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어디에 올릴까 많이 고민을 했다. 영화감상문은 대체로 [그냥 이야기]란에 수록하려하였는데, 이 애니메이션들이 주는 교훈이 상당히 정치적인 것으로(혹은 내가 정치적이라고 받아들인 것으로), 내가 썼던 이전의 글들과, 쓸 앞으로의 글들과 상당한 연계가 있을 것 같아서 [정치 이야기]에 수록한다. 이 영화가 전달하는 주제와 내가 이 글에서 다룰 주제가 받아들이기에 따라 상당히 민감하고 위험한 주제이기 때문에, 읽지 않으려면 아예 읽지 않던가 아니면 제대로 끝까지 읽어 감독이 하고자하는 메세지를, 또 그 메세지를 해석한 나의 메세지를 조금이라도 오해없이 받아들이기를 당부한다.


<창> 2012, 연상호 감독



"빡세게 뛰고 화끈하게 즐기자"라는 모토의 정철민 병장은 간부들에게 인정을 받으며 한 분대를 이끌어가는 모범병사이다. 이러한 모범병사의 내무실에 관심병사인 홍영수 이병이 전입오게 된다. 모든 일에 어리버리할 뿐만 아니라, 소염기라는 단어 하나를 못외워 선임들을 답답하게 하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관등성명을 대는 홍영수 이병에게 정철민 병장은 불만을 갖게 되었고, 중대장의 주의와는 달리 홍영수를 자신의 방식으로 "빡세게" 교육하여 어느정도 모범적인 수준의 병사로 변모시킨다. 홍영수의 변화에 정철민은 자신의 자그마한 유토피아가 이뤄지는 것에 대해 보람을 느낀다.


우려하던 사건은 갑작스럽게 터지게 된다. 정철민의 분대는 전투준비태세(군장을 싸고 특정 장소로 이동하여 전투준비를 하는 군대의 훈련)에 검열나온 사단장에게 군장검사를 받게 되었는데, 분대장 정철민은 자신있게 분대장인 자신과 막내인 홍영수의 군장을 검사하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정철민의 예상과는 달리 홍영수 이병의 군장에서는 깔깔이 2개와 부풀린 비닐봉지 2개가 전부였다. 이에 정철민은 홍영수를 구타하고, 홍영수는 자살시도를 하게 된다. 이 애니메이션의 백미는 대대장은 정철민에게 유도심문을 하는 장면이다. 대대장의 "말 안들으면 꿀밤이라도 때러주지 그랬어"라는 질문에 정철민은 "가끔 그러기도 했지만..."이라는 자신의 구타를 인정하는 발언을 하게되었고, 이로 인해 정철민은 15일간 영창 입창이라는 징계를 받게 된다.


모든 군생활이 끝나고 제대하는 정철민에게 대대장이 하는 말은 아주 가관이었다. "홍영수 걔 내가 당번병으로 데리고있는데, 내가 미친다 미쳐"라는 대대장의 뻔뻔한 말에 정철민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대대장실을 나선다. 잡초를 뽑고 있는 홍영수에 대한 정철민의 마지막 시선은 곱지 않다. "너 많이 편하냐?"는 질문에 홍영수는 눈물을 글썽이며 소리친다. "예! 정철민 병장님과 함께 있었을 때보다 훨씬 더 편합니다!" 위병소로 향하는 정철민의 표정이 구겨지며 애니메이션은 막을 내린다.


<돼지의 왕> 2011, 연상호 감독



이야기는 회상 형식으로 진행된다. 경민과 종석은 학창시절 소위 "돼지"였다. 성적도 좋고 힘도 센 "개"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경민과 종석은 자신의 치부까지 희롱당하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종석은 이러한 부조리한 현실에 대하여 아득한 분노를 느끼고 있었지만, 경민은 자신의 성기를 희롱하는 "개"들에게 복종적인 미소를 흘리며 그들의 강함에 굴복했다. 이때 이들의 앞에 철이가 나타났다. 철이는 자신이 가진 힘을 통해 "개"들과 싸워나간다. 철이의 사상은 괴롭힘으로 얼룩진 경민과 종석의 학창시절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돼지"는 자신의 살이 찌는 것이 결국은 자신들을 잡아먹는 "개"들을 위한 것임을 모르고 그저 행복해한다. 힘을 가진 "개"들에게 대항하기 위해서 "돼지"들은 악해져야한다는 것이었다.


