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엄석대가 맞는가?



세상에 나온지도 꽤 오래 되었고, 많은 매체로 재생산된 작품이니만큼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 대한 평론은 셀수없이 많다. 그러나 그 평론의 포커스들은 무척이나 제한적이어서, 권력자의 패망과 민중의 해방이라는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 그러한 해석은 엄석대의 권력을 묵인했던 최선생이 대체 왜 이 작품에 등장했는지를 간과하는 반쪽짜리 해석일뿐 아니라 신구 할배는 출연료 받고 논게 아니다, 후에 엄석대 체제를 붕괴시키는 김선생과 주름없는 최민식의 힘찬 빠따질 또한 단순한 선의의 해방자 내지는 문학적인 데우스 엑스 마키나 정도로 여기는 편협한 해석에 불과하다.

많은 평론과 문학 교과서는 이 작품의 제목에서 칭하는 "일그러진 영웅"의 자리에 엄석대를 대입하는데, 이는 몇가지 부분에서 오류임이 분명하다. 바로 이 오류 때문에 이문열을 대번에 중견작가 반열에 올려놓은 명작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단순한 민중저항-민중해방의 단편적인 구도로 일축되고 마는 것이다. 이 작품의 영웅은 결코 엄석대라 할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i) 먼저 사전적으로 영웅이라는 존재는 구체제를 다수 민중이 갈망하는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존재인데, 작품 시작 시점부터 엄석대는 이미 반의 권력을 독식하고 있는 기득권이었다. 엄석대 자신부터가 구체제의 정점에 서있었으므로, 자신이 나서서 체제의 변화를 꾀한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차라리 "변화"라는 단어에 중점을 두고 보자면 초창기의 한병태와 후에 등장하는 김선생이 영웅의 칭호에 훨씬 걸맞다. 물론 체제를 전복할 능력도 없었고 작품 중반부부터 엄석대 체제의 일원이 되어버린 한병태가 영웅이라고 보기에는 적절치 못하므로, 제목에서 일컫는 영웅은 김선생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ii-a) i)의 사항에 동의하는 사람들도 "일그러진"이라는 수식어 때문에 엄석대야말로 일그러진 영웅이라고 칭하는데, 김선생 또한 엄석대와 정확히 같은 지배양식(폭력과 체벌)을 통해 반 아이들을 휘어잡았다는 점에서 그가 표방한 명분을 무색하게 한다. 김선생의 혁명은 민중의 봉기에 의한 권력교체가 아니었으며, 단순히 폭력의 주체가 엄석대로부터 김선생으로 바뀌는 과정일 뿐이었다. 따라서 김선생이 "자유"와 "동급생간의 평등"을 레토릭으로 삼아 반아이들의 영웅으로 등극한 것은 틀림없으나, 결과적으로는 자기자신도 구체제가 권력을 잡았던 방식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수단으로 권력을 잡았다는 점에서 "일그러졌다"는 수식어를 피할 길이 없다.

