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은 인간이 후회하지 않게 할 수 있을까?

물리학적으로는 열역학 제2법칙 혹은 엔트로피 법칙, 철학적으로는 인과율. 우리는 이 두가지 법칙에 지배받으며 살고있다. 그 법칙들이 전제하고 있는 것은 바로 시간의 단방향성이자 비가역성이다. 시간은 반드시 과거로부터 미래로 흘러가며, 이미 흘러간 시간은 돌이킬 수 없다. 그런고로 원인은 결과를 낳는다. 결과가 선행하고 원인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다. 그 때문에 우리는 수많은 선택지 중 "선택"을 강요받고, 선택을 강요받는 우리는 따라서 "후회"를 피할 수 없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부질없지만 "지금 정신 그대로 과거로 돌아간다면"이라는 전제를 자주 깔고는 한다. 만약 시간여행이 가능해진다면(즉 열역학 제2법칙과 인과율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 그래서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인생을 "수정"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사람들은 모두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을까? 지금의 인생을 살게한 자신들의 "잘못되었던" 선택을 배제하고 "좀더 나을 것 같은" 선택지를 다시 고름으로써, 내가 그때 선택하지 않았기에 지금에 와서 갈망하는 "좀더 나을 수도 있었던" 그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물론 새로운 선택지가 더 나은 삶을 보장해주는 것에 대한 확신이 없더라도 사람들은 아마 과거로 한번쯤 되돌아가고 싶어할 것이다. 지금과 다른 삶에 대한 호기심? 선망? 아니면 삶에 대한 지루함? 아니. 어쩌면 인생을 한번 살아봤기 때문에 갖게된 어떠한 자신감일지도 모른다. 한번 살아봤으니까 새로 살면 잘 살수 있을거란 것이다. 마치 인라인스케이트를 처음 타보았을 때는 줄곧 넘어지지만, 한번 더 타보면 감을 익혀 꽤나 익숙하게 타듯이 말이다.

 

허나 이것은 일면 모순된 갈망이다. 다른 선택지를 선택했다면 지금과는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었을 것이라 전제한다면, 그 "다른 인생"에서는 내가 겪게될 시련이나 행복의 유형은 지금의 인생과는 완전히 다를 것이며, 따라서 지금 인생을 살아본 경험은 그 인생에서 별로 도움이 되지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공부를 많이 하지않아 시간을 되돌려 공부를 열심히 하는 새 삶을 산다면, 공부를 하는 삶의 선택지들은 공부를 하지않았던 삶의 선택지와는 또 새로운 유형의 것들이다. 다시말해 우리가 새로운 선행(先行)선택지를 택하여 새 삶을 살아볼 기회가 주어진다고해도, 그 새 삶 또한 지금의 삶과 마찬가지로 한치앞도 내다볼 수 없을 것이므로 또다른 앞날모를 후행(後行)선택들을 해야만하며, 또다시 우리는 무언가에 대한 결과를 모르는 채로 선택하는 삶을 살고 또다시 후회하게 될 것이다. 단언컨대, 이러한 연유로 인하여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타임머신이 개발된다해도 인간은 영원히 후회스러운 삶을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 허망한 소리같고 원론적인 이야기 같은가? 그렇다면 확률론적으로 접근해보자. 과거를 뜯어고쳐 완전히 만족스러운 삶을 완성하고자한다면 인생에서 마주하는 모든 선택의 순간을 모조리 경험해보고나서, 그 중 더 나은 것을 선택해야만 하는데, 어디 그 선택의 순간이라는 것이 한두번으로 그치던가? 가령 우리가 일생을 사는동안 2가지의 선택지(Yes or No)만 있는 50번의 선택의 순간만을 맞이한다고만 쳐도, 경험해야만하는 인생의 경우의 수는 2의 50제곱, 즉 1126조여 가지가 나온다. 하나하나의 인생의 수명이 평균 70년이라면, 더 나은 삶을 찾기위해서 우리는 1126조 X 70년의 시간을 소비해야한다. 따라서 이 천문학적인 경우의 수를 모조리 경험해보기란 불가능하다. 내가 지금 과장하고 있는걸까? 미안하지만 현실인생은 훨씬 더할 것이다. 정말 줄이고줄여 간단화시킨게 이 정도지, 애초부터 두가지의 선택지만 존재하는 선택의 순간도 거의 없을뿐더러, 선택의 순간만 해도 나비효과를 고려하여 내가 오늘 저녁 손을 씻고잘 것인지 씻지않고 잘 것인지 따위까지 빠짐없이 고려하자면 경우의 수는 점차로 무한으로 발산한다. 만약 수많은 인생 모습의 확률변수를 행복도로 상정하고, 이 각각 인생들의 행복도가 정규분포를 따른다고 가정해보자. 위 그래프에서 A점을 지금의 인생, B점을 내가 살고자하는 인생이라고 치자. 행복도가 높은 인생일수록 그게 얻어걸릴 확률은 대폭 줄어든다. 무한한 선택의 갈림길에서 내가 원하는 완벽한 인생상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은 그저 얻어걸리는 것 뿐인데, 그 얻어걸릴 확률마저도 그다지 높지않다.