철이의 대안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다. 경민과 종석, 철이의 반에는 학업성적도 우수하고 소위 카리스마도 있는 전학생이 등장했고, 철이처럼 악해질 자신이 없었던 경민은 이 전학생에게 "개들의 세상"을 전복할 희망을 걸게 된다. 그러나 전학생 또한 "개"들의 힘에 굴복하고 부조리한 질서에 편입된다. 이로 인해 철이는 더없는 "돼지"들의 정신적 지주로서 자리매김한다. 철이는 경민과 종석이 감히 상상조차 하지못할 방법들로 "개"들을 굴복시키고, "돼지"들의 왕으로 등극한다.


철이는 단순히 "개"들을 힘으로 굴복시키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십년, 이십년이 지나서 "돼지"들에게는 트라우마가 되었던 이 부조리한 중학시절을 "개"들은 아름다웠던 추억이라고 회상할 것이고, 철이는 이를 가만둘 생각이 없었었다. 따라서 철이는 "개"들에게 복수할 가장 궁극적인 방안으로 그들의 눈 앞에서 자신이 잔인하게 자살하는 것을 계획한다. 그리고 "돼지"들은 그들의 왕의 바로 이 궁극적인 복수가 "개"들이 지배하는 질서를 무너뜨리는 시발점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돼지의 왕"은 어느순간 자신의 왕위를 포기한다. 철이는 점차 "개"들의 질서를 무너뜨리기보다는, 자신도 그 질서에 조용히 편입함으로써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 몰락한 왕은 "돼지"들과의 약속을 아예 깨뜨릴 수는 없어서, 경민과 종석에게 자신은 자살하는 척만 할테니 와서 말려달라는 부탁을 한다. 모름지기 왕이 그 역할을 포기한다면 경민과 종석 중 하나가 그 역할을 이어받아야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이 "돼지의 왕"이 될 자신은 없었다. 따라서 자살하는 척만 하던 철이를 실제로 난간에서 밀어 죽이기에 이른다.


재미있는 것은, 이 개와 돼지의 관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경민의 아버지는 성인노래방의 사장이었는데, 노래방도우미들을 구타하는 "개"의 입장이었다. 또한 성장한 종석은 사회에서는 대필작가로 사회에서 "개"에게 물어뜯기는 "돼지"이지만, 가정에서는 자신의 여자친구를 구타하는 "개"였다.


해석

두 애니메이션은 상당한 공통점을 갖고 있고, 그 메세지는 거의 동일하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돼지의 왕>의 핵심적인 메세지를 <창>이 짧게 담고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약자는 반드시 선한가? 약자는 반드시 옳고 정의로운가?


<창>의 배경이 된 군대와 <돼지의 왕>의 배경이 된 남자중학교는 약육강식의 사회, 자본주의 사회를 표현하기에 매우 알맞은 배경이다. 계급과 힘이 사회를 지배하며, 상대적으로 계급이 낮고 힘이 약한 자는 강자에게 굴복한다, 아니 굴복해야한다. 강자는 이러한 사회부조리를 십분 자신들의 지배 매커니즘으로 활용하여 약자를 유린하고 강압한다. 여기까지는 늘상 있는 이야기다. 그러나 과연 홍영수 이병과 경민과 종석을 착한 사마리아인으로 볼 수 있는가? 이들이 시스템에 굴복하는 이유는 그들의 준법정신이 뛰어나서도, 그들이 자비로워서도 아니고,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홍영수와 경민, 종석은 혁명가가 아닌 소시민일 뿐이다. 아득히 부조리에 대해 인식은 하면서도 그 부조리를 자신이 직접 타파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해 그들의 목적은 부조리한 사회의 개혁이 아니라, 그들의 삶이 좀더 편해지거나, 아니면 어디선가 슈퍼맨이 나타나서 그 현실을 대신 타파해주는 것이다. 그들이 직접 하는 것이라고는 그저 강자의 억압에 어색한 미소로 일관하는 것과 자신의 현실을 불평하는 것 뿐이다. 그렇게 태어난 자신의 못남을 비관하고, 강자의 입장을 비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강자를 부러워한다. 증오와 선망의 공존이다.

