의는 영국인 레지널드 존스턴을 스승으로 모시며 바깥 세상의 문물에 접하게 된다. 신하들은 존스턴이 부의에게 바깥 세상에 대해 알려주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지만, 존스턴은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고 부의로 하여금 자금성 담장 밖의 중국에는 혁명이 일어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변발을 자르고 현대적인 문물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상기한다. 자금성 바깥의 세상은 변화와 혁명으로 바뀌어만 가는데 부의는 자기 혼자만 과거의 권위 속에 살고있음에 환멸을 느낀다. 그러나 부의는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다. 자금성의 문을 열라고 문지기들에게 소리치지만, 문지기들은 그저 황제의 눈치만 볼 뿐 문을 굳게 닫은채 말이 없다. 부의는 그저 황제라는 이름의 죄수에 불과했다.
결혼할 나이에 이른 부의는 완룽(효각민황후)이라는 황후와 문수라는 첩을 두게 된다. 이는 부의 자신이 고른 신부가 아닌 황실에서 정해준 신부였다. 황제 부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듯 했지만 결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자신이 세상에 나가지 못한다면 자기 자신이 자금성이라는 감옥을 개혁시켜 세상의 변화에 맞춰가겠다는 다짐을 했다. 완룽과 문수의 응원 속에 부의는 변발을 제손으로 자르고, 환관들에게 황실의 창고를 조사할 것을 명한다. 이는 부의가 구시대적인 권위 속에서 정체해있는 자신을 변화하는 세상의 보폭에 맞추어 바꾸어나가겠음을 선언하는 바였다. 그러나 환관들은 자신들이 황실의 창고를 횡령한 사실을 숨기기 위해 기어이 창고를 불태워버렸고, 부의는 환관들을 모두 쫓아내버린다. 부의의 자금성 개혁 결심은 결국 실패한 것이다.
부의의 일생일대 소원은 어느날 아주 갑작스럽게 성취된다. 그동안 자금성에서 탈출해보려고도 했고, 그도 안되자 개혁시켜보려고도 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부의는 공화주의 군벌의 쿠데타로 인해 하루아침에 자금성에서 쫓겨나게 된다. 부의는 평생을 자금성이란 감옥을 증오하며 살았지만, 막상 자의가 아닌 타의로서 자금성에서 쫓겨날 신세가 되자 두려워한다. 세상의 변화에 보폭을 맞추고자 했던 그였고 이제는 장성한 남성이었지만, 바깥 세상은 결국 녹록치 않음을 직감한다. 이 곳 바깥에서 결국 그는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이 장면은 부의가 3살의 나이로 친모와 생이별을 하는 장면과 평행한다. 부의가 황제에 즉위할 당시에는 생물적으로 어린 아이였고, 부의가 자금성에서 쫓겨나 바깥 세상과 직면할 당시에는 사회적으로 어린 아이였던 것이다.
그토록 바래왔던 탈출이었지만, 톈진으로 도피한 부의는 한량 노릇만 계속한다. 그가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수많은 금과 보석을 뿌리며 비싼 별장에 머무르는 사치 뿐이었다. 어린 시절 부의의 개혁의지에 응원을 보냈던 첩 문수는 사치나 일삼는 무기력한 부의에게 큰 실망을 느끼고 이혼을 요구하며 도망가버렸고, 국민당 정부에 의해 만주에 있는 선친들의 무덤이 도굴당했지만 부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자금성 탈출이라는 일생동안 바라고 바래왔던 소원이 (물론 바람직한 방향으로 성취된 것은 아니지만) 이루어졌음에도 부의는 답답함과 무력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는 또한번 자신의 손으로 세상에 나서보고자 한다. 바로 일본의 만주국 황제 자리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었다. 물론 만주국 황제는 결국 일본의 철저한 꼭두각시라는 것을 부의는 알고있었지만, 선조들의 무덤을 도굴한 중국에 대한 배신감과 계속되는 무력감에서 탈출하고자 부의는 그렇게 지긋지긋해하던 황제 자리에 제 발로 걸어들어간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부의는 허울좋은 만주국의 황제였을뿐, 그의 근위대는 총이나 칼로 무장하지도 않고 있었고,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감히 황제 앞에 칼을 차고 들어오는 일본인들의 요구에 사인하는 일 뿐이었다. 부의는 꽤나 적극적으로 만주국이 일본과 동등한 독립국임을 주창했지만, 만주국은 제국주의 일본이 세운 괴뢰국가에 불과했기에 아무도 그의 의견에 귀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부의의 황후 왕룽은 일본인들의 계략으로 아편에 중독되고, 부의의 운전기사와 정을 통하여 아이를 낳기에 이른다. 부의의 마지막 개혁의지는 이제 완전하고도 처참하게 박살났고, 그 옆에 마지막으로 남은 황후 왕룽마저도 떠나가게 되었다.