 

읽으면서 느꼈겠지만, 바로 위에 내가 쓴 확률론적 접근은 일면 과학적으로 보이긴 하겠지만 순전한 개소리일 뿐이다. 아무도 이 접근법에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이를테면 누군가에게 있어서 진정한 사랑을 하는 것보다 원하던 대학에 가는 것이 더 행복하고, 원하던 대학에 가는 것보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더 행복하다면, 이것이 반드시 그에게 있어서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진정한 사랑을 하는 것보다 행복하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즉, A < B이고 B < C이므로 A < C인 것이 성립되는가? 인간이 행복을 느끼는 것은 그렇게 논리적이지 않다. 애초부터 인간의 행복이라는 것은 어느 것이 크고작다는 수치로 나타낼 수도 없는 개념이거니와, 각 인생에는 저마다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반박할지도 모른다. 그래 그거다. 그게 내가, 그리고 이 영화가 말하고자하는 메시지다. 저렇게 인생을 수치화시키고 계량화시켜 어떤 인생이 더 행복하고 덜 행복한지 가늠하는 것은, 지금 내가 살고있는 이 인생조차도 무한하게 많은 경우의 수들 중 하나로 취급하여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시킨다.

 

선택에 관한 이야기

 

 

행복을 수치로 계산할 수 없다는 또하나의 근거는 여기에 있다. 만약 행복도를 수치로 나타낼 수 있고, A선택지를 선택하면 100만큼의 행복을, B선택지를 선택하면 80만큼의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사람들은 A선택지를 선택함으로써 자신들이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문제는, 각 선택지에서의 행복도는 완전히 겹친 사건에 대한 행복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가령 A선택지의 100만큼의 행복이 사회적인 성공으로 인한 행복이고, B선택지의 80만큼의 행복이 평화로운 삶으로 인한 행복이라면, 어느 선택지를 선택하건 자기가 선택하지 않은 선택지에 대해 선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겉보기에는 사회적인 성공의 행복도가 더 크지만 치열하고 바쁘게 사는 와중에 평화로운 삶이 그립지 않을리가 없고,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는 사람은 사회적인 성공을 이따금씩 갈망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결혼에 대한 선택지 또한 마찬가지다. 독신으로 사는 것이 자신에게 더 큰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 확신하는 사람조차도 결혼하는 인생에 대한 일말의 호기심과 선망을 버릴 수는 없고, 그래서 어느 정도는 후회하게 된다. 흔히 결혼에 대해 하는 말인 "해도 후회, 안해도 후회"는 바로 이러한 점에서 기인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대개의 경우 어떤 선택지도 다른 선택지보다 절대적으로 우월하다고 할 수는 없으며, 다만 그 양식이 다르다는 이유로 우리는 겪어보지 못한 쪽의 행복이 더 클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따라서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삶과 개인적으로 평화로운 삶을 모두 살아본다면, 또 독신으로서의 삶과 결혼하는 삶을 모두 살아본다면, 우리가 알량한 후회 따위로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해 선망할 때와는 달리 어느 쪽이 절대적으로 더 우위인지 말하기가 더 힘들어진다. 