ii-b) 반아이들(민중들)의 입장에서 보아도 ii-a)와 궤를 같이 한다. 반아이들이 신체제에 보냈던 지지는 단순히 엄석대에 대한 반감 때문이지, 김선생이 정말로 반아이들에게 자치권을 주려고 해서가 아니다. 반아이들 입장에서는 엄석대에게 쪼인트를 까이나 김선생에게 빠따를 맞으나, 권력층이 자신들을 폭력으로 다스리는 것은 전혀 다를바가 없다. 이를테면 작중 김선생이 엄석대에게 거부감을 느끼게 된 계기도 급장의 발언권과 지지도가 이상스러우리만치 거세어 교사인 자신의 권한마저 잠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아이들이 엄석대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은 단순히 그의 혁명을 정당화할 명분에 불과했다. 이는 청소검사 장면에서 두드러지는데, 김선생이 문제삼은 것은 "선생이 해야할" 청소검사를 감히 동급생인 급장이 한다는 것이었지, 단순히 엄석대가 비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표이기 때문이 아니었다(물론 의심은 했지만). 애당초 엄석대가 민주적으로 선출된 급장이었다해도 김선생이 청소검사를 그에게 일임하지는 않았을 거란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김선생은 엄석대의 지배체제를 자신에 대한 월권행위라 여겼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며, 김선생이 전복한 것 또한 구체제 자체가 아니라 엄석대라는 단일 권력자라는 점에서 볼 때, 김선생에게야말로 반쪽짜리 일그러진 영웅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iii) 혹은 지엽적 해석을 지양하여 김선생을 진정한 해방자라 여긴다해도 그가 "일그러진 영웅"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영화판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후반부에 김선생은 난데없이 국회의원이 되어 최선생 빈소에 방문하는데, 어른으로 성장한 반아이들은 그에게 예의를 갖추는 한편으로도 "그놈의 출세가 뭔지"하며 한탄섞인 눈으로 최선생을 바라본다. 이는 한때 민중의 해방자로 여겨졌던 투사가, 변화된 세상에서는 새로운 권좌를 지향한다는 현실의 투영이다. 이러한 김선생의 변절아닌 변절은 그가 일그러진 영웅이라는 칭호를 받기에 하자가 없음을 보여준다.

최선생은 엄석대의 바짓사장이었나? : 상왕통치


흔히 이 작품을 해설할 때에, 전반기 권력구도를 한병태 vs 엄석대, 후반기 권력구도를 김선생 vs 엄석대로 보고는 하는데, 이렇게 되면 최선생의 역할이 완전히 무시되는 오류를 낳는다. 작가가 구태여 엄석대를 비호하는 최선생의 존재를 넣은 것은, 단순히 엄석대라는 캐릭터 자체를 부각시키려는 목적뿐 아니라, 체제 상위권력(상왕)과 체제 하부권력의 관계를 그리기 위한 목적일수도 있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최선생 또한 마음만 먹는다면 엄석대 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또래 사이의 권력자라 해봐야 엄석대도 일개 학생일 뿐이고, 그가 갖는 일련의 권한과 특권 또한 엄격하게는 최선생이 갖고있어야할 것을 장기나 한판 두고싶은 신구 할배의 귀차니즘에 양도받은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엄석대는 그러한 "양도받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겉으로는 최선생에게 충성을 다하며, 온갖 권모술수를 통해 자신의 기득권에 치명적으로 작용할 한병태의 밀고를 막는다. 최선생이 엄석대를 100% 신뢰하고 있고, 엄석대가 자신의 교사보다도 더 큰 통치의 정당성(통치의 능력과는 다르다)을 가지고 있었다면, 엄석대가 한병태의 밀고를 구태여 견제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작중에서 최선생은 한병태의 밀고를 주의깊게 듣는 태도를 보였으며, 결과야 어찌됐든 엄석대의 부정을 캐내보려는 최소한의 노력은 보였다는 점에서 최선생이 단순히 엄석대의 바짓사장이었다는 해석은 합당치 못한 것이 된다.

엄석대의 통치는 아이들의 질서와 성적을 중시하는 최선생의 이해관계와도 맞아떨어졌으며, 따라서 최선생은 2인자에게 대부분의 권한을 이양한채 상왕의 자리에 머무른다. 그러한 시스템을 통해 엄석대 체제(정확히는 최선생 체제의 하위권력)에서 발생가능한 불만은 모조리 엄석대가 떠안게 되므로 최선생은 소위 "이미지 관리"가 가능해지며, 이따금씩 엄석대가 무시못할 부정을 저질렀을 때만 나서서 제재를 가하고 반아이들에게 "권력자를 징벌하는 정의로운 상위권력"으로 비춰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통념과는 반대로 최선생이 엄석대의 바짓사장이 아니라, 엄석대가 최선생의 바짓사장인 셈이다.