일본은 패망하고 부의는 전범으로 붙잡혀 전범교도소에서 10년을 복역한 뒤 정원사의 삶을 살게된다. 인간들에게 이용만 당해온 그의 입장으로서는 아무런 말없이 그의 정성대로 자라주는 식물들이야말로 진정한 위로였으리라.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전율을 일게한다. 부의는 자신의 집이었던 자금성에 "표를 끊고" 들어가 자신의 자리였던, 이제는 "출입금지인" 황좌에 앉으며 활짝 웃는 것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나로서의 나, 누군가의 누군가로서의 나
부의는 겉보기에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었지만 일생을 누군가에게 이용당한 삶을 살았다. 서태후는 자신의 권력을 내놓지 않기 위해 3살에 불과한 부의를 황제에 앉혔고(물론 부의가 황위에 오르자마자 서태후는 죽었으니 그 의도는 실패한 셈이지만), 신해혁명으로 새로 들어선 공화정부는 민심의 동요를 막으면서도 자신들의 혁명을 수행하기 위해 부의를 자금성에 유폐시켜버렸으며, 제국주의 일본은 만주 침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를 거수기일 뿐인 괴뢰황제로 세웠다. 그는 결코 자신을 가둔 세상이라는 감옥에 순응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자력으로 자금성의 울타리를 탈출하려 했고, 그것이 안되자 자금성을 개혁시켜보려고도 했으며, 비록 괴뢰황제이지만 만주국을 독립국으로 세워보고자 노력도 해보았다. 그러나 부의의 "만인지상의 자리"라는 것은 급변하는 사회의 물결 속에서 민중들이 점차 외면해가는 몰락하는 가치관일 뿐이었고, 허울좋은 빈껍데기인 "황제 부의"는 공화정부에게도, 일본에게도 철저히 정치적인 이용가치 그 이상 그 이하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일생을 누군가에게 이용당했다는 피해의식에 부의는 자신을 석방시켜주려는 전범교도소장의 호의에 "당신도 내가 유용하기 때문에 호의를 베푸는 것이다"라고 거절한다. 위 사진에 나온 대사 "유용하다는게 그렇게 싫은가?"는 이러한 부의의 비난에 대한 교도소장의 답변이다.
cf) 물론 실제역사에서도 부의가 일본으로부터 만주국을 독립시키려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부의는 일생을 황제로만 살아왔다. 모두가 그를 황제 부의로 떠받들어모셨지만, 아무도 그를 "인간 부의"로 대하지 않았다. 황제라는 미명하에 3살배기 아이가 친어머니와 생이별을 하는 상황을 만들었고, 한창 바깥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넘쳐날 청소년 부의의 눈과 귀를 높은 담장으로 틀어막았다. 자금성은 부의의 존재가치를 "황제"로 규정지은 울타리였다. 따라서 부의가 자금성에서 쫓겨나 처음으로 바깥 세상에 나왔을 때 사치를 부리며 방탕한 생활을 한 것도 이상하지 않다. 황제로서의 부의는 세상에 존재했지만, 어린아이로서의 부의, 혈기왕성한 청년으로서의 부의, 또 한 인간으로서의 부의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자금성에서 쫓겨난 부의는 난생 처음으로 "황제 부의"가 아닌 "인간 부의"로서 존재하게 되었다. 이제는 부의가 자금성 안에서나마 가져왔던 모든 권위(그의 생의 전부였을)가 사라지고, 동시에 그의 존재가치 또한 일시에 소멸해버렸다. 더이상 황제가 아니고, 더이상 권위도 없는 부의는 "인간 부의"로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새로 찾아야만 했던 것이다.
