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바스켓에 한시간쯤 넣어두어 입안이 얼얼해질 정도로 시원해진 토닉워터. 머금으면 아카시아향이 혀를 간질이는 꿀 서너스푼. 온힘을 다해 짜낸 티컵 한컵 정도의 레몬즙. 당장이라도 파도가 몰려올 듯 짙은 바닷색을 띠는 블루큐라소 시럽. 섞고 섞어 잔 끝에 레몬 한조각을 끼워넣으면 엘도라도의 태양이 되고, 샤워크림을 한움큼 뿌리면 순백의 구름이 된다. 순도높은 알코올을 살짝 뿌려 자그마한 불꽃을 질러 약간의 탄내까지 가미해주면 가을 하늘 레시피 완성. 청명한 블루빛 칵테일에 온몸이 흠뻑 취하니 발걸음마저 가벼워졌다. 완벽한 주말이다. 여기가 회사란 사실만 제외한다면.

마감기간에 치여 퀭해져버린 눈빛, 꺼끌꺼끌한 턱밑, 터덜터덜 될대로 돼라는 식의 발길. 거진 반야수의 차림으로 담뱃불을 붙이는데 누군가 나를 빤히 보고있다는 기분이 문득 들어왔다. 은근하면서도 동시에 확신에 가득찬 시선의 향기에 형언할 수 없는 행복감이 밀려온다. 합정 버스정류장 저멀리서 땡땡이 원피스를 입고 내게로 안겨오는 그녀처럼, 하늘하늘 걸어온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이 느낌. 유전자 깊숙한 곳 어딘가에 새겨진 듯한 본능에 가까운 반가움. 통유리에 비친 새파란 너의 얼굴을, 꼭 일년만에 마주한다. 가을이 왔다.

왠지 올해는 네가 영 숫기없는 소년처럼 다가온 것 같다. 유들유들한 맛이 없이 처서가 지나니 마치 스위치를 툭하고 켜듯이 그렇게. 어쩌면 한반도의 계절이라곤 이제 여름과 겨울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탄하는 우리네 불평에 퍽 토라져버려, 너의 존재를 한껏 뽐내어 보고픈 마음일런지도 모른다. 참 반갑다. 셔츠의 소매 사이로 스며들어오는 가을기운과 재회의 포옹을 나누고, 입술을 간질이는 가을바람과 환영의 키스를 나눈다. 유별나게 혹독했던 여름과의 투쟁은 새로운 절기의 개선행진으로 막을 내린다. 해피엔딩.

참으로 간만에 느껴보는 한기. 너는 변함없이 맑지만, 나는 성장인지 변화인지 변질인지 모를 이유로 퍽도 많이 변했구나. 잿빛 교복을 입었었고, 모의고사 점수에 좌절했었고, 소총과 군장을 짊어졌던 적이 있었고,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담배연기로 뻐끔이기도 했었다. 또한 선명한 꿈을 그리기도 했었고, 잊지못할 친구들을 만났고, 누를 수 없는 자부심에 충만했었고, 경복궁 앞 한어귀에서 가슴 속에 따스한 향유를 가득 붓는 듯한 달달한 첫키스를 나누기도 했었다. 벼려진 칼처럼 칼라를 다린 셔츠를 입은 지금까지도, 너는 다 보았겠지. 해마다 변해가는 내 모습으로 맑기만한 네 모습을 마주하며 어쩐지 부럽고 서러웠다. 다른 한편으로 늘상 꼭 같은 모습으로만 찾아오는 네가 어쩐지 가련하고 미련해보였다.

이십칠세의 반야수는 안다. 너는 머지않아 떠나버릴 야속한 녀석이란 걸. 붙잡으려 해보아야 깃털같은 흔적 하나 남겨줌 없이 사그라져버릴 녀석이란 걸. 그렇게 또, 지난날들과 같이 동장군이란 구면의 객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인사도 없이 훌훌 일어설 너에게, 다음 이맘때까지도 다시 못 만날지 모르니 미리 인사해둔다. 굿모닝, 굿애프터눈, 앤 굿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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