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태엽오렌지> 줄거리

 

 

이 영화의 주인공이자 영화를 관통하는 나레이션의 주인공이기도 한 알렉스는 그야말로 사이코패스의 전형이다. 그는 그의 패거리인 피트, 조지, 팀과 함께 "폭력성"을 일깨우는 "코로바 밀크"를 마시며 술에 취한 취객을 구타하거나, 다른 패거리와 패싸움을 하거나, 한적한 곳의 민가에 들어가 여자를 겁탈하고 남자에게는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 흔한 악역들이 술이나 마약에 찌들어사는 것과는 달리 이 영화에서는 독특하게 폭력성의 근원을 우유로 표현하였는데, 이는 술/마약이 후천적인 악을 조장하는 이미지인 반면 우유라는 것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먹는 것으로, 알렉스에 투영된 악은 선천적이고 천부적인 악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알렉스는 폭력성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그러한 폭력성에서 일종의 쾌락을 찾는 인물이었는데, 이는 알렉스의 만행 장면들에서 심각하고 우중충한 음악이 아닌 익살스럽고 경쾌한 배경음악이 깔리는 것에서 짐작해볼 수 있다. 영화속 그의 모든 행동은 사회에 대한 반달리즘과 성적쾌락의 모습으로 나타나며, 타인들에게는 위선으로 포장된 인간들의 숨겨져있는 이면의 악을 의미한다. 다만 타인들과 알렉스가 다른 점이라면, 타인들은 이러한 파괴적 본성을 억누를 수 있는 반면, 알렉스는 그러한 능력이 없거나 혹은 그러한 능력이 있다해도 억누르지 않는다는 것일 뿐이다.

 

 

이 영화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부분은 상기 서술한 알렉스의 파괴적 본성 그 자체의 묘사, 둘째는 억제를 통한 본성의 억압, 셋째는 세뇌를 통한 본성의 억압이다. 온갖 악행을 일삼던 알렉스의 패거리들은 점차 알렉스의 독선에 환멸을 느껴 배신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고, 알렉스는 동료들의 함정에 빠져 농장 여주인을 살해한 혐의로 교도소에 수감된다. 교도소에 수감된 이후 2년동안 알렉스는 그의 예전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간다. 교목(교도소 내 목사)의 예배진행을 돕고 성경을 읽으며 겉으로는 성실한 모범수가 된 듯 했지만, 사실 억제의 시스템은 그의 본성을 억누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성경을 읽으면서도 가시면류관을 쓰고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를 채찍으로 구타하는 로마의 병사가 되는 상상을 했고, 성적쾌락에 대한 집착을 전혀 버리지 못했다. 교도소를 위시한 그를 구속하는 억제 매커니즘은 단순히 그의 신체를 구속하여 악행을 행하지 못하도록 한 것일뿐, 그의 내면에 뿌리박혀 있는 파괴적 본성을 변화시키는 데에는 어떠한 역할도 하지 못했다. 그러던 와중에 알렉스는, 2주동안 모종의 의학적 실험을 받으면 바로 출소시켜주는 정부의 "루도비코 프로그램"에 대해 듣게 되었고, 어찌됐든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던 그는 일말의 고민없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다.

 

 