자신의 존재가치가 철저히 소멸된 상황에서 부의가 새로운 존재가치를 찾기 위해 만주국의 황제가 되려는 선택지는 실패적이었다. 그는 "인간 부의"로서의 존재가치가 아닌, 일생동안 자신이 회의감을 느껴왔던 "황제 부의"로서의 존재가치를 또다시 찾고자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자금성에서 벗어나고자 투쟁하는 부의를 응원했던 황후 완룽도 이내 부의의 이러한 어리석음을 보고 "당신은 장님이에요"라고 힐난한다. 결국 부의는 청의 황제였던 시절과 전혀 다를바가 없는 무력감을 느끼며 쓸쓸히 무너져버린다. "황제 부의"는 중국의 혁명세력에게, 일본에게, 교도소장에게 유용했지만, "인간 부의"는 어머니와 첩, 끝내는 자신의 황후까지 자신이 소중하게 여겼던 모든 것들을 상실하고 만다. "황제 부의"로서 자신이 가졌던 모든 것들은 더이상 황제가 아닌 부의에게는 남아있을 수 없었다.
cf) 부의의 첩 문수는 더이상 황제의 첩으로서의 자기가 아닌, "자기자신으로서의 자신"이 되기 위해 부의로부터 도망친다.
(강형구 作 개밥의 도토리 - 사이보그)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에 의하면, 의자는 앉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본질"이 우선되는 사물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와 다르다. 인간은 어떠한 목적을 갖고 태어난 것이 아닌, 살면서 자신의 "본질"을 결정해가는 존재이다. 아무런 인식 없이 자기자신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실존"이고, 삶을 살아가며 타자(他者)들을 만나고, 이 타자들을 인식하며 자기 자신을 만들어가는 것이 인간의 "본질"인 것이다. 따라서 "실존"은 "본질"에 앞서지만, 동시에 "실존"과 "본질"은 상호충돌한다. 인간이 타자와 교류하며 자신의 "본질"을 규정지어가면, 그만큼 자신의 "실존"은 붕괴된다. 이것이 사르트르가 "타자의 시선은 지옥"이라고 말한 이유이다. 영화 <마지막 황제>의 부의는 인간으로서 존재했다기보다는 사물로서 존재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는 "황제"라는 "본질"이 먼저 주어진 채로 태어났고, 그의 "실존적 가치"는 남들이 그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면서 훼손되어 갔다. 부의의 실존적 가치는 그의 본질에 의해 철저히 짓밟혔다. 여기서 실존적 가치란, 내가 위에서 상기한 "인간 부의"로서의 존재가치를 의미하는 바이다. 부의가 황제직에서 쫓겨나 자금성에서 나왔을 때에, 그는 본질도 잃었고 실존적 가치도 없게 되었다.
cf) 예를 들자면, 평소에 혼자 있을때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이 철수의 "실존"이라고 가정하자. 이때 갑자기 영희가 온다면, 철수는 노래를 멈출 것이다. 철수가 노래를 멈춘 상황은 영희를 만남으로 인해서 결정된 "본질"이고, 따라서 "본질"은 "실존"을 갉아먹는 것이다.
영화가 끝날무렵, 부의는 교도소에서 복역을 마치고 정원사로 일하고 있다. 천하를 호령할 수 있는 "황제"의 지위에서 나이든 일개 정원수로 전락했지만, 부의는 비로소 "인간 부의"로서의 존재가치를 찾을 수 있었다. 더이상 어떤 사람도 그를 이용하지 않았으며, 더이상 자신의 본질이 실존적 가치를 훼손하지도 않았다. 부의는 비록 만인지상의 자리에서 사회의 밑바닥 언저리까지 추락했지만, 이제야말로 그는 "황제 부의"라는, 평생간 자신을 옭죄어오던 굴레에서 벗어났다. 즉, 정원수 부의는 실존적 자유를 얻게된 것이다. "황제 부의"는 나라의 황제였을지언정 자신의 삶에서는 종이었지만, "정원수 부의"는 비록 나라에서는 낮은 지위일지라도 자신의 인생에서는 황제가 되었다. 영화 <마지막 황제>를 보고 존재가치와 실존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영화의 상당 부분을 놓쳤을런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 영화를 보고 이 글을 쓰면서 여러분과 내 자신에게 묻고싶다. 우리는 얼마나 "우리 자신"으로서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는 일생을 항상 사회가, 우리 주위가 우리를 규정지어준대로만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가? 결국 그러한 주위로부터의 규정은 감옥이다. 자신의 존재가치를 그 울타리 안에만 가둬놓는 것이다. 그러한 울타리와 감옥 속에서는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는 황제조차도 행복할 수 없다. 일개 정원수일지라도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순간에 인생은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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