프롤레타리아의 증오와 선망

가진 자들에 대한 갖지 못한 자들의 증오는 대단하다. 이 증오는 물론 가진 자들이 실질적으로 갖지 못한 자를 억압하는 현실에서 비롯된 "실체로서의 증오"도 있지만, 그저 자신보다 가졌다는 이유 자체만으로도 증오하는 "추상적인 증오"도 있다. 어린이들이 읽는 동화에서도 이는 여실히 나타난다. 이야기 속의 악역인 놀부, 스크루지는 늘 부자다. 반면 주인공은 늘 선하고 가진 것이 없다. 이 말에 의심이 간다면, 과연 돈많은 사람이 이야기 속의 선한 역할로 나타난 사례가 몇개나 되는지 한번 떠올려 보라. 프란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의 말대로 자본주의가 사회주의와의 경쟁에서 승리하고 더이상 진보할 수 없는 궁극의 경제체제로 자리잡은 이 시대에도 여전히 못 가진 자의 가진 자에 대한 증오는 극심해졌으면 극심해졌지 덜 하지는 않다.


그러나 한편으로 갖지 못한 자는 항상 가진 자를 선망한다. 갖지 못한 자는 자신들이 속한 부조리한 사회에서 소소하게 자신들의 지위를 높여가며 언젠가는 그들 자신이 가진 자가 되기를 희망한다. 혹은 어디선가 영웅이 탄생하여 이 부조리한 사회에 한바탕 혁명을 일으켜주기를 원한다. 그럼으로해서 변화된 사회에서는 자신들이 강자의 역할로 올라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희망한다. 최소한 자신들이 강자가 되진 않더라도, 더이상 강자들에게 억압을 당하는 신세는 면할 수 있을 것이리라 희망한다. 사회의 가진 것 없는 자들은 자신들이 부자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소망할뿐, 돈이라는 개념이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도의적으로 따져보자. 어느 불평등한 사회에서 약자에 의해 혁명이 발생한다면, 혁명 이후에는 더이상 어떠한 형태로든 약자가 없어야 한다. 쉽게 설명하자면, 약자가 혁명을 일으키는 도의적인 이유는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데서 비롯되는 온갖 부조리들의 타파이고, 혁명이 일어난 이후의 사회에서는 이러한 부조리 자체가 없어야하기 때문에 더이상 강자-약자의 관계가 존속하지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따져보면, 혁명은 단순히 전시대의 약자가 현시대의 강자가 되고, 전시대의 강자가 현시대의 약자가 되는 주종관계의 변화에 불과하다. 약자들은 혁명으로 주도권을 잡은 이후 자신의 입맛대로 사회시스템을 바꾸고, 거꾸로 이전에 강자였던 자들에게 복수심 혹은 이기심으로 복수한다. 원래 부조리의 타파가 목적이었던 혁명은 어느샌가 강자와 약자 관계의 역전으로 변질된다.


마르크스의 한계점도 바로 여기서 나타난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의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착취를 비판하며 프롤레타리아의 혁명과 독재를 주장한다. 그렇다면 과연 부르주아는 반드시 악한 존재이고, 프롤레타리아는 반드시 선한 존재인가? 단순히 착취당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단순히 사회에서 약자라는 이유만으로 프롤레타리아가 사회를 독재해야하는 정당성을 지니는가? 프롤레타리아가 처음에는 자본주의 사회의 부조리 타파라는 거창한 슬로건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킨다면, 그 이후의 사회에서는 필연적으로 또다른 형태의 부르주아와 또다른 형태의 프롤레타리아가 나타난다. 또다른 지배-피지배 관계가 발생하고, 또다른 기득권이 탄생한다.


정반합이라는 변증법에 의거한 마르크스주의는 공산주의 체제를 더이상 반Anti-thesis(사회부조리)이 탄생할 수 없는 가장 합리적인 사회라고 주장한다. 이는 마르크스주의의 사상 자체와 모순이다.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는 지난시절 약자였던 프롤레타리아가 강자가 되고, 지난시절 강자였던 부르주아가 약자가 되는 역전현상에 불과하다. 이 역전현상에서는 다시금 강자-약자의 관계가 발생, 즉 또다른 반 현상Anti-thesis이 발생하기 마련이며, 마르크스주의가 부르짖는 모두가 평등한 공산주의 유토피아는 탄생할 수 없다.