상왕이 실질적 권력을 가진 상태에서 이원적인 통치방식을 채택하는 사례는 현실세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체제는 흔히 정권 지지율이 낮은 독재정권에서 흔히 채택하는 방법인데, 마오쩌둥이 대약진운동으로 수천만명의 중국 인민을 아사시킨 후 덩샤오핑에게 권력의 상당부분을 이양한 것이 대표적이다. 마오는 덩을 이용하여 자신에 대한 중국 인민의 비판을 성공적으로 잠재웠다. 딱 하나 이 작품과 다른 점이라면, 마오의 경우 훗날 덩의 경제정책으로 중국 경제가 서서히 회복되며 덩의 권력이 자신의 권력까지 잠식하기 시작하자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다시금 권력의 회복을 꾀하였다는 점 정도.

김선생은 왜 혁명을 일으켰나?


그러므로 완전히 다른 존재의 층위에 있는 것처럼 보이던 최선생과 김선생은, 둘 모두 통치의 능력과 정당성을 독점하고 있다는 점에서 교집합을 갖게된다. 차이는 통치의 능력만을 갖고 정당성은 갖지못한 2인자 엄석대를 인정하는가 하지않는가인 것이다. 이는 자신의 권력을 축소하면서라도 체제에 대한 민중의 반감을 회피할 것인가, 혹은 민중의 반감을 감수하고서라도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할것인가의 문제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왜 김선생은 2인자 권력을 철저히 배제하려고 했던 것인가? 여기에는 작품 전반과 김선생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필자의 자의적인 해석이 섞인다. 김선생은 서울의 사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능력있고 젊은 선생이다. 그러한 그가 시골학교로 처음 전근을 왔다면, 같은 서울출신인 한병태가 전학 초창기 겪었던 일종의 텃세(대체적으로는 그것이 엄석대 체제 때문인 것으로 그려지나, 작중 여기저기서 반아이들이 한병태에게 서울 서울하며 은근히 출신으로 선을 긋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를 그라고 피해갈 길이 없다. 물론 학생-선생 간 수직구도에서 한병태가 겪은만큼 그 텃세가 심하지는 않았을테지만.

이에 더해 이미 엄석대 체제가 반을 지배하고 있는 상태에서 김선생이 조치를 취하지 않은채로 장기간 방치했다면, 김선생의 권력 또한 점차 엄석대에 의해 잠식되었을 것이다. 초창기에 엄석대를 잡아두지 않으면 나중에 가서 빌미를 만들어 체제를 전복시킨다는 의미가 퇴색하게 된다. 엄석대의 타도가 늦어질수록, 반아이들은 김선생 또한 최선생과 다름없이 엄석대를 인정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될 것이고, 따라서 예비 신권력에게 일말의 환상을 품었던 민중들이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다시금 구권력을 옹호하게 될 리스크가 있었던 셈이다. 다시말해 어차피 엄석대를 잡을거면 빨리 잡을수록 좋은 것이었다.

더욱이 김선생은 "자유"와 "권리"라는 레토릭으로 반아이들의 지지를 어느 정도 확보해놓고 있었고, 나이가 들어 교무실에서 장기나 두는것이 낙인 최선생과는 달리 반아이들을 모조리 줄빠따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었다. 이는 이후에 자신이 새로운 권력자로 등극했을때 민중이 불만을 품더라도, 그것을 어느정도 포용 및 탄압할 능력이 있음을 의미한다.

