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간다 줄거리

자연의 소리를 녹음하는 상우(유지태 분)은 어느 눈이 오는 겨울 방송국 라디오 진행자인 은수(이영애 분)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렇지만 둘의 관계는 계절이 바뀌어 더위가 찾아오며 망가지게 된다. 헤어지자는 은수에게 상우는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묻고, 은수는 대답이 없다. 헤어짐에 집착과 미련을 버리지못하고 괴로워하다가, 은수의 허릴감싸안는 낯선 남자의 모습을 보고 이내 자신의 삶으로 돌아온다. 먼훗날 은수와 상우는 재회하게되고, 은수는 상우를 다시 붙잡고자한다. 그렇지만 은수와 상우는 결국 각자의 갈길을 가게된다.

 

비합리적 감정

어쩌면 인간이 느끼는 모든 감정 중 사랑이란것이 가장 목적성없는 감정인지 모른다. 정치학에서 인간은 자신의 영향력을 확보하고자하는 존재이고, 경영학에서 인간은 수익을 추구하는 존재이고, 경제학에서 인간은 효용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존재이다. 이 모든 학문에서 과연 사랑하는 사람이 어떤 목적으로 그런 감정을 가지게되는지 설명할 수 있는것이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누군가를 좋아하고, 그래서 행복하고, 그래서 언젠가는 이별하고, 그래서 힘들어하는가? 그러한 감정이 내삶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생각해본다면, 어쩌면 사랑이란 것은 결과론적으로(결과가 이별이라는 전제하에) 추억이라는 미명 아래 그 추억에 비례하는 커다란 상처를 주는 것뿐이 더 되겠는가싶다. 그렇다면 단순히 성욕 때문에 사랑을 한다는 말이 맞는건가?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또 그건 아니라고 할 것이다. 현대사회에서처럼 성욕을 자유롭게 충족시킬 수 있는 시공간적인 배경이 있었던가? 길거리와 인터넷상에는 일회성 만남과 일회성 사랑이 판을 치고, 하다못해 돈을 주고 성욕을 사고팔수있는 시대가 아닌가? 일회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나중에는 가슴속에 큰 상흔으로 남을 짓을 한다는건 어불성설이다. 왜 사랑하느냐에 대해서는 아무도 답을 할수가 없다. 그저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면 사랑이란 왜 그렇게 힘든걸까? 상투적인 표현 빌리자면, 사랑이 뭐길래 그렇게 힘든걸까? 애초에 사랑은 합리적이지 않다. 애초에 사랑하는 사람은 합리적인 Cost-Benefit 계산에 따라 사랑하지 않는다. 그 사랑으로 인해 내가 치루어야할 비용을 생각하지도 않고, 그 사랑으로 인해 내가 받을 이익도 생각지 않는다. 혹시나라도 비용과 이익이 있다손쳐도, 분명 사랑은 사랑할때나 이별하고나서 치루어야할 비용에 비해서 이익은 턱없이 모자라는 비합리적 의사결정이고, 합리적인 계산공식에 따르자면 사랑은 결국 손해만 보는 장사인 것이다. 그러니 합리성의 측면에서 도대체 사랑은 설명할수가 없는 것이다.

 

