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왔어." "어서 와."


밴드 탈퇴. 연인과의 헤어짐. 할일없이, 또 부질없이 TV 서스펜스 극장이나 보며 살아가는 쇼는 2년만에 아버지로부터 부탁을 하나 듣는다. 그 부탁이란 다름아닌 살해당한 고모 마츠코의 아파트를 정리해달라는 것. 쇼는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고모였고, 아버지 또한 누나의 존재를 애써 부정하려는 듯한 눈치다. 마츠코는 30년 전 쯤 증발하여 아예 가족과의 연을 끊고 살았고, 이제서야 유골함의 모습으로 떨떠름한 남동생의 품에 안기게 된 것. 아버지는 누나 마츠코의 인생을 "시시하다"며 일단락 짓는다.



마츠코의 일대기는 그녀의 유품을 정리하는 조카 쇼의 시선을 통해 재구성되기 시작한다.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은 기모노 차림의 아가씨. 쇼는 분명 고모의 존재를 몰랐지만, 어딘지 모르게 이 아가씨가 익숙하게 느껴진다. 이제는 빛바랜 사진으로만 남아있는, 유쾌해보이기도 어딘가 기괴해보이기도 하는 마츠코의 이야기가 이제부터 시작된다.



이제와 떠올릴 수도 없는 아득한 과거가 되어버렸지만, 어린 시절의 마츠코는 여느 소녀들과 마찬가지로 동화 속 백설공주나 신데렐라를 꿈꾸는 소녀였다. 그 여느 소녀들과 마찬가지로 행복을 빌었고 사랑을 갈구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관심은 병약한 여동생 쿠미에게만 쏠려 있었고, 마츠코는 그 나이에 응당 받아야할 사랑과 관심이 결여되어 가슴 한켠이 텅 비어버린 채로 성장한다. 그런 그녀가 어느날 서커스단 삐에로 표정을 흉내내자 아버지가 처음으로 그녀 앞에서 미소를 보였고,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이 사랑받는 방법이라고 여긴 마츠코는 어엿한 숙녀로 성장하고 난 후에도 줄곧 아버지 앞에서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곤 한다.


그러나 이 방법도 아버지의 관심을 완전히 사로잡기에는 역부족. 다 큰 숙녀가 되어서까지도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하고 사진을 찍는 마츠코에게 아버지는 장난치지 말라며 면박을 주고, 여동생 쿠미가 기모노를 입은 모습을 볼 수 없겠다며 탄식한다. 그렇게도 마츠코가 노력했건만, 여전히 아버지의 가슴 속에는 쿠미만이 있었던 것. 사랑받기 위해서 지어보였던 우스꽝스러운 표정은 더이상 아버지에게 미소를 선사하지 못했다. 오히려 마츠코는 틱 장애를 얻어 당황할 때면 본의 아니게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게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마츠코는 여전히 관심을 갈구하며 아버지의 뜻대로 스물셋에 중학교 음악교사가 된다. 그러나 평온할 것만 같았던 마츠코의 인생은 제대로 꼬이기 시작한다. 수학여행 중 자신이 맡았던 반 아이 류가 매점의 돈을 훔친 것. 순순히 자신의 범행을 털어놓지 않는 류를 뒤로 한채, 마츠코는 차라리 자신이 돈을 훔쳤노라 거짓말을 하고 위기 상황을 모면하고자 한다. 그러나 일이 꼬이고 꼬여 다른 선생님들마저도 마츠코가 돈을 훔친 것으로 소문이 퍼지게 된다. 게다가 진범인 류는 "마츠코 선생님이 내가 돈을 훔쳤다고 자백하라고 강요했다"며 마츠코 인생 내리막길에 쐐기를 박는다. 여기에 더해 마츠코는 썸타던 남선생 이야기를 쿠미에게 했다가, 아버지로부터 "아픈 아이에게 그런 이야기는 왜 하느냐"며 면박을 듣는다. 분노한 마츠코는 자신이 사랑받지 못하며 자란 이유가 모두 쿠미 탓이라 생각했고, 쿠미의 목을 조르고는 학교와 집을 나와버린다.



