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살아가며 끊임없이 자격지심을 느낀다. 자격지심은 외모, 능력, 부, 사랑 등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자산에 해당될 수 있으며, 이들은 적절한 정도에서 인간의 생명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반면, 치사량을 넘기는 순간 인간의 정신을 끊임없이 좀먹고 피폐하게 한다. 자존감이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리비도Libido의 본능이라면, 자격지심은 인간이 자기자신의 삶을 파괴하려는 타나토스Thanatos의 본능인 것이다. 한약재로 치면 부자(附子)와 같다. 소량의 부자는 양기를 돋우어 병약한 환자를 일으키게 하지만, 다량의 부자는 사약으로 쓰일 정도로 맹독성이다. 그러나 양을 마음껏 조절할 수 있는 부자와는 달리, 또 마음먹기에 따라 세계정복도 가능할 것처럼 말하는 너절한 자기계발서적들이 강조하는 바와는 달리, 인간은 자기자신의 정신에 대한 지배권이 그다지 크지 않으며, 자격지심 또한 인간이 제대로 통제할 수 없는(그야말로 치밀어오르는) 감정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자격지심이 야기한 수많은 범죄와, 수많은 자기파멸의 예시들을 수없이 늘어놓을 수 있을만큼 잘 알고 있다. 자격지심을 느끼지 않겠다고 다짐하여 자격지심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다면 인간의 사회생활은, 그리고 삶은 그다지 힘든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영화 <아마데우스>는 자격지심이 어떻게 자격지심의 대상과 종국적으로는 자기자신까지 파멸시키는지 잘 보여준다. 워낙 사운드트랙이 훌륭한 영화로 칭송받는만큼 하긴 죄다 모짜르트 곡을 썼으니 훌륭하지 않을수가... 음악 영화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은데, 음악은 단순히 이 영화가 드러내고자 하는 주제를 전달하는 수단 중 하나에 불과하다. 가령 이 영화가 작곡가 안토니오 살리에리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의 이야기가 아니고,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의 피겨스케이팅 이야기였어도 (실제로 그 둘이 서로 자격지심을 느끼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화의 주제의식을 전달하는 데에는 별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천재에 대한 이야기

 

 

이 세상은 천재라는 존재를 부정해가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광화문 교보문고에 수만권쯤은 족히 넘을 온갖 자기계발서적들은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고 노력만능주의를 강조하며 이 시대의 젊은이들을 꿈과 희망의 세계로 이끌어가고자 하지만, 미안하게도 천재는 똑똑히 실존한다. 가끔 1년만에 사법고시에 합격한 사람이 자신은 노력파라고 주장하거나, 수능만점자가 자신은 교과서와 학교수업 위주로만 공부했다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단지 (특히 한국)사회가 천재를 환영하기는커녕 지탄하고 평가절하하는 분위기를 피하기위한 것일뿐, 그들은 분명 천재가 맞다. 가령 축구라고는 처음 해보는 여섯살 난 아이들에게 축구공을 쥐어준다면, 대다수의 아이들이 손을 사용하는 것에만 익숙하여 공을 발로 가지고 노는 데에는 영 적응하지 못하지만, 어떤 아이들은 축구공을 만져보는 것조차도 처음인데 불구하고 제법 드리블과 트래핑을 수준급으로 하는 경우가 있다. 아이들에게 미술붓과 스케치북을 쥐어주어도 마찬가지의 현상이 나타날 것이며, 공부하는 책과 펜, 피아노를 쥐어주어도 결과는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것은 난생 처음인데도 불구하고 굉장한 기량을 뽐내는 천재는 분명 있다. 그들은 남들이 수년간 노력해야 겨우 터득할까말까 하는 것을 하루아침에 깨치는 경우도 있고, 평생을 그 직종에 종사한 사람도 얻지 못한 천부적인 재능(이를테면 절대음감)을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 수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천재들의 존재에 좌절하고 그들을 질시한다. 그들은 자기보호기제로써 자신의 노력이 그들의 천재성보다 더욱 가치있으며, 노력을 통해 그들의 천재성을 언젠가는 추월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모두 틀렸다. 절망적인 말이지만, 노력으로는 타고난 재능을 이길 수 없다. 아인슈타인의 이제는 상투적인 말이 되어버린 "천재란 99%의 노력과 1%의 영감"이라는 말은 애초에 99%의 노력이 아닌 1%의 영감을 강조하기 위한 말이었다. 이 말인즉슨 99%를 노력해도 그 1%의 영감(천재성)이 없으면 천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갖은 노력으로 잠시나마 천재를 앞지를 수는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왜 노력이라는 것이 "천재가 아닌 자"들의 전유물이라고만 생각할까? 왜 "천재가 아닌 자"들이 노력하는 동안 천재들은 놀기만 할거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범재(凡材)들이 일년을 노력하여 일보를 전진하는 동안, 천재들은 반년을 노력하여 삼보를 전진한다. 따라서 범재들은 천재를 따라잡기만 하는 데에도 수 배 이상의 노력을 기울여야하는데, 천재들이라고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범재라고 해서 노력하는 데에 투자되는 시간과 자본이 무한한 것도 아니니, 범재가 천재를 추월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천재의 존재를 직시하는 순간 범재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목표에 대해서 완전히 의지를 상실하게 되고, 그들의 마음 속에는 천재에 대한 무한한 자격지심이 발현된다. 범재들은 자신들의 각고의 노력이 천재들의 재능에 의해 말살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여 어떻게든 천재를 별볼일 없고 자신들이 마음만 먹으면 초월할 수 있는 존재로 평가절하한다. 그래야만 그들 자신의 존재와 노력이 유의미해진다고 믿는 것이다.