김선생 혁명의 성격
역사상 이민족이 다른 민족을 지배할 때의 통치방식은 두가지였다. 한가지는 피지배민족의 지배구조를 그대로 둔 채 형식적으로만 자신들의 휘하에 편입시키는 것이고, 다른 한가지는 기존 지배구조를 완전히 격멸하는 것이었다. 전자의 포용적인 통치방식은, i) 흡수한 피지배민족의 규모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복잡하여 달리 대체구조를 마련할 수 없을 때, ii) 피지배민족의 지배구조가 무시할 수 없을만큼의 지지를 받고 있을때(나폴레옹 프랑스 이후 빈 체제가 이랬다), iii) 행정력 혹은 전력투사력의 부족으로 피지배지역에 충분한 군대를 주둔시킬 수 없을때(아무리 군사력이 강한 나라라도 미친듯이 영토확장하러 다니다보면 깃발꽂은 땅도 제대로 케어를 못하는 경우가 많다. 몽골제국이 후에 갈기갈기 쪼개진 이유도 바로 이것)나 행해지는 것이었고, 그러한 이유들이 없다면 구태여 반란의 씨앗이 될 수 있는 피지배민족의 지배구조를 유지할 유인이 없다. 엄석대가 김선생과 아이들에게 쌍욕하며 교실을 뛰쳐나갔을 때에, 김선생이 엄석대를 구태여 잡으려 하지 않았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위와는 반대로 i) 엄석대 반은 서른명 내지 마흔명 남짓한 어린애들의 반이었고, ii) 엄석대 체제는 이미 많은 불만사항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저 새끼 순 나쁜새끼에요, iii) 김선생 또한 그 반에 모든 힘과 열정을 투사할 능력이 있었으므로 권력교체가 가능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ii)의 이유는 역으로 김선생이 엄석대와 다를바없는 폭력을 휘두르고도 혁명의 정당성을 갖게된 주요한 키포인트가 되었으며, 김선생이 엄석대의 안티테제로서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주요한 기반이었다.

위 문단에서 필자가 김선생을 혁명세력이 아닌 이민족에 빗댄 것은, 권력을 잡은 그가 표방했던 자유의 가치관이 실현된 모습은 작중에서는 단 한번도 나오지 않으며, 본 글의 초반 부분에서 언급했듯이 혁명의 목적 자체도 그의 레토릭과는 달리 반아이들의 자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는 차라리 혁명이라기보다는 쿠데타에 가까우며, 김선생은 기존 엄석대 체제에 속하지 않은 인물이었기에 쿠데타보다 이민족에 더 가까운 것이다.

혹자는 김선생의 빠따질을 혁명과정에서 수반되는 필요악으로서의 폭력을 상징한다고 주장하지만, 혁명에서 용인되는 폭력은 어디까지나 기존 지배계층을 향한 것일때만 정당화된다. 기존 민중을 "일깨우기 위한" 폭력은 혁명 이후 반동분자들에 대한 숙청의 과정이고, 이것까지 혁명의 과정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친 감이 있다. 그렇게 되면 1950년대 초까지 소련에 불었던 피바람도 "스탈린 혁명"이 되니까. 허나 이 작품에서는 김선생 체제에 대한 반동 내용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이 빠따질은 반아이들의 인식전환 과정과 김선생의 권력장악 능력을 시각적으로 묘사하기 위한 형식적인 장치로 간주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시사점
위와 같은 이유들로 인하여 이 작품을 단순한 저항문학 내지는 민중문학으로 보기에는 아까운 것이 사실이다. 차라리 이 작품은 통치체제의 본질이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도(물리적 폭력을 통한 통치) 신권력이 구권력을 대체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는 점에 더 의의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류의 권력교체과정에서 신권력이 제시하는 어젠다는 단순한 레토릭에 불과하다. 이 서글픈 결론은, 엄석대 반의 변혁이 다수 민중들로부터가 아닌 위로부터 시작된 것이었기에 태생적으로 갖는 한계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매 총선이나 대선 때마다 이 놈을 뽑으나 저 놈을 뽑으나, 세상은 바뀌는거 하나 없이 그 놈이 그 놈이더라"하는 민중의 탄식에 이문열이 제시한 답변이기도 하다.

또한 작품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한병태를 독재에 항거하지 못하는 지식인쯤으로 여기는 해설들이 많은데, 여기에 따르자면 한병태는 김선생의 혁명에 적극적으로 동조했어야 한다. 작중에서는 기존 엄석대 체제에 충성을 다했던 아이들이 갑작스럽게 변절하는 모습에 환멸을 느꼈다고 되어있지만, 김선생의 혁명이 진정 옳은 혁명이었다면 김선생에게 아낌없는 지지와 응원을 보냈어야 한다. 정확히 말하면 한병태는 혁명의 본질이 엄석대 체제와 결코 다르지 않음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이상향을 슬로건으로 삼는 김선생에게도 냉소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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