이제 시점은 바뀌어 쇼의 아버지(그러니까 마츠코의 남동생)와 마츠코가 서커스단 앞에서 만나는 장면이 전개된다. 가출한 후 자신이 유명 작가의 환생이라는 망상에 빠져있던 테츠야와 동거하고 있던 마츠코가 동생에게 돈을 빌리러 나온 것. 테츠야는 몸을 팔아서라도 돈을 벌어오라며 마츠코에게 폭력을 휘둘렀고, 실제로 마츠코는 술집에 나가 면접까지 봤지만 도저히 남 앞에서 자신의 알몸을 보일 수가 없어 탈락하고 만다. 염치불구하고 만난 남동생은 영 싸늘한 눈빛이다. 마츠코가 가출한 이후 아버지는 뇌졸중을 얻어 쓰러지고 쿠미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는 말을 듣고, 마츠코는 눈물을 감추지 못한다. 가정을 무너뜨린 주범이 누나라고 생각한 쇼의 아버지는 끝내 마츠코에게 가족으로서의 연을 끊겠다고 선언한다. 설상가상, 돈을 얻기 위해 가족과의 연까지 끊었다는 마츠코의 말을 들은 테츠야는 죄책감에 마츠코의 눈 앞에서 자살한다.



그러나 인연의 신은 아직까지 마츠코의 편인듯 했다. 테츠야의 자살 이후, 마츠코가 테츠야의 라이벌 작가이자 유부남인 오카노와 사귀게 된 것. 비교적 짧게 지나가는 이 장면에서 마츠코가 삶을 살아가는 모습, 다시말해 사랑을 갈구하는 모습이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테츠야와 동거할 때는 정제되지 못한 떠돌이 차림이었던 마츠코가 오카노를 만난 순간 다소곳하고 참한 아내의 차림이 된 것. 상대가 아버지가 됐든, 테츠야가 되었든, 오카노가 되었든 마츠코는 철저히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이전의 마츠코의 모습은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허나 그러한 마츠코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마츠코와 오카노의 관계는 들통나버렸고, 오카노는 라이벌의 여자를 가졌다는 정복감과 마츠코의 몸이 좋아 만났을 뿐 마츠코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비수를 꽂는다.



이제금 세상 단맛은 못보고 쓴맛만 신물나게 본 스물여섯 마츠코는 일전에 면접에서 탈락했던 유흥업소에 취직하여 창녀가 된다. 무엇이든 한번 빠지면 자신을 내던지다시피 하는 마츠코의 성격 덕분에 입사한지 얼마되지 않아 유흥업소의 탑을 찍었지만, "아마추어 여대생"을 내세우는 신종 업소와 젊은 매춘부들로 인해 마츠코도 이 세상에서 점점 밀려나게 된다. 이제 퇴물이 되어버린 마츠코는 기둥서방인 오노 데라와 동거하지만, 마츠코는 오노 데라에게 아무런 사랑을 느끼지 못했다. 여기에 더해 오노 데라가 마츠코의 돈을 다른 여자에게 모두 주었다고 고백하자, 화를 못 이긴 마츠코는 오노 데라를 죽이고 만다.



살인을 저지른 마츠코는 정말로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자신에게 폭력을 휘두르긴 했어도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했던 테츠야를 따라 자살하고자 한다. 그러나 하필이면 자살하려고 간 다마가와 상수도는 말라버려 무릎 정도밖에 물이 차지 않았다. 여기서 마츠코는 멋지진 못하지만 너무나도 선한 눈을 가진미용사 시마즈와 만나 동거를 시작한다. 거쳐왔던 남자들이 남자들인지라, 마츠코는 시마즈의 순수함에 푹 빠져버릴 수밖에 없었다. 시마즈는 마츠코의 과거를 묻지 않고 프러포즈를 했고, 다시금 마츠코의 인생은 하늘을 향해 오르막길을 타는 듯 했다. 고작 한 달 후 살인죄로 경찰에 붙잡히기 전까지는.



살인죄로 징역 8년을 선고받은 마츠코는 오로지 시마즈 한 사람만을 그리며 살아간다. 미용기술을 배우며 하루하루 같은 일상을 되풀이하던 도중, 후에 조력자로 등장하는 친구 메구미를 만나기도 한다. 8년의 복역이 끝나고 벚꽃길을 따라 다다른 시마즈 미용실의 창가에는 시마즈의 아내와, 아들을 안고있는 시마즈가 비친다. "나 왔어"하고 중얼이는 마츠코에게 아무런 대답이 없다. 또 그렇게 마츠코는 철저하게 혼자가 되었다. 교도소에서 만난 친구 메구미와도 처음에는 거리낌이 없었지만, "나 왔어"하면 "어서 와"하고 대답해주는 남편이 있는 메구미에게 마츠코는 심한 자격지심을 느껴 더이상 만나지 않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한 야쿠자가 마츠코를 찾아온다. 마츠코를 "선생님"이라 부르는 그는, 마츠코 교사시절 매점에서 돈을 훔쳤던 반 아이였던 류. 그러니까 마츠코의 인생이 창창한 국어교사에서 매춘부에 전과자로 전락하게 된 단초를 제공한 원흉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좋아했다고 고백하는 류에게, 마츠코는 복수심보다 사랑에 대한 갈구를 더욱 강하게 느낀다. 류 또한 야쿠자를 그만두라는 마츠코에게 폭력을 휘둘렀지만, 마츠코는 류를 따라 지옥에라도 따라갈 것이라 단언한다. 차라리 맞는게 혼자인 것보다 낫다. 마츠코는 그렇게 생각했다. 류 또한 야쿠자로서의 자신을 오롯이 사랑해주는 마츠코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허나 제 버릇 남 못 준 류는 머지않아 조직의 돈으로 도박을 하다가 조직의 추적을 받게 되고, 경찰에 자수하여 교도소에 갇힌다.



