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창을 덮은 성에 틈 사이로 겨울 햇살이 알알이 깨어진다. 아직 추위가 덜 여물어 성에가 촘촘하지 못한 탓이다. 광선의 샛노란 편린들은 수첩 속지 사이사이에 잘 구운 은행빛깔 책갈피를 슬며시 끼워넣고, 빳빳이 펴다린 셔츠 소맷자락엔 새콤한 레몬즙을 한 줄기 뿌려놓는다. 세상살이의 황망함 속에서 잊혀지고 찢겨진 먼지 티끌들은, 간만의 스포트라이트가 퍽 반가웠는지 온갖 궤적을 그려가며 고요한 춤을 춘다. 겨울 초입의 햇살은 마치 붙임성 좋은 치즈태비 고양이와 같아서, 먹고 살기 위한 발버둥일랑 그만두고 자신의 부드러움에 취해보라며 온몸을 머리맡에 비벼댄다. 양 볼까지 간질이는 그 교태에 목석처럼 각잡고 있던 신입사원도 이내 녹아내리고 만다. 모니터 속 저 숫자 하나 때문에 지난주를 야근으로 지새웠건만, 에이 글러버렸다. 정수리를 무겁게 짓누르는 졸음에 취해, 의식과 무의식 사이 무주공산 모처를 눈 뜬 채로 방랑한지 수 시간째다. 이러면서까지 돈을 벌어야하나 싶던 회의감이, 이러고서 월급받아도 괜찮은건가 싶은 자책감으로 탈바꿈하는건 나같이 시즌성 업무를 맡은 샐러리맨에겐 익숙한 것이다.

"담배 하나만 주라."

황금빛 정적의 장막을 K차장이 불쑥 걷고 들어온다. 나도 곧 의식의 세계로 돌아온다. 졸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황급히 주머니를 뒤적였다. 조선땅 흡연자치고 연초인심 박한 이가 어딨겠냐만은 평소에 담배를 태우지 않던 이가 한 개비를 요구할 때면, 나는 꼭 두 개비씩을 쥐어주고선 불 붙여줄 이를 자처하며 쫄래쫄래 쫓아나가곤 한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담배가 아니라 말동무임을 지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 그런 이들은 한 개비를 다 태우고서, 곧잘 체념인지 결심인지 모를 묘한 표정을 지었다. 꼭 예외가 있었다면, 석달 전 여자친구에게 차인 동기 녀석 정도. 녀석은 뻐끔담배로 한 대를 태우고선 이딴건 대체 무슨 맛으로 하는거냐 타박하고는 말아버렸다.

오늘은 K차장. 그는 그제 사직서를 냈다. 자의에 의한 것이었는지 타의에 의한 것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다지 아쉬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일처리가 매끈한 인물도 아니었고, 잔업 시간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부장의 눈에도 성실하게 비치지 못했을 것이며, 부하들에게 좋은 평판을 남길 자도 못되었다. 그렇다고해서 무능하고 게으른 파렴치한이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평범한 샐러리맨이라면 나이 사십줄에 들어서며 응당 갖게 될 그런 중년의 모습. 늘 붙박이장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기에 여느 사무용 가구들과 당최 분간이 가지 않을만큼 위화감이 없던 사람. 어차피 업무로써 엮일 일이 별로 없었던 사람이었기에, 이따금씩 들고가는 결재판에 왜 왼쪽 여백을 안 맞췄냐느니 하는 괜한 꼬장 부리지 않고 얌전히 서명해주는 것만으로도 꽤 괜찮은 상사라고 난 생각했었다.

그런 그가 그만둔다는 소문이 돌자 막내둥이 메신저에도 그에 대한 이야기가 돌았다. K차장의 사직은, 무료한 부서원들로 하여금 그간 K차장의 면전에서 하지 못했던 말들을 저들끼리 속닥거려도 괜찮게끔 하는 정당성을 부여해주었다. 그렇잖아도 별로 하는 일이 없었다느니, 부서 선임자로서 할 말을 당당히 하지 못했다느니, 부득불 자기 얼굴에 침뱉는 소리임이 분명한 그런 뒷말들을 막내에게까지 낱낱이 공개했다. 당사자도 모르게 은밀히 거행된 화형식 한켠에는, 사람에 대해 선입견을 갖지 말라며 내게 조언했던 모 대리도 끼어있었다. 딱히 처음 겪는 일도 아니다. 반년 전 모 과장이 나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있을 때는 뒤에서조차 없으면 안되는 사람이라 추켜세우고선, 퇴사와 동시에 똥을 싸고 나갔다느니,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었다느니 하는 뒷말을 들었었다. 이렇게까지 서로의 뒷통수에 칼을 들이대고 있는데, 그간 단합 목적이랍시고 잔 돌리며 처먹여대던 술들은 다 무엇을 위함이었나?

가면 경극이구나 직장생활은. 그렇게 생각했다. 싹 벗어제끼면 각시 가면이 나오고, 싹 벗어제끼면 도깨비 가면이 나오고, 맨 얼굴이 드러나더라도 그것이 가면인 줄로만 알겠구나. 그렇게 서로의 가면을 보며 서로를 파악했다고 착각하고, 등 뒤엔 날선 칼을 숨기고선 파렴치하게도 신뢰와 동료애를 외친다. 그리고선 저들 스스로 사회생활 참 잘한다며 으쓱하겠지. 어째서 자신만은 그 칼에 찔리지 않을 것이라 자신하는걸까? 어째서 자신만은, K차장처럼 유능하지 못하고 지독히도 평범한 중년이 되지 않으리라 확신하는걸까? 가면이 답답해 좀처럼 쓰지를 못하고 메신저창을 닫아버리는 막내를, 몇몇은 프락치라 놀려댔다. 가면을 쓴 채로 토악질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청나라 말기 아편굴의 풍경을 가진 회사 뒷편 너구리굴에서, K차장은 근 십년간 입에 대지 않았다던 담배를 꼬나물었다. 들이키는 품으로 미루어보건대 그가 금연을 한 것은 한두해쯤이나 될까. 십년이라 쳐주기엔 목넘김이 예사롭지가 않다. 어 띵허다 하며 K차장이 과장스럽게 현기증을 연기하는 사이에 나도 한 개비를 문다. 초겨울의 모습은 본디 햇살이 아니라 바람에 있는 것이리라. 얼음장 같은 맹풍에 정수리를 짓누르던 졸음은 날려가고, 겨울햇살의 나른함도 그저 저의 냉혈한적 본성을 가리기 위한 가면이었음을 깨닫는다. 사무실을 나가는게 눈치보여 코트를 두고 나왔는데, 날선 겨울바람의 첨단은 그 무방비를 결코 놓치는 법이 없었다.

K차장이 뱉어낸 시퍼런 담배연기를 보며 멍을 떠올렸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 침전한 멍은 이내 두 발 붙여 서있는 대지가 될 것이다.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동장군조차도, 짐승보다 짐승같은 세상살이의 상처만은 눈덮어 보듬어줄 것이다. 성탄의 눈이 녹은 후에는, 거뭇거뭇한 상흔만이 남을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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