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의 순간이 고통스러웠다해서, 고독을 배제한 채로 삶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대학에 들어갔던 첫 해, 점심시간이 되면 설렘 가득한 웃음소리들을 장맛비 피하듯 뒤로 한 채 국제관 화장실 3사로에서 편의점 도시락을 목구멍에 꾸역꾸역 넘기곤 했다. 혹 누군가가 나의 궁상을 알아채진 않을까 두려워, 한껏 소리를 죽여 입 안에 변취 섞인 음식물을 밀어넣다보면 그 고요함만이 나를 편안케 했다. 그러나 봄날 캠퍼스를 가득 채운 웃음소리는 언제나 내 외투를, 또 내 마음을 축축히 적시어 도저히 증발하지를 않고 나를 무거이 침전케 하는 것이다. 휴대폰 전파조차 통하지 못할만큼 조밀한 철판으로 둘러싸인 그 화장실 사로에는, 자유로운 고립감과 고독한 해방감이 공존했다.

속을 뒤집어 놓을 듯한 악취 가운데에서도 선명하게 나를 감싸안았던 그 고독의 기억은, 어린 아이가 힘껏 눌러가며 색칠한 검정색 크레파스 자국처럼 지우려 해도 도저히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그 기억은 삶의 한 파편으로 흩날려 버리지를 못하고, 마치 연무와 같이 삶을 자욱이 뒤덮어 내가 세상의 모든 순간을 마주하는 하나의 스탠스가 되었다. 부유하는 삶의 모든 파편들을 모아보아도 그것들만으로는 어딘가 기괴하리만치 선명함이 과장된 미완성작에 불과했다. 고독이라는 회색빛 연무가 짙게 드리워져 무채색과 파스텔톤의 중간쯤이 되어야만, 그것이야말로 비로소 나의 삶이라고 인정할 수가 있는 것이다. 고독이라는 공허가 삶을 채운다는 것은 내게 고통스러운 역설로 다가왔다.

그때부터 나는 고독을 보다 온전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무엇인가를 온전하게 바라본다는 것은 그것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피하지 않고 진솔하게 인정함이다. 고독은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 생기는 현상이 아니라, 늘상 내 몸을 타고 흐르는 혈류와도 같았다. 잠시나마 잊혀질 수는 있을지라도, 또다시 세상에 홀로 내던져지는 때가 오면 도저히 떨쳐낼 길 없는 그 중압감이 늪과 같이 내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내가 걸어온 얼마되지 않는 족적에는 언제나 식은 아스팔트처럼 검게 굳은 고독의 찌꺼기가 한움큼씩 묻어 있었다.

*

나의 결혼여부와 회사의 손익구조가 당최 어떤 지점에서 연결되는지는 모르겠지만, 2개월차 신입사원인 내게 선배들은 곧잘 언제 결혼할 것인지를 물어왔다. 그것은 일종의 습관과 같은데, 스물일곱 또래의 신입을 보면 생각도 하기 전에 입이 절로 움직여 저런 질문을 뱉어내는 것 같았다. 그럴 때면 나는 최대한 솔직하게, 지금 여자친구와 결혼한다면 곧바로라도 하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크지 않다고 답했다. 그야말로 회사라는 장소에서 내게 허락된 많지 않은 말들 중 가장 진솔한 답변이고, 그 이후에 쏟아지는 그 여자친구와는 언제 결혼하는지 등의 질문에는 그저 영업용 웃음으로 일관했다. 나는 그런 세세한 개인사항까지 알릴 의무는 없으며, 그들 또한 그런 세세한 사항까지 알 권리는 없기 때문이다.

정작 그들은 고독의 본질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결혼을 왜 해야하느냐?"라는 나의 질문에 그들이 "고독하지 않기 위해서"라 답변한 순간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한 단순무식한 명제를 논박하는 것만큼 쉬운 것은 없다(물론 마음속으로만 논박하긴 했지만). 반려자가 있음에도 외롭다며 거리의 젊은이들을 두고 노골적인 품평회를 열어대고 유흥업소를 제 집 안방 드나들듯 오가며 금전으로 아양을 사는 수많은 유부남녀들이 훌륭한 방증이었고, 막상 내게 결혼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인간들 중에서도 이 부류에 속하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나는 차라리 그들이 솔직하게 이야기해줬으면 했다. 남자들은 안정적인 섹스파트너가 필요하고, 여자들은 안정적인 수입원이 필요하다고.

열정이 식고난 결혼은 독신보다도 고독하다. 최소한 내 생각은 그러했다. 뜨거운 신혼의 열기가 세월의 파도에 차가이 식어버린 이후에는, 평생간의 역할극이 남을 뿐이다. 가장이라는 거창한 가면 뒤에서 언제나 자유를 갈망하고, 종국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갈망마저 상실한 채 타성에 의해서 움직이는 허수아비가 되고만다. 퇴근시간이면 애꿎은 후배들을 붙잡아 술먹이며 귀가시간을 최대한 늦추려는 타성의 허수아비들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몹쓸 역병을 다음 세대까지 전염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고독하지 않기 위해 결혼한다"며 자위행위를 해대는 그들은 욕지기가 올라올만큼 배리적이기 이전에 속이 쓰릴만큼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고독은 반려자가 있든 없든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일과를 마치고 집에 왔을 때에, 세수하고 복잡한 9호선에 오를 때에, 심지어 사랑하는 아내 옆에 누워있다가 문득 등돌려 누울 때에도 항상 고독은 그곳에 있다. 세상을 등지는 일에도 길동무가 있을 수 없고, 아이들이 독립하고 반려자가 떠난 다음엔 바로 그 새까만 고독이 안락의자에 앉아 담배를 태우며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때가서 그 까만 존재를 새로이 여길 필요도 없는 것이다.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을 내가 애써 부정했던 불과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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