나는 마츠코의 인생을 두 번이나 짓밟았어.

나는 상처를 입힐 줄은 알아도

행복하겐 해줄 수 없어.

내가 해줄 수 있는

단 한가지는

두번다시 마츠코를 만나지 않는 것

마츠코를 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류를 사랑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상처를 입어도  
난 류를 사랑해

내가 해줄 수 있는

단 하나

류를 기다리는 것


어쩌면 마츠코가 만난 인물들 중, 류야말로 마츠코를 가장 닮아있었는지도 모른다. 류와 마츠코 모두 누구에게 사랑받아본 적이 없는 진정으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왔다. 그래서 류와 마츠코는 자존감이 심하게 결여되어 있다. 류는 남에게 상처주며 자아를 확립했고, 마츠코는 남을 사랑하며 자아를 확립했을 뿐. 그래서 둘은 서로를 사랑함에도 서로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류는 더이상 마츠코에게 상처주지 않기 위해 마츠코를 떠나는 결론을, 마츠코는 자신이 존재하는 의미를 찾기 위해 류를 기다리는 결론을 내린다. 마흔살의 마츠코는 류의 출소일에 배웅을 나간다. "어서 와"하는 마츠코의 말에, 또다시 답이 없다. 늘 그렇듯, "나 왔어" "어서 와" 하는 대화에 하나가 어색하게 빠져있다. 그렇게 류도 마츠코를 떠나버렸다.



한 사람이 감당하기 힘든 수많은 시련을 겪어온 마츠코는 폐인으로 전락해버린다. 아름다웠던 얼굴과 몸도 은거생활로 모두 망가져버렸고, 정신은 더욱 피폐해져만 갔다. 미쳐버린 마츠코는 아파트 벽에 "태어나서 죄송합니다"라고 휘갈긴다. 잠시나마 친구 메구미의 명함을 들고 재기를 꿈꾸기도 했지만, 허망하게도 동네 아이들의 야구방망이에 마츠코는 결국 쉰셋에 생을 마감하고 만다.



사랑 이야기 : 사람은 무엇을 받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주었느냐로 평가된다


류는 마츠코를 신이라고 했다.

마지막까지 무엇 하나 똑똑하지 못했고

철저하게 불행했던 사람에게

신이라니...


난 신에 대해 알지 못한다.

생각한 적도 없다.

하지만 만약에...

이 세상에 신이 있어서

고모처럼 사람들을 웃게 하고

힘을 북돋워 주고

사람을 사랑하고


하지만 자신은 너덜너덜하게 상처입고

고독하고

패션 감각은 꽝이고

그렇게 철저하게 촌스러운 사람이라면

나는 그 신을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밀고 당기기는 연애의 핵심으로 여겨진다. 카톡 답장도 곧바로여서는 안된다. 상대가 신경을 긁는다면 사흘쯤 잠수를 탈 줄도 알아야한다. 무엇보다도 내가 상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들켜서는 안된다. 이상형을 말할 때도 마찬가지다. 상대가 아침밥을 해주길 바라고 돈을 많이 벌어오길 바라지만, 내가 상대를 위해서 어떻게 변하겠다는 말은 항상 결여되어 있다. 사랑이란 철저히 상호적인 것인데, 상대에게 요구하는 것엔 철저하고 자신이 베풀어야할 것에는 한없이 관대하다.


관계의 주도권을 잡으려 하는 것은 어쩌면 상처받기 싫어하는 인간의 자기방어기제에 의거한 당연한 현상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두고 감히 연애니 사랑이니 하는 것은 영 탐탁치가 못한 것이다. 차라리 그것은 정치학의 영역에 가깝다. 마츠코가 유달리도 바보같아 보이는건, 그녀가 "진짜" 사랑을 하고 있기 때문일런지도 모른다. 관계의 주도권이나 자존심 따위는 모조리 뒤로 한 채 상대를 위해 오롯이 자신을 투신하는 모습은, 여기저기 불순물이 섞인 사랑을 당연시해온 우리에게 오히려 지독히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것이다.