"루도비코 프로그램"이라는 것은 범죄자로 하여금 범죄에 대한 생각만 해도 신체적인 고통을 느끼도록 세뇌하는, 정부가 주장하기로는 "교화" 프로그램이었다. 2주만 버티면 나머지 8년의 형이 모조리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알렉스는 처음에는 무슨 짓이든 못하겠느냐 싶었지만, 2주간의 루도비코 프로그램은 고문 그 자체였다. 이 프로그램에서 알렉스는 폭력과 섹스 등의 장면이 담긴 영화를 강제로 시청하며, 그러한 장면을 볼때마다 일종의 약물을 통해 고통을 느끼도록 세뇌당한다. 프로그램은 상당히 성공적이어서, 출소한 알렉스는 일전에 자신이 구타했던 취객에게 보복당하고, 부모가 자신을 버리고 하숙생을 들여 거의 양자로 삼고, 알렉스의 옛 패거리들은 이제 경찰이 되어 알렉스에게 당했던 괴롭힘에 대한 앙갚음을 했지만, 어떤 대응도 하지 못한다. 정부는 이러한 알렉스를 "치료"했다고 선포했지만, 실상 이 프로그램은 알렉스의 파괴적 본성을 아예 없앤 것이 아니라 단순히 신체적인 고통으로 억누른 "세뇌를 통한 본성의 억압"일 뿐이었다. 알렉스는 위축되고 괴로워했지만, 변하지는 않았다. 그는 우연히 자신의 패거리가 부인을 강간하고 남편은 불구로 만들었던 집에 찾아들어가게 되었고, 그곳 욕실에서 목욕을 하며 그 자신이 부인을 강간할 때 불렀던 노래를 그대로 부른다. 실로 세뇌를 통한 본성의 억압 또한 그의 본성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알렉스가 루도비코 프로그램에 참여함으로써 억제 매커니즘이 막을 내렸듯, 알렉스가 루도비코 프로그램으로 인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창문에서 뛰어내림으로써 여론은 알렉스를 동정, 결과적으로 세뇌 매커니즘도 끝장나버린다. 정부는 루도비코 프로그램에 대한 사과의 의미로 정부는 알렉스를 사회로 편입시켜줄 것을 약속하였고, 알렉스를 치료하여 더이상 세뇌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였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알렉스는 여인과 격렬한 섹스를 하는 상상을 하는데, 이것은 그의 본성은 여전히 한치도 변화하지 않았음을 상징하는 결말이다.

 

악에 대한 선택권 : 악의 비배제성과 악에 대한 경향성

 

 

