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가 뭡니까?" 이런저런 고상하고 작위적인 답변들이 떠오른다. 그러나 내가 딱히 액티브한 인물이 못 되므로 그럴때면 글쓰기라는 답변이 입안을 맴돌고는 했다. 그러나 차마 그 답을 꺼낼 수가 없다. 요 몇달간 나는 글을 쓴적이 없었다. 소재가 없었던 것은 아니매, 도통 손가락이 움직이질 않았다. 당최 내 취미란 무엇인가? 간밤에 잠을 이루지 못해 일주일치 셔츠를 다림질하며 꿈에도 그리웁던 취미란 놈을 찾았다. 다림질은 언제나 답을 준다. 온갖 번민으로 미간의 계곡이 펴질 날이 없을 땐, 주름 하나없이 새하얀 셔츠가 착실한 주번 격으로 난삽한 백묵자국을 지워주었다. 생각없이 생리대로 보낸 나날들이 문득 부끄러이 여겨질 땐, 얄궂게 터져나온 실밥이 붙잡고 늘어질만한 사고의 실타래를 제공해주었다. 분명 나는, 다림질을 좋아한다.

하얀색 클래식핏. 첫 정장을 구입할 때 함께 샀던 셔츠. 8전 1승 7패라는 전적을 안겨준 애증의 셔츠. 다리미를 쥘 때면, 별 이유도 없이 그 녀석에게 가장 먼저 손이 가곤 한다. 처음이란 그런 것이다. 별달리 특별할 것은 없지만 처음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도 가장 먼저 다림질을 해야할 당위성이 부여된다. 일전엔 가늠할 수 없을만큼 깊은 어디에선가 새어나오는 순수하고도 순박하기 그지없는 백색을 띨 때가 있던 녀석이었지만, 혹독한 여름나기를 하며 제법 물든 티가 난다. 나와 닮았었고, 또 나와 닮아있다. 함께 물들었다, 나도. 누렇게 혹은 파랗게. 휘핑크림을 한껏 휘저어놓은 카페모카처럼 물들어 저만의 색을 찾아간다. 내가 서른이 되면 녀석은 세살이 되겠지. 백도 아닌, 황도 아닌, 청도 아닌 알수없는 그 색상에 너와 나는 무엇을 느끼고, 또 무엇을 반추할까? 겁탈당한 자아를 부끄러워할까? 순백의 흔적마저도 잃어버리고 마는걸까? 그것도 아니면 자괴도 변질도 아닌 회색지대 어딘가에서 삶의 중압감에 짓눌린채 널 떠올릴 수도 없게 될지도 모르겠다. 망각. 언제나 망각을 두려워하면서도, 나는 언제나 망각했다.

하늘색 클래식핏. 취업 후 부랴부랴 샀던 셔츠들은 죄 푸르딩딩하다. 본디 흰색은 그렇지않아도 덩치가 큰 나를 더욱 부풀어 보이게 했는데, 그렇다고 신입사원이 원색 셔츠를 입고 다녔다간 유독 꼰대기질이 강한 R부장이라든가, 유독 보수적인 R부장이라든가, 유독 나를 싫어하는 R부장이라든가에게 반가운 소리는 듣지 못했을 것이다. 내 존재를 흐리게 하는 색. 튀지 않으면서 회색이든 네이비든 어떤 정장에도 무난하게 어울리는 색. 그러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꿈을 한껏 담지한 색. 삶이라는 이야기 속 기승전결은 주인공인 나만 모른다. 그래서 언제나 나는 바로 다음 페이지가 이야기의 절정일 것이라며 꿈을 꾸었다. 창공의 색. 언젠가 힘껏 날아오를 것이라고, 햇병아리는 생각했었다. 젠장. 등판을 다리다보니 곰팡이가 슬어있네. 광경이 익숙한만큼이나 서글퍼져서, 곧장 신발장 저 멀리로 던져버린다. 8월 마감을 마치고 야간택시로 귀가길에 오른 나는 하늘색의 본 의미를 깨닫는다. 조선식 샐러리맨은 화이트칼라가 아니라 블루칼라구나. 그래서 하늘색이구나.

다크네이비 슬림핏. 모 항공사 면접에 떨어졌던 날. 낙방을 확신하면서도 이상하게도 긴장이 풀리질 않아 입고있던 흰색 셔츠가 땀에 절어버렸던 날. 도저히 그대로는 여자친구를 만날 수가 없어 유니클로에서 이 셔츠를 집었다. 세탁기에 다른 셔츠들과 함께 넣었다간 먼지투성이가 되어 나와버리는 녀석. 동화를 거부하는 마지막 자존심이자 사랑 앞에서 용트림하는 테스토스테론의 허영. 정돈되고 인상깊은 색상이지만 롤러테이프로 세심히 먼지를 떼어주며 다리지 않으면, 그 매력이 죄다 거세되고 만다. 남자의 자존심이란 기실 지독히도 연약한 것이다. 르쿠르제 무쇠냄비처럼 한껏 저의 무게감을 자랑하다가도, 아차하고 떨구는 순간 서너개의 파편으로 쩍 하고 박살나버린다. 그녀를 만나는 토요일. 굽혀진 허리가 직립을 되찾고 기어들어간 목소리가 저의 음량을 되찾는 토요일. 다크네이비를 입고 남성성을 탈환한 나의 모습은 진실의 덤불 속 능구렁이 같은 가식일까, 가식의 운해를 뚫고 우뚝 선 진실일까?

코발트블루 슬림핏. 장당 10만원의 사치를 부렸던 탓인지, 지금처럼 단추 실밥이 터져나오기 전까진 홀아비의 원룸방과 영 어울리지를 못했다. 하얀색 클래식핏이 언제나 첫 타자라면, 코발트블루 슬림핏은 언제나 4번 타자다. 한껏 최고조로 달아오른 다리미를 잠시 식힌다. 다른 녀석들을 거침없이 다려대다 유독 코발트블루 앞에서만 주춤하게 되는 것은, 이 녀석이 폴리에스터 혼방이어서일까, 아니면 첫 사치의 쾌락마저도 볼품없이 늘어져버리는 걸 견딜 수 없는 소년의 망설임일까? 미적지근한 온도가 영 과감치 못해서인지, 팔을 다리면 칼라가 구겨지고, 가슴판을 다리면 팔이 구겨지고, 등판을 다리면 다시금 가슴판이 구겨졌다. 꾹꾹 눌러 다리고나면 당최 다리기 전과 다른 점을 찾을 수가 없다. 물욕처럼. 영 정돈되지를 못하고, 영 채워지지를 못한다. 그러면서도 그 부질없음이 또다른 나날들의 지향이 되고, 하루를 견인하는 등불이 되겠지.

자기자신에 관해 글을 쓸 때면 언제나 나 자신은 왜곡된 객체로 전락해버렸다. 무덤덤한 희극은 찬란한 드라마로 부연되고 과장된다. 절절한 비극은 중의적인 낱말 하나 정도로 요약되고 은폐된다. 영웅으로 혹은 역적으로. 영웅도 역적도 되지 못하는 나인줄을 내가 가장 잘 알고 있건만, 항상 그런 식으로 자기소개서 삼십줄의 도마 위에 올라있었다. 왜곡의 구김들을 밋밋한 평지로 다림질하며, 나는 나의 색채를 찾는다. 그 색채들을 바라보는 주체로서의 나를 발견한다. 하얀색과 파란색. 그리고 스물일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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