 

범재에 대한 이야기

 

 

그러나 실존하는 존재를 실존하지 않는다고 해봐야 하등 인생에 도움될 것도 없을뿐더러, 아무리 천재를 범재의 범주로 끌어내리려고 해도 천재가 범재로 치부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세상은 소수의 천재만이 존재가치를 가지며, 다수의 범재는 천재에 대한 자격지심에 굴복하고 희미해지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인가? 축구에는 1부리그와 2부리그가 있고, 1부리그 중에서도 상위권 팀이 있고 하위권 팀이 있다. 영국 프리미어 리그나 스페인 프리메라 리가의 정상팀에는 그야말로 공을 차면 골로 이어지는 괴수 공격수들과 도저히 막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사각지대로 들어오는 슈팅을 막아내는 괴수 골키퍼들이 있다. 마찬가지로 권투 경기에도 저게 고릴라인가 인간인가 싶을 정도의 선수들이 나오는 헤비급 체급도 있지만, 그보다 훨씬 인간같이 생긴 가벼운 선수들인 미들급 체급도 존재한다. 언뜻 보기에는 축구에서는 정상팀끼리의 경기가, 권투에서는 헤비급 선수끼리의 경기가 "빅 매치"로 불리우며 인기를 끄는 것 같지만, 정작 축구나 권투를 좋아하는 매니아들은 저평가된 유망주들이 많은 리그 하위권 팀의 경기나 파워는 부족하지만 테크니컬하고 가벼운 몸놀림을 자랑하는 미들급 경기를 즐겨보는 경우가 많다. 물론 하위권 팀은 홈경기가 아닌 이상 상위권 팀을 이길 확률은 거의 없고, 미들급 체급의 선수가 무제한 체급에 나가서 헤비급 선수를 상대로 승리할 확률은 거의 없다. 그렇다고해서 리그 정상팀이나 헤비급 선수들만이 축구팀이고 권투선수인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재미를 선사하고 그들만이 보일 수 있는 기량을 뽐낸다.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다지만, 굳이 이 글을 쓰는 데에 억지로 끼워맞추자면 천재가 그나마 (그 분야에 있어서는) 완벽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완벽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해도 결코 그것이 축복인 것은 아니다. 완벽하지 못한 자들은 완벽을 추구하고 범재들은 천재가 되고자하지만, 어느 것에 있어서 완벽하다는 것은 그 "어느 것"이 더이상 의미를 가질 수 없음을 뜻한다. 완벽과 완벽에 가까운 것은 존재할 수 있을런지 몰라도, 완벽 이상의 것은 세상에 존재할 수가 없다. 즉, 완벽 이상으로는 발전할 여지도, 창조할 여지도, 노력할 여지도, 성장할 여지도 없다. 인간의 성취욕은 완벽하지 못함에서 완벽함으로 향해가는 그 틈을 채워나가면서 얻어지는 대가이다. 이미 완벽하다면 그러한 성취욕은 얻어질 수가 없다. 따라서 천재들은 고독하다. 모두가 천재의 재능을 부러워하지만, 선두에 앞서나가는 천재들은 이미 완벽하기 때문에 그 이상의 완벽을 추구할 수 없거나, 혹은 아무도 개척하지 못한 새로운 완벽의 경지를 홀로 고독하게 개척해나가야 한다. 그런 점에 있어서 범재들에게는 발전할 기회, 창조할 기회, 노력할 기회, 성장할 기회가 주어진다. 그들이 완벽하지 않고, 그들이 최고가 아니고, 그들이 천재가 아니기에 그들에게만 주어질 수 있는 기회이다. 김연아를 천재라고는 하지만 유망주라고 부르지 않듯, 이미 경지에 도달한 천재를 유망주라고는 하지 않는다. 이는 세상이 더이상 그 완벽한 천재에게서 새로운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유망주는 오롯이 불완전한 범재만이 불리울 수 있는 칭호이며, 세상이 새로운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범재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완벽과 천재성에 대한 동경과 자격지심, 그리고 자기자신의 완벽하지 못함은 자신을 끊임없이 성장시킨다. 완벽하지 못함은 앞으로의 내 삶이 완벽으로 향해가는 그 틈을 채우는 의미로 풍요롭게 하는 축복이다. 완벽한 사람은 더이상 (그 분야에서) 살아있을 의미가 없다. 천재들은 처음에는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여 정점에 누구보다도 빠르게 도달하지만, 일단 정점에 도달하고나면 발전, 창조, 노력, 성장 등의 "그 분야에서 존재하는 의미"를 전혀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범재들은 정점에 도달하는 시간은 천재보다 몇배가 더 걸리거나 혹은 정점에 아예 도달하지조차 못할지언정, 그 분야에서 계속 존재하는, 또 존재해야만 하는 의미만큼은 너무나도 풍족하다. 정점에 이르지 못했기에 계속해야하는 것이다. 동시에 정점에 이르지 못했기에 그들은 발전할 수 있고, 창조할 수 있으며, 노력할 수 있고, 성장할 수 있다. 따라서 세상은 천재에 의해 발전하지만, 범재에 의해 그 의미가 부여된다. 천재뿐인 세상에는 발전은 있을지언정 더이상 살아갈 의미가 없다. 이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소수의 천재만큼 다수의 범재도 너무나 소중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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