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히로이즘

코믹스라는 장르가, 특히나 성인물이 아닌 히어로물이 성인 독자층까지 아울러 문학/영화 등과 동위를 갖는 서브컬처로 자리잡은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로, 배트맨이나 슈퍼맨 시리즈가 처음 연재를 시작할 때는 말 그대로 "애들이나 보는" 챔프만화 수준이었다. 이는 히어로 코믹스들의 플롯이나 연출이 질적으로 유치해서라기 보다는, 그들이 담지하고 있는 주제의식과 등장인물 간 대립구도가 상당히 명확한 지향점을 갖는다는 점 때문에 그렇다. 그렇다면 어째서 같은 특성을 갖는 마징가Z가 추억의 늪 속에 깊게 파묻히는 동안 미국발 히어로들은 상업적인 생명력을 지금껏 유지할 수 있었을까?

미국발 코믹스들이 여타 영웅신화와 구분되는 점이라면, 악당으로 표현되는 이들이 단순히 순수 악이 아닌, 주인공의 안티테제라 불리어도 손색이 없을만큼의 철저한 철학을 가지고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히어로들은 완력으로 악당들을 제압해야할 뿐 아니라 악당들과의 정신적 투쟁, 나아가 그들이 구축해놓은 추종조직과의 투쟁에서도 승리해야만 하는 사명을 갖게된다. 이러한 특징은 미국발 코믹스들이 권선징악의 2차원적인 구도를 취하면서도, 입체적이고 풍부한 캐릭터와 퍼스널리티를 가진 다양한 히어로들을 무더기로 창조해낼 수 있는 근원이기도 하다.

이어지는 질문 "그렇다면 어째서 미국발 히어로물만 그런 특징을 갖는가?"에는 이제 답변하기가 수월해진다. 양차대전의 전승국이자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아이콘인 미국은, 자랑스레 자국을 히어로에 대입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발 애니메이션이 기술적으로는 아무리 날고 기어도 결코 가질 수 없는 경쟁력이기도 했다. 미국발 히어로물에는 은연중에든 노골적으로든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간의 대립구도가 녹아있기 마련이며, 악당들과의 "철학적 투쟁"이 필수요소가 된 것도 양 진영의 이념경쟁을 표현하는 데에 그만한 장치가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미국발 히어로물의 대부분은 태생부터가 체제선전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과한 주장은 아닐 것이다.

미국의 자성과 <다크나이트>

(일러스트 출처 : http://m.extmovie.maxmovie.com/xe/bestpost/1343914)

그러나 미국의 이러한 영웅주의는 베트남 전쟁의 실패로 한 차례 복구하기 힘든 손상을 입었고, 이후 소련 붕괴를 경험하며 전례없는 위기에 봉착한다. 더이상 미국이 정당성 우위를 가질 수 있는 안티테제가 없게 된 것이다. 세계의 갈등은 종교, 자원, 민족 등을 기준으로 점차 다극화되었고 미국의 반공 영웅주의는 더이상 설득력을 가지기 힘들게 되었다.

특히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이 지원했었던 알카에다가 창을 거꾸로 들고 세계무역센터에 여객기를 꼬라박은 9/11, 또 애당초 대량살상무기를 찾겠다고 벌였던 것이 최소한의 명분도 챙기지 못한채 미국 국방예산만 수렁늪에 꾸역꾸역 쑤셔넣었던 이라크전은, 미 국민들과 동맹국들마저도 "Hero America"에게 자성을 요구하게된 계기가 되었다. 왕년에 찬란한 이름 휘날리며 다녔던 히어로가 까딱하다간 동네 깡패 소리를 들을 문제아가 되어버린 것이다.