어느 선택이든 그 나름대로의 행복과, 그 나름대로의 후회와, 그 나름대로의 의미를 갖고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가 어떠한 선택에 관련하여 갖는 자신감, 즉 어떤 선택을 하면 행복할 것이고 어떤 선택을 하면 불행할 것이라는 생각은 외려 오만함에 가깝다. 가령 영화 첫 부분에는 "비둘기 심리이론"이라는 것이 나온다. 만약 비둘기가 날개를 퍼덕일 때마다 새장에 먹이를 넣어준다면, 비둘기는 자신이 날개를 퍼덕여야만 먹이가 나온다고 생각하게된다. 허나 그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실험자(비둘기에게 있어서는 신적 존재인)의 의도에 달린 것이다. 날개를 퍼덕일 때가 아니라 버튼을 눌러야만 먹이가 나오게 할 수도 있다. 혹은 날개를 퍼덕일 때마다 먹이가 아니라 전기충격을 줄 수도 있다. 따라서 비둘기에게 먹이가 나오는 것은 비둘기 자신이 무슨 선택을 하는지와는 관련이 없는 문제다. 즉, 우리가 필연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삶이 새장 속 비둘기 실험과 다른 점이라면, 우리는 먹이 대신 행복을 갈망한다는 점, 유형 실험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와 같다. 외력이 주어지지 않는 입자의 위상은 다만 확률적으로 정해진다. "어디어디에 있다"가 아니라 "어디어디에 있을 확률이 x%이다"가 더 적절한 표현이다. 고로 어떠한 선택이 반드시 그 결과를 낳게된다는 보장은 없으며, 우리는 다만 어떠한 선택이 선택하지않은 것보다는 더 "나을" 것이라 확률적으로 "예측"만 하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우리는 무엇을 하면 행복해진다는 명제, 이를테면 우리가 사회적으로 성공하면 행복해진다는 오만하고 결정론적인 명제에 한번쯤 거센 백태클을 걸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성공한다면 몇 % 정도 행복해질 확률이 높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이다.

 

그렇다면 어떤 선택지를 선택한다면 높은 확률로 행복할 것이라는 사실이 우리가 반드시 그 선택지를 선택해야할 근거가 될 수 있는가? 이를테면 어떠한 선택으로 인하여 한 사람은 전재산이 50만원이고, 다른 한 사람은 전재산이 50억이다. 이 두 사람은 각각 길을 가다가 땅에서 10만원씩을 주웠다. 이 10만원의 가치는 두 사람에게 동일한가? 쉽게말해 이 글을 읽는 여러분에게 1억원의 가치와 이건희에게 1억원의 가치가 같느냐는 것이다. 선택은 존재를 낳는다. 내가 해온 선택들이 지금의 내 존재고, 내가 앞으로 해야할 선택들이 미래의 내 존재다. 고로 현실의 내 존재와 미래의 내 존재는 다르다. 따라서 지금 어떤 것에 대해 행복을 느낄 것이라 해서 미래에도 똑같은 것에 똑같은 행복을 느끼라는 법은 없다. 5살배기 때 그렇게 아껴왔던 로보트 장난감이 25살 청년에게는 아무런 행복도 주지 못하듯 말이다. 지금의 잣대로 어떤 선택지의 미래 행복이 다른 선택지의 미래 행복보다 크다 혹은 작다로 재단하는 것이 굉장히 무의미하다. 선택 그 자체가 우리가 느낄 행복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언가를 선택하기 이전에 어떤 선택지가 더 행복할지 미리부터 점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기위해서는 반드시 상자를 열어보아야만 하듯이, 우리는 반드시 선택을 한 이후에만 그 결과, 이를테면 행복한지 행복하지 않은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며, 무언가를 선택하기 이전에 어떤 것이 좋고 나쁠 것인지를 예상하는 것은 다만 우리의 편견과 오만에 불과하다.