<시계태엽오렌지>를 지엽적으로만 보자면 사회가 범죄자들에게 행하는 매커니즘, 즉 억제와 세뇌가 과연 그들의 재범을 줄이는 데에 효과가 있는가 정도의 주제가 나올만 하겠지만, 나는 알렉스라는 인물을 표면적으로만 해석하는 우를 범하고 싶지는 않다. 또한 알렉스라는 인물이 단순히 범죄자나 사이코패스와 같은 사회부적응자만을 의미한다고 해석하고 싶지도 않다. 알렉스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있는 파괴적 본성의 결정체이며, 단순히 영화의 주제의식을 보다 확실하게 전달하기 위해 캐릭터가 극단화되었을 뿐이다. 즉 우리는 누구나 알렉스일 수 있다. 누구나 살아가며 마음에 들지않는 사람을 폭행하거나 살인하는 상상을 하고, 누구나 매력적인 이성과의 섹스를 상상한다. 다만 범죄자와 일반인의 차이라면, 실제로 칼로 사람을 찌르고 겁탈을 하였는지, 아니면 마음속으로 그것을 상상만 했을 뿐인지의 차이일 뿐이다. 악행은 단순히 악의의 표출일 뿐이다. 악의라는 것은, 차가운 금속 칼날이 사람의 몸통을 실제로 헤짚고 들어가기 전에, 그 행위를 상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악행을 단 한번도 자행하지 않았던 인간은 있을지 몰라도, 악의를 단 한번도 가져보지 않았던 인간은 없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붙였던 부제처럼 악은 이처럼 모든 인간에게 평범하고도 보편적으로 존재한다. 인간은 인간의 내면에 산재해있는 선과 악을 조율할 수 있는 선택권만을 가질 수 있을 뿐이며, 인간존재의 대전제와 같은 악 자체를 없애는 것은, <시계태엽오렌지> 속 알렉스가 결말 장면에서까지 섹스를 상상한 것과 같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선과 악에 대한 선택권이라는 것은 그 폭이 좁혀진다. 상기 서술한 "악의 비배제성" 전제 하에서 선과 악에 대한 선택권이라는 것은 악을 완전히 배제하고 완전한 선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산재해있는 선을 어느 정도로 행하고, 산재해있는 악을 어느 정도로 억제할 것인지의 선택권으로 한정된다. 이때 과연 인간은 자의로써 악의를 악행으로 이어지지 않게 할 능력을 갖고 있는가? 여기서 "자의로써의 선택"이라는 것은 칸트의 정언명령에 따른 선택을 의미하는 것인데, 다른 어떠한 보상이나 처벌없이 선을 선이기 때문에 행하고 악을 악이기 때문에 행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과연 선에 대한 어떠한 보상도 없고, 악에 대한 어떠한 처벌도 없다면, 인간은 악을 무시하고 선을 선택할 유인이 있는가? 이것은 단순히 선행에 대한 당근과 악행에 대한 채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선을 행함으로써 느끼는 쾌락과 악을 행함으로써 느끼는 죄책감까지도 완전히 배제한 상태라면, 인간은 선을 선택하고 악을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잃었으면 잃었지 얻는 것이 없게된다. 선이라는 것을 인간이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타자를 위해 이익을 포기하는 것으로, 악이라는 것을 인간이 자신이 손해를 입지않거나 이익을 보기 위해 타자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라고 가정한다면, 완전히 자발적인 인간(선에 대한 어떠한 보상도, 악에 대한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는 완전한 자유인)은 악을 행했으면 행했지 자발적으로 선을 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선과 악에 대한 인간의 선택권은 다시 한번 그 범위가 좁혀지는데, 인간은 선보다는 악에 대한 경향성을 강하게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악에 대한 두 전제, "악의 비배제성"과 인간의 "악에 대한 경향성"은, 인간의 선과 악에 대한 선택권이 실상은 악에 대한 선택권과 다를바 없이 선의 비중이 낮을 수밖에 없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것은 통상적인 법과 도덕이라는 것이 어떠한 선을 행하라고 장려하기보다는 어떠한 악을 행하지말라고 금지하는 데에 치중해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사회와 국가가 생겨난 이유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를 극복하기 위함이었다는 홉스의 논의도 악에 대한 두 전제에 기반하고 있고, 형이상학적 철학계파에서 논하는 선에 관한 이데아론보다는 악을 막기위한 법전이 현실세계에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는 것도 바로 이 두 전제에 의한 것이다. <시계태엽오렌지>에서의 알렉스를 감옥에 가둔 것이 알렉스의 본성에는 아무런 효과가 없던 것과 루도비코 프로그램으로 세뇌시키는 것 또한 알렉스를 진정으로 선한 사람으로 변화시키지 못한 것은, 알렉스로 상징되는 인간 내면의 악이라는 것은 없앨수도 그 경향성을 비틀 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디까지나 인간의 악이라는 것은 여러가지 제도를 통한 보상과 처벌로써 억눌러 그것이 실체적인 행위(악행)으로 발전되지않게 하는 것이 최선이며, 인간은 그래서 완전무결하게 악하지 않은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영화의 메시지이다.

 

많은 사람들이 알렉스에 대한 정부의 조치, 즉 억제의 매커니즘과 세뇌의 매커니즘이 알렉스의 겉모습은 바꾸었을망정 본성은 바꾸지 못한 것으로 그려졌기 때문에 <시계태엽오렌지>가 실효성없는 무능한 법과 제도에 대한 비판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내 해석은 조금 다르다. 억제의 매커니즘이 사회가 범죄자들에게 부과하는 처벌이고, 세뇌의 매커니즘이 사회가 모든 구성원에게 부과하는 어떠한 도덕적인 교육을 상징한다고 가정한다면, 인간의 악한 본성은 처벌이나 교육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다만 억눌러지는 것이다. 그러나 악이라는 것은 없앨수도, 인간의 악에 대한 경향성을 비틀수도 없기 때문에, 도덕과 법 등의 외부적 기제를 통해 억누르기라도 해야한다는 것이 스탠리 큐브릭의 진짜 메시지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선에 대한 선택권 : 비악(非惡)과 선