<다크나이트>는 바로 이렇게 추락한 히어로, 대중으로부터 외면받는 히어로를 그려낸다. <다크나이트>가 히어로물의 진화라고 평가받는 것은 작품이 보여준 연출이나 스케일 때문이 아니다. 여타 상업적 블록버스터들이 여태껏 구시대적 2차원 구도를 버리지 못하는 동안, <다크나이트>만이 21세기 미국의 국제적 입지를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는 것이야말로 이 작품이 수작을 넘은 명작으로 여겨지는 좀더 그럴듯한 이유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이제 퇴물이 되어버린 "히어로 배트맨"을 과감히 왕좌에서 끌어내려 고뇌하는 한 고담시민으로 추락시켰다.

영웅은 언제나 인기를 먹고 자란다. 배트맨이 더이상 히어로가 아니게 된 이면에는 배트맨에 대한 대중의 외면이 있었다. 찬란했던 과거와는 달리, 범죄자와 배트맨 간의 완력갈등이 심화되고 배트맨이 비밀주의를 고수할수록 고담시민들은 피로감을 느꼈다. 시민들과 경찰은 고담에 평화가 찾아왔을 때에 배트맨이 지나친 권력을 가지지 않을까 점차 걱정하게 되었고, 배트맨 또한 언젠가는 체포되어야할 폭력자라고 여기기 시작했다. 배트맨 독주체제에 염증을 느낀 대중들은 그래서 혜성처럼 등장해 범죄자를 줄줄이 사탕 엮듯 감방으로 보내는 검사 하비 덴트에게 환호를 보낸다. 그들에겐 더이상 배트맨이 필요하지 않아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철저히 버림받은 배트맨의 생각도 시민들과 그다지 다를 것이 없었다. 정작 배트맨 자신은 불살주의를 고수하며 폭력을 필요악으로 여겼는데, 고담시민들 중 일부는 그의 코스튬을 입고 범죄조직에 총질을 해대며 정의라 자부한다. 영웅적 사명에 대한 피로감, 레이첼과 결혼하는 평범한 브루스 웨인으로서의 인생에 대한 포기, 대중의 외면, 그의 철학에 대한 곡해 등으로 상처받은 배트맨도 법의 힘으로 고담시에 평화를 가져다줄 합명제적 백기사 하비 덴트가 어서 자신의 자리를 대신해주기를 기다린다.

조커에 대한 해석

그렇게 고담의 치안이 Dark knight로부터 White knight로 이양되는 과정을 훼방놓은 존재가 바로 히스 레저 명연에 빛나는 조커이다. 애당초 조커가 기존 악당관에 걸맞는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조금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그는 고담정복이나 금전 따위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 또 그는 배트맨과의 완력대결에서 승리하고자 하는 의지조차 비추지 않았다. 오히려 조커는 범죄조직으로부터 훔친 돈을 모조리 태워버리거나, 배트맨에게 자신을 죽일 기회를 직접 마련해주기도 한다. 조커가 노린 것은 모든 정의관과 불의관이 붕괴된 혼돈과 자신의 숙적 배트맨이 불살주의의 신념을 버리고 자기모순에 빠지게 하는 것 뿐이었다.

그러한 점에서, 이전 배트맨 시리즈들의 주제의식과는 달리, 또 이동진 평론가의 평론과는 달리, <다크나이트>가 표현하는 배트맨-조커의 대립구도는 선 vs 악이 아니다. 그러한 단순구도로 몰아가는 것은 이 작품이 어째서 "히어로물의 진화"라고 평가받는지에 대한 제대로 된 고찰이 부족한 탓이다. 정확히 말하면 정의와 불의를 구분짓는 이데아 담론이 존재하는 세계관 vs 모든 가치관이 조롱Joke의 대상이 되는 혼돈의 세계관이 이 작품을 지배하는 주요 대립구도이다. 조커가 왜 Joker인지 성명학적으로 재해석한 배트맨 시리즈는 그래서 <다크나이트>가 유일한 것이다.