 

후회해야할 것

그렇다면 나는 어떤 선택이든 무의미하니까 그냥 되는대로 살다가 죽자는 이야기를 하고싶은 걸까? 결과 따위 어차피 모르는 것이고, 뭘해도 후회하기 마련이니 동전이나 던져서 모든걸 결정하는게 나은걸까? 아니. 우리의 문제는 선택하기에 앞서 "선택의 결과"에 너무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시험문제를 풀면서도 "내가 왜 이 선택지를 답으로 골랐는가?"가 아니라 "이 선택지가 정답이 맞을까?"에 더 집착하는 것이다. 어찌됐든 자신이 선택한 선택지가 정답일지 아닐지는 채점해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것이므로 자신이 왜 그것을 선택했는지가 더 중요한 것인데, 시험문제를 풀고있는 그 순간에도 아직 알지도 못할 것에 대해 궁금하고 찜찜하여 견디지를 못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선택하는 행위 그 자체다. 우리가 자유의지로써 마음껏 할 수 있는 것은 선택이라는 행위 그 자체뿐이며, 선택으로 인한 결과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쓸 필요가 없다. 그건 위에서 하도 말을 복잡하게해서 그렇지 단순하게 말하서 그냥 물흐르는대로 흘러가는 것이다. 운, 나비효과, 뭐 어떤 말로 표현해도 상관없다. 그것은 우리의 지각을 벗어난 과정이고, 우리가 어찌하려해도 어찌할 수 없는 과정이다. 만약 후회라는 것이 선택에 따르는 필수적인 감정이라면, 우리가 후회해야할 것은 우리가 선택함으로 인해서 그 선택이 불러일으킨 이후의 일들이 아니라, 우리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에 관한 것이다.

 

줄거리에 앞서 감상을 한번 써보았다. 이것으로써 이 영화를 보기에 앞서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의 단편이라도 전달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어지간하면 나도 내 블로그의 글을 100% 자기작성으로 작성하고 싶었는데, 이번 경우는 나같은 영화의 ㅇ자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영화 줄거리가 너무 난해해서 줄거리는 다른 분의 의견을 인용하기로 한다. 내가 되도않게 줄거리 요약하는 것보다는 이 분 내용이 훨씬 깔끔하고, 이해하기도 쉬우며, 영화 메시지도 잘 전달하는 듯하여 고민없이 인용한다.

 

영화 <미스터 노바디> 줄거리

 

아래 줄거리는 네이버 영화 <미스터 노바디> 평점/리뷰 중 kmka***님의 의견을 인용하였음. 출처는 http://movie.naver.com/movie/bi/mi/reviewread.nhn?nid=2268781&code=70615

영화는 비둘기미신, 시체공시소에 있는 니모, 물속의 차에 있는 니모, 욕조에서 총을 맞는 니모, 유성세례로 폭발하는 우주선 안의 니모, 뒤죽박죽 이상한 영상들로 연결되다가 34살 이후의 기억이 없는 1975년생 118살의 니모가 2092년 죽을 수 있는 마지막 인간으로서 의사의 진료를 받고 있는 것으로 시작한다. 또 치료 후에는 기자가 병상에 몰래 찾아와 그를 취재하는데, 이때부터 뒤죽박죽 노인의 진술이 이어진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니모는 태어날 때 천사에게서 망각의 표징을 받지 못했고, 따라서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니모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나비효과의 산물로 만나 니모를 낳았고, 니모는 자신이 존재하는 것인지 등등 철학적 질문을 하며 성장한다.

  니모는 동네에 살고 있던 진, 앨리스, 안나 세 여자 아이를 알고 있었다. 니모는 수영장에서 안나를 짝사랑하게 되었다. 그런데 니모는 수영을 하지 못한다. 어느 날 어머니가 안나의 아버지와 불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니모는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때문에 이혼한다. 니모는 기차역에서 떠나는 어머니와 남는 아버지 중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기로에 놓인다. 9살 니모는 마지막 순간에 떠나는 열차를 향해 뛴다. 그리고 여기에서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자세히 항목화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큰 선택1) 어머니 쪽을 선택한 니모 - 안나

작은 선택1) 호숫가에서 같이 놀자는 안나에게 말을 험하게 한다.