혁명이란?

그렇다면 나는 혁명을 부정하는가? 위에까지만 읽는다면 약자도 강자와 다름없는 존재들이고, 혁명도 이들의 주종관계만 역전되는 것이므로 강자들의 약자들에 대한 지배는 정당하다는 뜻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기에 이 파트까지 읽어주었으면 한다. 이를 논의하기 전에 모든 문제는 어디서 비롯되는지에 대해 살펴보아야한다.


강자들의 약자들에 대한 지배, 또 약자들의 증오와 선망이라는 모순은 바로 이기심에서 비롯된다. 강자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견고히 하기 위함이라는 이기적인 이유 때문에 약자들을 유린하고 탄압하며, 약자들은 자신들이 강자-약자 관계의 부조리를 타파하는 것이 아닌 자신들이 강자로 올라서기 위한 이기적인 이유 때문에 사회를 비판한다. 누구 한쪽도 정의가 아니다. 다시말해, 힘을 가졌느냐 못가졌느냐만 다를뿐 결국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강자나 약자나 다름없다는 뜻이다. 문제는 누가 힘을 가졌고 그 힘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되어야하느냐가 아니라, 이렇게 모든 인간에게 내재된 본능적인 이기심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가 주창하는 혁명의 방향은 잘못되었다. 혁명은 약자가 지배하는 세상을 이룩하는 것이 아니라, 강자와 약자가 상호의 적대감과 이기심을 버리는 데서 출발한다. 상호 적대감과 이기심을 버린다는 것은, 강자와 약자의 관계가 모호해짐을 의미한다. 강자도 언제나 약자로 전락할 수 있고, 약자도 언제나 강자로 등극할 수 있다면 강자와 약자는 서로를 물고뜯지 않는다.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것은 곧 미래의 자신에 대한 억압이고, 약자가 강자를 비난하는 것은 곧 미래의 자신에 대한 비난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의 이기심은 미래의 자신에 대한 피해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이 고착화되면 사회는 유연화된다.


동적 평등론

그렇다면 사회의 유연화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이러한 맥락에서 출발하는 것이 바로 진보이고 좌파이다. 현재의 한국 좌파처럼 비이성적이고 무작위적인 가진 자들에 대한 적개심을 사회에 확산시키는 것이 아니라, 모름지기 제대로 된 좌파란 어떤 강자도 언젠가는 약자가 될 수 있고, 어떤 약자도 언젠가는 강자가 될 수 있게 사회를 유연화함으로써 "동적인 평등"을 추구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정적인 평등론"이다. 강자와 약자를 어느 한쪽에만 설정해놓고서는 약자가 강자가 된 이후에도 약자는 여전히 약자로 분류되어 배려받는다. 그러나 이는 실천불가능할 뿐 아니라, 진정한 평등이라고 할수조차 없다. 현대의 좌파는 "동적인 평등론"을 추구해야한다. 강자가 약자가 되고, 약자가 강자가 되는 동적인 사회환경을 전제하되, 그러한 동적인 사회환경에서 결국 총합적으로는 모두가 평등한 그런 사회를 꿈꾸어야 한다. 동적인 평등을 구축하기 위한 분야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대표적으로 공교육이 그렇고, 의료가 그렇고, 의식주가 그렇고, 상속제 폐지가 그렇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보장을 해주되, 고착화된 계급질서를 타파할 수 있는 환경을 꿈꿔야 한다.


그 누구도 자신이 아파서 성공의 길이 막혀버리는 경우는 없어야하며, 그 누구도 먹지 못하여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는 없어야한다. 반대로 그 누구도 부모를 잘만나 노력하지않고도 성공하는 경우는 없어야하고, 그 누구도 보다 많은 교육적 혜택을 받아 성공의 일로를 유지하는 경우는 없어야한다. "평등한" 귀속지위에서 자란 인간의 "불평등한" 성취지위를 통해 사회는 나아질 수 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