물론 이동진 평론가가 조커의 연기를 뱀에 비유한 것은 무척이나 중요한 지적이었지만, 그 이후에 뱀이 악의 상징이라느니 하는 말은 엄밀하게는 부적절하다고밖에 볼 수 없다. 역사적으로나 문학적으로나 뱀은 순수 악이라기보다는 "유혹"에 가까운 의미로 나타났다. 창세기에서의 뱀도 아담과 이브로 하여금 신률을 어기도록 유혹만 했을 뿐, 실질적으로 신률을 어기는 악을 저지른 것은 아담과 이브 자신들이다. 여하튼 이 점은 표현주의적인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데, 조커가 배트맨을 붕괴시켰던 주요 전략 중 하나가 바로 하비 덴트를 유혹하여 자신과 같은 부류의 존재가 되도록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작품에서 배트맨은 철저히 조커에게 말려들었다고 밖에 할 수 없다. 배트맨은 조커의 도발에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기 직전까지 내몰렸고, 나중에 조커가 제발로 경찰에 잡혀왔을 때에 그를 죽기 직전까지 취조해 불살주의를 어길 뻔 했으며, 조커의 시험에 자신의 대의라 할 수 있는 하비 덴트 대신 사적 욕망의 상징인 레이첼을 선택했다. 레이첼의 죽음으로 상심한 하비 덴트는 결국 조커에게 설득되어 정의와 불의에 대한 대의를 잊고 확률에 의존하는 존재로까지 타락한다. 작품 내내 조커는 그야말로 배트맨을 가지고 놀듯 하였고, 이는 하비 덴트가 죽은 현장에서 배트맨과 고든 경찰청장이 "조커가 승리했다는 것을 고담시민들이 알게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장면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그렇다면 조커라는 존재가 미국 영웅주의의 몰락에서 갖는 함의는 무엇인가? 그는 이를테면 더이상 단일한 통일조직이라고 할 수 없는 미국의 현 적대세력을 의미한다. 각종 테러집단, 북한과 이란 등을 위시한 악의 축 국가들, 또 명시적으로는 파트너이지만 끊임없이 경쟁하고 있는 중국은 각기 저마다의 명분을 가지고 미국 패권주의에 저항한다. 이들은 소련과는 다르다. 미국의 신적대세력들은 단순한 이념경쟁을 획책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자원/민족적으로 얽히고설킨 다차원적인 대립각을 형성한다. 실상은 제국주의적인 면모를 다분히 가지고 있었지만 그나마 소련이 있던 시절에는 정당성을 가질 수 있었던 자본주의+민주주의 체제의 만능론은, 더이상 미국을 움직이는 사상적 원동력이 되지 못했다.

즉 조커는 미국이 이전 세대에 가졌던 명분이 처참히 조롱당하는 21세기 사회를 상징적으로 그려내는 존재이며, 더이상 코믹스 시절에 다루어진 것과 같은 순수 악의 모습으로 보기는 힘들다. 기존의 배트맨답지 않은 배트맨의 실수들은, 20세기 미국의 세계 경찰론이 21세기에는 더이상 정당성을 가지기 힘듦을 역설한다. 결국 배트맨이 조커와의 정신적 투쟁에서 승리를 쟁취하지 못했듯, 미국 또한 변화하는 세대에 자성적인 입장을 취해야함을 크리스토퍼 놀란은 조커라는 존재를 통해 역설하고 있다.

하비 덴트에 대한 해석

(하비 덴트 사진은 징그러운 사진밖에 없어서 올리지 못했다.)

조커에 대한 해석에서 이어보면 하비 덴트에 대한 해석도 그다지 어렵지 않다. 타락 이전의 하비 덴트는 미국, 즉 배트맨이 명분적으로 지지하는 국제공조체제(작품 내에서는 법치정의)를 의미한다. 그러나 국제공조체제는 나폴레옹 이후 빈 체제를 시작으로 단 한번도 순수한 평화나 순수한 정의를 추구했던 적이 없다. 실질적으로 EU나 UN 등의 체제도 특정 이해관계를 둘러싼 국가들의 이합집산으로 간신히 구성된 것이며, 그나마도 EU는 가맹국 간의 경제적 격차, UN은 상임이사국 간의 정치적 경쟁 등으로 제대로 동작한 적이 손에 꼽는다.