- 안나와 멀어지게 되고 나중에 두 자녀가 있는 안나와 역에서 마주치게 된다.


작은 선택2) 안나에게 수영을 못해서 못 어울린다고 솔직하게 말한다.

- 안나와 가까워진다. 아버지 어머니가 재혼을 했기 때문에 자매지간이 되지만 사랑을 나눈다. 이 것이 밝혀지고 어머니 양아버지가 이혼한다. 성장한 니모와 안나는 결국에 역에서 우연히 재회를 하게 된다. 하지만 나비효과 때문에 연락처가 비에 젖으면서 다시 연락이 끊기게 되고, 니모는 안나를 그리워하다 등대 근처의 노숙자로 전락한다. 그리고 그들은 등대 앞 벤치에서 다시 만난다.


큰 선택2)아버지를 따라간 니모

 

- 6년이 지나고 아버지는 특별한 병을 앓고 있다.(자신의 아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봐서 치매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 때문에 니모는 아버지를 보살피는데, 아버지가 잠들면 SF소설을 쓴다. 이 SF소설의 내용은 인간이 화성에 개척지를 건설하는 것이다. 동면상태로 화성으로 향하는 니모의 모습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어쨌든 현실에서 어느날 니모는 파티에 갔다가 앨리스를 만난다. 그녀는 스테파노라는 남자에게 의존적인 듯한데, 그녀는 니모에게 자신이 니모의 어릴적 친구이라는 것을 밝힌다. 또 생뚱맞게 자신이 죽었을 때 화성에 자신의 유해를 뿌려달라는 약속을 하게 한다. 앨리스에 대하여 사랑의 감정이 생긴 니모는 편지를 써서 앨리스에게 전달하려고 하지만 앨리스와 스테파노가 함께 그녀의 집에서 나오는 것을 본다.


중간 선택1) 앨리스와 스테파노를 보고 감정이 격앙된 니모는 오토바이를 과속으로 달리다가 나뭇잎에 미끄러지는 사고로 중태에 빠진다.

- 움직일 수도 없지만 의식은 있는 니모는 의식 속에서 SF소설을 써내려간다. 그리고 그 소설의 내용은 이전과 달라진다. 소설 속 니모는 앨리스와 결혼하나, 신혼여행을 가던 도중 앞의 폭발물질을 실은 트럭이 폭발하여 앨리스가 죽는다. 소설 속 니모는 앨리스와 한 약속을 지키려고 한다. 즉, 그녀를 화장하여 유해를 화성에 뿌리려는 것이다. 소설의 결말은 지구로 돌아오던 도중, 니모는 안나를 만나지만 알아보지 못하고, 유성우에 의해 우주선이 폭발하여 모두 죽는 것이다. 소설을 끝낸 니모는 병상 위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중간선택2) 앨리스와 스테파노를 보지만, 니모는 앨리스에게 편지를 전달한다.

- 니모는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앨리스는 자신이 스테파노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작은선택1) 니모는 앨리스를 포기한다.

- 그는 무도회에서 자신과 처음으로 춤을 추었던 진과 결혼하기로 결심하고, 무조건 성공을 위해 삶을 살 것을 다짐한다. 결과적으로 그는 부자가 되나 삶의 허무감에 빠진다. 결국 그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동전에 yes, no를 양면에 써서 토스하며 도박하듯이 사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 그를 다른 인물로 오인한 청부업자가 그를 살해하고, 시체공시소에서 진은 니모의 시신을 확인한다.

 

작은선택2) 니모는 앨리스를 포기하지 않고,

앨리스를 화성에 묻어주겠다는 약속을 상기시키며 사랑을 쟁취한다.