사랑에 합리적 잣대를 들이밀 수 없는 반증으로, 사랑이 합리적이라고 가정하고, 합리적인 두사람이 서로 사랑을 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합리적 두사람의 사랑은 정치학에서의 안보딜레마과 같을 것이다. 내가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이 상대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크다면 그것은 합리적인 관점에서는 나에게 손해이다. 만약 반대의 상황, 상대가 날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크다면, 그것은 나에게 이익이 된다. 그러나 나의 이익은 상대의 상대적인 손해를 의미하고, 상대는 이 손해를 복구하고자 한다. 예를들어, 내가 120만큼 상대를 사랑하는데, 상대는 나를 100만큼만 사랑한다면, 엄밀한 의미에서 나는 20만큼의 손해를 보는 것이고, 따라서 내가 상대방에 대한 20만큼의 사랑을 줄이거나 아니면 상대가 20만큼 나를 더 사랑하여 둘의 사랑이 똑같은 100 혹은 120을 이루게되길 원할 것이다. 즉, 내가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과 상대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정확히 균형을 이루어야 누구 하나가 손해본다는 마음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론이 실제 사랑에 적용이 되는가? 내가 상대를 120만큼 좋아하지만, 상대는 나를 100만큼밖에 사랑하지않는다해서 나의 사랑을 포기하는가? 내가 상대를 200만큼 사랑하는데, 상대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은 10도 안된다고해서 그사람을 사랑하지않는가? 전혀 그렇지가 않다. 그렇다면 짝사랑이란 있을수가 없게 되는것이다. 사랑이 합리적이라면, 내가 받는 사랑이 0에 가까운데 내가 어떤 연유로 그사람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가지겠는가? 사랑은 비합리적인 감정이기에 이러한 현상이 발생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비합리적 감정에 자꾸 합리적 잣대를 들이댄다. 원래 내가 상대를 120만큼 사랑해도, 상대가 날 10밖에 사랑하지 않을수 있는것이 사랑인데도, 거기서 본전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즉, 아 나는 저 사람에게 이토록이나 많은 사랑을 주고있는데, 왜 저 사람은 내게 눈길 한번 주지않을까? 하는 것이다. 애초에 서로가 사랑하는 정도가 균형을 이룰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상대를 사랑하는만큼 상대도 자신을 사랑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사랑이 이것이다, 아니다 사랑은 저것이다 하며 딱 집어서 규정할수는 없다. 그저 어떤 이끌림이다.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은 상대의 어떠어떠한 점을 사랑해야겠다고 결심을 하지않는다. 상대를 얼마나 사랑해야겠다고도 결심하지 않는다. 어느선에서 끝나야겠다고는 더더욱 결심하지 않는다. 그저 어느순간 그사람을 마주치고, 어느순간 그사람에게 이끌리는 것이다. 마치 멀리 떨어뜨려놓은 다른 극의 자석이 서로에게 이끌려가서 붙듯. 그런 종류의 이끌림은 인간의 자유의지로는 통제를 할수가 없다. 그렇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으로 인해 행복하고, 사랑으로 인해 불행하며 인간의 삶은 사랑이라는 것에 종속되는 것이다. 마치 김종서의 <아름다운 구속>처럼 그 감정에 구속당하고 굴복당하면서 행복을 느끼는 마조히즘적인 감정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별이 힘든 이유

사랑이란 얼마를 하든 참 많은 것을 남기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것이 선물이나 상대의 손길이 묻어있는 유형적인 것이든, 아니면 마음속에 깊이 간직되어있는 추억과 같이 무형적인 것이든 참으로 많은 것을 남긴다. 이별을 한 이들은 곧잘 이 유형적인 것들을 태우거나, 버리거나, 아니면 상대에게 돌려주기도 함으로써 자신의 주변에서 제거하려고 한다. 이들이 생각하는건, 그러한 유형적인 것을 버림으로써 자신의 무형적인 추억과 기억 또한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유형적인 것들은 불에 타없어지고, 찢어져버리고,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분쇄된다고해도 상대와 함께 했던 추억이나 상대의 입술감촉은 도대체가 없어지질않는다.

 

사랑했다가 이별하는 것이란 마치 칼이 내 복부를 찔렀다가 빠지는 기분이다. 찔리는 순간 헉하는 충격을 받았다가, 이내 그 칼의 차가움과 날카로움은 내속에서 따뜻해지고 어느샌가 내 몸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그렇게 나를 찔러들어온 칼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려는 순간 칼은 쑥하고 빠져버린다. 그리고는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나온다. 칼이 빠져나갈때의 그 고통과, 칼이 찌르고들어왔던 그 상흔이 비워지는 허망함, 그로인해 내 자신마저도 망가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살아갈수록 구멍투성이가 되어간다고들 한다. 사랑이 떠나갈때마다 마음에는 커다란 빈자리가 생기고 그 빈자리로 인해 사람은 고통받고, 때로 그 빈자리가 너무나 클때는 자신의 삶을 포기해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자연이 진공상태를 허락하지 못하여 기압이 높은 곳에서 기압이 낮은 곳으로 바람이 불듯이, 사람의 마음 또한 마찬가지로 시간이 흐르다보면 그 빈자리는 다른 무언가로, 어쩌면 다른 사랑으로도 채워진다. 그러나 아무리 마음속의 진공이 다른 무언가로 채워진다고해도, 도저히 "사랑했던 그사람"이 아니면 채울수가 없는, 영원한 진공 또한 존재한다. 그러한 영원한 진공들이 모여 사람의 마음은 구멍투성이가 되는 것이다.