하비 덴트가 압도적인 여론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신은 배트맨을 지지했던 것 또한, 여러가지 모습으로 마련된 국제공조체제가 강대국(그러니까 미국) 없이는 아무 결정권도 가지지 않는 무기력한 존재라는 것을 은유적으로 나타내는 장면이다.

즉, 국가는 세계의 평화라는 이상론보다는 자국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며, 중국 등의 미국 적대세력이 강력한 행위자로 급부상한 이후부터 이러한 경향이 더욱 심화되었다. 심지어 미국의 혈맹국 중 한 반도국가 대통령은 중국의 전승절 열병식에 참여하기도 하는 세상이다. 이는 혼돈을 상징하는 조커(그러니까 미국의 명분에 대한 조롱)에 의해 하비 덴트가 타락하여 투페이스가 된 이후 자신이 행하는 모든 선택을 확률에 맡긴다(국가는 각자 이익에 의해 행위한다)는 작품의 표현과 상당 부분 일치한다.

총평
놀란 감독이 다크나이트 시리즈를 3부작으로 계획한 것은 내 작품해석에 따르면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다. 그는 1부 <배트맨 비긴즈>를 기점으로 미국이라는 세계 영웅의 부상, 2부 <다크나이트>에서는 미국 영웅주의의 추락, 이 글에서 다루지 않았지만 3부 <다크나이트 라이즈>에서는 미국이 다시금 세계의 지지를 받는 선도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해 필요한 영웅적 희생을 말하려 했음이 틀림없다. 시간이 된다면 1~3부 모두를 다루며 이 작품의 메시지를 완전무결하게 전달하고 싶지만, <다크나이트>만 놓고 보아도 냉철한 시대정신이 깃든 수작이라는 평을 부정하기 힘들다.

쓰다보니 <다크나이트>가 굉장한 반미영화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제목과 결말에서 드러난다. 끝 부분에서 배트맨이 하비 덴트의 타락행위를 뒤집어쓰고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지만 결국 고담의 영원한 흑기사로 남은 것, 그리고 속편 <다크나이트 라이즈>에서 배트맨이 위대한 희생을 감수하는 것 등은 <다크나이트>를 반미적이기는커녕 어찌됐거나 미국을 배트맨으로 상징되는 히어로로 남겨두겠다는 투철한 미국중심적 의지가 반영된 작품이라고 해석되기 더 적절하게 한다. 오히려 경우에 따라서 이 작품에 근본적으로 남아있는 아메리칸 히로이즘과 아시아 신적대세력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조커 역과 하비 덴트 역의 괴기스러운 연출)은 보는 이로 하여금 "이게 진정한 성찰이 맞는가?"하는 의문을 들게한다.

영화 감상문을 쓰다보면, 감독은 이런 생각을 하고 이 영화를 찍은게 아닌데 내가 너무 과잉해석하는 것은 아닌가,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감상문이 아닌가 싶을 때가 종종 있다. 그러나 영화는 감독의 의도 못지않게 감상자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느냐 또한 중요한 것이며, 배트맨 시리즈와 같은 종래의 히어로물이 미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성격이 짙었다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내 해석이 크게 엇나간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또한 이런 허접한 감상문나마 쓰기 위해서 이 영화를 무려 7번 가까이 시청한 내게 있어서, <다크나이트>는 구태여 미국과 세계질서 등을 운운하지 않아도 대입할만한 소재가 무궁무진한 역작임이 틀림없다.

여담이지만 레이첼 도스 역 배우의 외모에 대한 악평이 자자한데, 모스크바 발레단 무용수와 요트 여행을 다니는 브루스 웨인과 고담시 최고의 능력남 검사 하비 덴트 같은 남자들은, 평범한 남성처럼 외모만을 보고 사람을 평가하지는 않을거라고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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