그러나 그 미래는 밝지 않다. 앨리스는 니모에 대한 의존증세가 보이고 조울증이 심각해보이며, 아이들은 방치하고 있으며, 니모가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다. 니모는 직장도 그만두고, 차도 태워버린다. 결국 니모와 앨리스, 둘 사이의 관계는 악화되다가 약간 개선되는 듯하더니, 앨리스는 스테파노를 잊지 못하고 니모와 아이들 곁을 떠난다. 이 미래가 92세까지 생존할 수 있는 니모다.

 

 

영화에서 처음에 이해가 안되었던  부분 : 신발공장의 모습. 이상한 최면 중간 세계. 신발이 집을 짓밟는 장면. 환상과 현실을 넘나든다.

 

- 이 부분에 대한 추가 해설 : 최면 속으로 추정되는(모두가 똑같은 옷을 입고, 어머니가 니모를 알아보지 못하고, 노인이 티비를 통해 말을 걸고, 신발이 집을 짓밟는) 세계는 영화의 대부분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어린 니모의 상상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또 신발공장에서 튼튼하지 못한 끈을 썼기 때문에 니모는 달려가는 기차에서 어머니와 같이 떠나지 못하고 아버지와 남게 되어 이야기는 큰선택2로 진행됩니다.

 

이제 결말을 정리 해보겠다.

이 영화는 기차역에서 달리기 시작하는 소년의 머리 속에서 시작한다.

정확히 말하면 모든 미래(평행 우주)를 볼 수 있는 9살 소년의 머리 속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는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서 어떤 것이 옳은 선택인지 몰랐다. 따라서 그는 순간적으로 모든 미래(가능성)을 본다. 이 상태를 암시해주는 대사는 빵집에서 빵을 고르는 부분에서 나온다. ‘반드시 옳은 선택을 해야 해, 선택을 하지 못한 채로 남아있을수록 모든 것은 가능한 상태로 남아 있어.’


그럼 결말 부분의 이상한 중간 세계에서 노인 니모가 젊은 니모에게 2092년 2월 12일 5시 50분까지 살아 있어야 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이 순간은 Big crunch가 일어나는 순간. 시간이 거꾸로 가는 순간. 모든 삶의 경로와 가능성을 알 수 있는 순간이다. 그래서 임종 때 니모는 그 순간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라고 한 것이다. 그의 모든 미래는 체스의 말을 움직일 때 최적의 선택은 움직이지 않는 것일 때를 지칭하는 츠쿠브방으로 요약될 수 있다. 어느 선택을 해도 그의 미래는 어떤 방식으로든 비극적이다.


모든 가능성을 알아낸 니모는 결국 어머니, 아버지도 아닌 제 3의 선택, 즉 기찻길에서 벗어나는 선택을 한다. 그런데 그의 2092년 임종 순간 마지막 말이 안나였다는 점,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안나와 니모가 호숫가에 즐겁게 앉아 있는 장면으로부터 제 3선택의 내용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그는 다음 삶을 살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1) 안나와 결혼하고 아이들이 있으며 행복하다.

2) 그는 이 영화에 등장하는 다큐멘터리 파트의 진행자가 된다.

3) 호숫가를 주행하던 도중 참새가 자동차 창문에 부딪히는 사고로 익사한다.


그러므로 어린 니모의 선택으로 신문기자와 인터뷰를 하는 2092년의 세계는 붕괴된다. 이것은 이 세계가 즉 앨리스와의 결혼하는 선택으로 니모가 2092년까지 살 수 있는 세계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스터 노바디라는 제목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나,

수많은 선택의 가능성 중 하나로 존재하는

미래의 니모를 암시하는 것이다.

 

추가로 글을 수정합니다.
제가 끝부분에서 언급한,

니모가 안나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다가 익사하는 미래는

큰선택1-작은선택2의 미래의 연장선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영화 마지막에서 어린 니모가 미래의 가능성을 모두 본 후

어머니, 아버지를 모두 선택하지 않고 누구와도 엮이지 않는,

제 3의 선택을 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크고 작은 선택들에 의해 니모의 삶이 수없이 뒤바뀌는 모습을 보며 지금 내가 하는 크고 작은 선택들의 의미와 나의 존재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하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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