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 한 캔을 사들고 집앞 편의점 의자에 앉았다. 원래 술을 마실 생각은 없었다. 그저 주말 하루종일을 방구석에 처박혀 보내는 것이 더 이상 휴식으로 여겨지지 않았고, 아이스크림과 담배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날마다의 다채로운 고민거리에 빠져 편의점 냉장고 앞에서 서면서도 결론은 항상 같았다. 황동빛깔의 밀러캔. 딱히 맛있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도, 늘상 제값만큼의 청량감을 주는 맥주다.

종일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무엇인가를 하고싶은 동시에, 아무것도 하기가 싫은 이 지독한 아이러니를 당최 어떻게 감내해야만 하는가? 샐러리맨으로서 맞이하는 주말이 어느새 열여섯주째 가량이 되었지만, 그 질문에 대한 마땅한 답은 찾을 길이 요원하다. 그저 저물어가는 일요일 밤을 하릴없이 아쉬워하며 잠에 빠져들고, 월요일 아침 9호선 열차에서 뼈저리게 후회할 것이다. 집앞 선유도라도 걸어볼걸 하고. 선유도는 여기서 세수하고 옷입는 시간까지 포함해도 기껏해야 10분 남짓한 거리밖에 되지 않았지만, 제대로 본적이 한번도 없었다. 이사온지 얼마되지 않았을때 버스를 잘못내려 지나쳐와본 기억. 그 풍경의 파편 정도가 내가 아는 선유도의 전부였다.

대학시절 나는 이따금씩 정처없이 걷는 것을 좋아했다. 자정이 다 된 시간에 홀로 안암에서 나섰다가, 정신을 차리고보니 강동구에 다다른 적도 있었다. 그럴때면 다시 봤던 풍경을 또 보기가 싫어 부러 다른 길로 돌아오거나 할증택시를 타곤 했다. 5년이란 시간이 짧지는 않았었는지, 내가 안암동을 떠날 무렵엔 성북구 내에 내가 가보지 못한 동네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때야 그러고서도 다음날 수업 따위 한번쯤 땡땡이 치면 그만이었지만, 지금은 그랬다간 또다시 열장쯤의 자기소개서를 새로 써야한다는 것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가만 있어보자. 대학 때와 샐러리맨이 된 지금을 마디 절(節)자를 써가며 구분하는 것이 합당하기나 한걸까? 지난 4개월간 나는 어엿한 직장인이 되었다기보다는, 그저 월급이 내리꽂히는 대학생이 되었다는 느낌이 강했다. 다달이 백만원씩의 적금을 간신히 입금하고나면 여남은 돈은 아낌없이 모조리 써버렸다. 듀퐁 셔츠를 주문하고, 휴대폰을 바꿨다. 이외에도 기억나지 않는 여러 곳에 돈을 썼다. 물질로는 삶의 허기를 달랠 수 없다는 고상한 스님 멘토들의 말과는 달리, 물욕의 충족은 "취업해봐야 다 똑같이 힘든 삶이구나"하는 내 회의감을 잊게 하기에 충분했다. 11시까지 야근을 해도 주머니 속 새 스마트폰을 꺼내보면 이러한 삶의 목적이 비교적 선명하게 다가오는 것 같았고, 다른 와이셔츠와 도저히 구분하기가 힘든 새 셔츠 가슴팍에서 누군가가 필기체 D자를 알아봐준다면 주말 출근까지도 무릅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 좋은 폰으로 내가 하는 일이라곤 고작해봐야 조간신문을 읽거나 블로그에 글을 쓰는 정도. 듀퐁 셔츠의 경우, 외려 다림질거리만 늘어 무슨 결혼식 날에나 입는 예복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면서도 웃기는 것이 쇼핑을 멈추질 못한다는 것이다. 갖고싶은 것이 더 이상 없는데도, 갖고싶어질 것을 찾아 쇼핑몰을 끄지 못했다. 무언가 나를 위해 보상을 해주고 싶었다. 지독한 입시난과 취업난을 헤쳐내고 당당하고도 가련한 샐러리맨으로 우뚝 선 내게, 상상하지도 못할만큼 멋진 것을 스스로 선물해주고 싶었다. 그 선물이란게 당최 뭘까? 빔프로젝터에 플레이스테이션4를 사면 그놈의 "나에게 주는 선물 찾기"는 끝이 날 수가 있을까? 여전히 나는, 어린애다. 돈버는 대학생이다. 딱 그 정도가 나의 지금 모습일 뿐이다.

가만보면 사람이란 언제나 한 시절 전을 추억하며 사는 존재일런지 모른다. 대학에 와서는 고등학교 때를, 군대에서는 대학 신입생 때를, 복학생이 된 후엔 군 시절을 추억하며 살았다. 한 관문을 넘고나서야만 그 관문 속에서의 일들이 깔끔하게 정제되어 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앞으로도 나는 적게잡아 30년간 직장생활을 할텐데, 그렇다면 30년이 지나서야만 부장님의 한숨소리라든지 경영기획부에 올린 품의가 다섯번을 거절당한 것 따위를 이야기할 수 있는걸까? 늘상 새로운 삶의 모습들은, 내 머릿 속에 가지런히 정리되질 못하고 희미한 심상으로서 그저 부유하고만 있을 뿐이다. 그것을 문장으로 게워내자니, 마치 잠자리채로 안개를 잡는 느낌과 같다.

나의 경우, 글을 쓸 때면 항상 어떤 지점을 갖고 거기서 일정 반경 이상 벗어나지 않도록 강박관념에 가깝게 주의를 기울이는 편인데, 초보 샐러리맨으로서의 삶을 써보자니 참 들쑥날쑥하여 문장이 마음에 차지가 않는다. 그것은 그만큼이나 내 생활이 정리되지 않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또 그건 그것대로 나의 모습이겠지. 또다시 선유도 한어귀를 오밤중에 배회하고, 그렇게 5년 여가 흘러 영등포구에 내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때 즈음이 되어서야, 나는 샐러리맨으로서의 삶을 능숙하고 깔끔한 문장 속에 담아낼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이만 자자. 내일은 월요일이니까. 또다시 쳇바퀴에 들어가야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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