 

영화로 돌아와서

극중의 상우는 위에 설명했듯, 비합리적 감정에 합리적 잣대를 들이댐으로써 고통받고 있다. 시작은 즉흥적이고 행복했겠지만, 점점 상우는 자신이 은수에게 주는 행복은 큼에도 불구하고 은수가 자신에게 주는 행복은 작다는 것을 깨닫는다. 은수는 상우의 청혼도 거절하였고, 자신의 연애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쉬쉬했으며, 상우를 자신에게 라면이나 끓여주는 사람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다. 상우는 은수의 사랑이 점점 식고있음을 너무나도 뻔히 알고있으면서도, 자신의 사랑을 포기하지 못한다. 그래서 집착을 했고, 그래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이별할때 상우는 은수에게 묻는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는지. 결국 자신만이 상대에게 유일무이한 특별한 존재가 아님을 알게되는 것이다. 어쩌면 은수에게는 사랑이 바뀌는 것은 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혼 경험이 있고, 상우를 버렸으며,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졌고, 극 마지막에 가서는 상우를 다시 찾았다. 나 또한 사랑이 영원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모든 사랑에는 끝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고, 그것은 굳이 상대의 돌아섬이 아니더라도 생로병사에 의해서도 올수있다. 개중에는 끝이 너무나도 분명한 사랑들도 분명 존재를 한다. 그렇다면 그렇게 끝이라는 게 존재하고, 그 끝에가서는 결국 상처밖에 남지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왜 사랑을 할까싶은 회의감도 들 것이다. 나는 다만 이렇게 말하고싶다. 그래, 언젠간 모든것에는 끝이란게 있을지 모르지만, 그 끝이 두려워서 사랑하지 않을 것이냐고. 결국 그 끝이라는 것은 언제 어느 형태로 날 찾아올지도 모른다. 내가 몸부림치고 발버둥쳐도 찾아올때가 되면 찾아오겠지. 어차피 끝이라는 것이 내 문을 두들기고 찾아올텐데, 끝이 나에게 먼저 오기전에 내가 먼저 끝에게 다가설 필요도 없는 것이다. 왜 굳이 자처해서 아직도 저멀리 있는 끝을 내게로 불러온단말인가?

 

영화에는 비록 나오지 않았지만 그런 이별을 겪은 상우는 점점 공허했던 마음의 진공상태를 어떤 형식으로든 채워나갔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잊어가는 도중에 은수는 상우에게 되돌아오고자한다. 상우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고가서는 그 상처들이 아물때즈음에 돌아와 옛 추억을 상기시키며 상우의 팔짱을 낀다. 내가 본 관점으로는 은수의 이러한 행동은 상우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은수는 그저 홀로 남겨지는 것을 원치않았을 뿐이다. 상우가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동안, 은수는 그저 상우가 자신의 곁에 있어주는 존재 그이상 그이하로도 생각지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만나자 떠나버렸고, 또 그 사람마저도 떠나버렸기에 다시 상우에게 돌아온 것이다. 상처를 치유해가는 상우에게 추억을 무기로 다시 접근한 것이다.

 

무튼 어떠한 결론이 나오는 영화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나는 은수의 행동이 잔인하고 이기적이기 짝이 없다는 생각을 하기에 앞서, 어쩌면 은수야말로 현실주의자가 아닐까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녀는 쉽게 사랑에 빠지고 쉽게 사랑을 잊는다. 사랑이라는 비합리적인 감정속에서 그녀는 가장 상처받지않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수많은 사랑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은수는 자기자신이 상처받지않도록 자기방어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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