 

 

첫번째 논의가 끝났으니 포커스를 조금 돌려보면, <시계태엽오렌지>는 선과 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 영화는 악(惡)과 비악(非惡)에 대한 이야기다. 선악을 흑백논리로 구분하는 통념과 달리 악을 행하지않는 것 그 자체가 선이라고 할 수는 없다. 엄밀한 의미에서 사람을 죽이지않는 것은 선인 것이 아니라 악이 아닐 뿐이다. 이 영화가 악과 비악의 구도라는 것은, 영화 속 어떤 인물도 선한 인물이라고 할 수 없음에서 알 수 있다. 일단 알렉스만 해도 악행에 대한 고통으로 인해 악행은 저지르지 않게 되었지만, 그렇다고해서 자신이 피해를 주었던 이들에게 찾아가 용서를 구하는 등의 선을 행하는 행위는 하지 않는다. 즉 알렉스는 선한 인물이 된 것이 아니라, (엄밀한 의미에서는 아니지만) 악하지 않은 인물이 되었을 뿐이다. 반대로 그 누구도 출소한 알렉스를 용서하지 않았으며, 그가 구타했던 노숙자, 그의 패거리, 그가 아내를 강간하고 불구로 만들었던 남자는 알렉스에게 복수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들 또한 선한 인물이 아니며, 오히려 악에 대해 악으로 복수한다. 하나의 작품에서 절대악이 존재한다면 그에 상응되는 존재로 절대선을 끼워넣는 것이 보통이라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애초에 악와 비악만을 제시하여 "선"이라는 것의 존재에 의문을 제시하는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다시 칸트의 논의를 빌려와 이번에는 "선"에 적용시켜본다면, 정언명령은 어떠한 이익이나 보상이 전제되지 않은 순수한 선과 도덕 그 자체를 의미한다. 가령 테레사 수녀와 같이 평생을 어려운 이와 함께 했다하더라도, 그 목적이 자신이 신적인 구원을 받기 위해서거나 혹은 남을 도와주는 데에서 느끼는 일종의 심리적 쾌락을 위한 희생이었다면 그것은 정언명령에 따르는 선이 아니다. 위에서 논의했듯 본성적인 악은 배제할 수 없다는 것과 인간이 악에 대한 경향성을 띤다는 것을 다시 한번 떠올려보면, 인간은 보상이 없는 상황에서 선을 행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칸트가 말하는 정언명령적인 선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정부는 알렉스로 하여금 악의를 가질 때마다 고통을 줌으로써 그를 악으로부터 억제할 수는 있지만 그의 악한 본성을 바꿀 수는 없었듯이, 더 나아가 정부가 알렉스로 하여금 선을 행할때마다 보상을 줌으로써 그가 선행을 행하게 했다해도 그것이 진정한 선이라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 처벌이 없다면 악을 행하지 않을 선택권이 인간에게 없듯, 보상이 없다면 선을 행할 선택권도 인간에게 없다. <시계태엽오렌지>는 선과 악에 대한 두 묘사를 통해, 인간은 선과 악에 대한 선택권을 거의 갖고있지 못함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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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선과 악이라는 것은 그 정의가 너무나 추상적이어서 이처럼 나누어 생각하기 부적합한 것일런지 모른다. 또한 "행동하는 위선이 침묵하는 선보다 낫다"는 혹자의 말처럼 칸트의 정언명령적인 선만이 선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렇지만 조금 뜬구름 잡는 소리같아도 인간이 순수하게 악으로부터 벗어나 선으로 향해갈 수 있는지에 대한 메시지를 그린 <시계태엽오렌지>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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