마츠코가 바란 것은 큰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바친 대신에, "나 왔어"란 말에 "어서 와"라는 대답을 듣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타자에게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자 한 것. 자신의 부재와 존재 간의 구분이 그 대답을 통해 상대에게 의미있게 다가가는 것. 너무나도 순진한 그녀의 요구에, 우리는 너무나 쉽사리 속삭여온 "사랑"이란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된다.



삶 이야기 : 마츠코는 아름답다

맥도날드 할머니에 관한 방송이 나갔을 때 경악치 않은 사람이 드물었다. 명문대를 나와 촉망받는 엘리트 공무원이었던 그녀가, 말년엔 맥도날드에서 쪽잠을 청하는 보잘것 없는 노파로 전락했으니 그 경악은 꽤나 합당하게 여겨졌었다. 노파가 살아온 삶이라는 드라마의 한 막 한 막은 이제와 주름살 사이사이에에 깊게 숨어 그저 늙음의 일부가 되고, 노파가 경험해온 역경은 보이지 않는 짐이 되어 허리마저 휘게 했다. 우리는 그저 초라한 행색의 노파의 인생앨범 저 앞장엔 늘씬한 인텔리 여성이 있었단 사실을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태어남은 따지고보면 죄송할 일도, 감사할 일도 아니다. 누구도 원해서 태어난 사람은 없다. 그저 어느 순간에 나의 존재가 시작되고, 내가 나의 삶을 인지하게 된 시점을 우리는 "태어났다"고 표현할 뿐이다. 죄송할 필요도, 감사할 수도 없는 그 백짓장 위에서 우리는 동화적인 청사진을 그리고 각자의 인생을 지어간다. 같은 백지 위에서도 누군가는 그럴듯한 빌딩을 완성하는 반면, 다른 누군가는 오두막 하나를 간신히 지어낸다. 그리고는 한줌의 재가 되어 사라져버린다. 그럴듯한 빌딩도, 낡은 오두막도 생애가 끝남과 동시에 덧없이 무너지고 철저히 잊혀진다.

그래서 삶의 결과와 결말만을 읊어대는 것은 지극히 무의미한 것이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엔 반전이 없다. 마츠코가 비참하게 살해당했다는 결론부터 영화가 시작된다. 결과가 과정을 압도한다면, 이미 영화는 시작과 동시에 끝나버린 것이 된다. 그러나 카메라는 마츠코의 몸부림을 롱테이크로 엮으며 그녀의 추락을 가감없이 클로즈업한다. 어쩌면 우리가 마츠코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은 굉장한 실례일런지 모른다. 사랑을 갈구하고, 갈구하는 것을 얻기 위해 평생을 헌납한 삶. 그 숭고한 희생을 목전에 두고 불쌍하다, 비참하다고 말하는 것은 다만 마츠코의 결말이 아름답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추구하는 바에 대한 투신의 아름다움마저도, 결말의 추함으로 인해 절하되어서는 안된다.

좋은 결과가 좋은 과정을 담지한다. 나는 진학상담을 받는 학생들에게 늘 그렇게 이야기하곤 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 학생들에게, 또 나에게도 치명적으로 위험한 말이었다. 그렇다면 꿈을 이루지 못한 삶은 철저히 무의미하고 잊혀져야 마땅한 것에 불과한가? 삶이라는 것은 분명 내가 마음에 들고 아름다워보이는 것만을 추려내어 구성하는, 어딘지 모르게 과장되어 있는 모자이크가 아닐테다. 우리가 마츠코의 이야기에 눈물짓는 것은, 마츠코가 걸어온 삶의 여정 때문이지 마츠코의 말년이 비참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꿈을 갈구하고, 몸부림치고, 괴로워하고, 또 이따금씩은 행복해하는 그녀의 드라마야말로 우리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것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 삶이 출생-성장-노화-사망의 기계적 과정이 아닌 유의미한 한 폭의 작품이 되게끔 숨결을 불어넣는 것. 그것은 획득이 아니라 갈구와 추구에 있다. 끊임없이 원하고, 앞뒤 생각하지 않고 달려나아가기에 우리는 살아있다. 인간의 삶은 무엇을 획득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목말라하고 어떻게 발버둥쳤는지에 의해 정의된다. 그것이 마츠코의 삶이 아름다운, 우리의 삶이 아름다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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