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에는 휴일이 없다. 생의 참호에서도 잠시나마 몸 뉘일 여유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새해 벽두부터 어느 종합학원 정문 앞에는 일개 대대 규모의 소년병들이 끝모를 한 일자 획을 이루고 있었다. 소년병들은 아직 갖지 않아도 괜찮을 회색빛 피로감을 벌써부터 바리바리 짊어졌다. 소년병들의 부르튼 손에는 입시라는 적군에 맞설 소총조차 쥐어지지 않았다. 그들의 모습은 차라리 나치로부터 레닌그라드를 방위하기 위해 징집된 소련 병사들의 모습에 가까웠다. 성공이라는 이데올로기를 기치로 내건 그 소년병 대대는, 가늠조차 하지 못할 망상을 향해 죽음의 약진을 감행할 것이다. 일신을 지켜낼 소총조차 없는 그들은, 1등급이라는 자위수단을 얻기 위해 옆 전우의 죽음을 방관하고 환영할 것이다. 그것은 희망을 빙자한 잔인한 비극의 프롤로그였다.

이를테면 성공이라는 것은 집단최면에 가깝다.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명제가 결코 공리가 될 수 없음은, 소년병들을 생의 사지로 내몰은 비열한들도 알고 있다. 그러나 쓸모있는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서, 사회는 가능한 한 많은 구성원들을 경쟁하게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사회는 그렇게 양성된 노예병들을 내림차순으로 정렬하여 순서대로 차출하고, 간택받지 못한 자들은 사회 최전선에서 방패막이로 이용되거나 저마다의 자생사회를 구축하여 연명한다. 청춘을 담보로 이룰 길 없는 성공의 시들어버린 해바라기가 된 어린 대부업자들은, 부도채권만을 아귀에 쥔 성인으로 성장한다. 그들은 치욕조차도 잊은채 나체로 발가벗고, 자유를 대가로 속박을 사는 사회의 경매장에서 창부 역할을 자처한다. 그것은 거스를 길 없는 운명의 지침과도 같다.

평생을 노예로 살아온 자에게 시민권과 자유가 주어진다면, 틀림없이 그 노예는 기껏 주어진 권리를 팔아버리고 벗어날 수 없는 노예적 타성으로 회귀할 것이다. 성장한 소년병들은 또다시 유희의 자유를 팔아넘기고, 스스로를 취업과 공무원 시험이라는 잿빛 쇠사슬로 옭아맬 것이다. 만신창이가 되어 갈기갈기 찢어 발겨졌을지라도 성공이라는 기치는 여전히 그 힘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이른바 Korean Dream의 본질이다. Dream이라 단어가 쓰인 수정테이프가 덮이기 이전에는 Delusion이 쓰여있다. 망상으로 진격하는 존재들은 저마다의 얼굴을 스스로 짓이긴 망자의 모습을 공유하고 있었다.

성공이라는 망상은 누구나 평등히 지배하기에 충분했다. 어린 소년병과 나이든 노예병,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식자와 무학자, 악당과 용사를 불문하고 모두가 신기루를 좇는다. 망상이 망상이었음을, 신기루가 신기루였음을 알게될 초로에 이르러서 그들은 자신들을 지배했던 지향점을 상실하거나, 혹은 차마 포기치 못한 지향을 맹목으로써 바라볼 것이다. 그 맹목은, 늙어버린 노예병들의 자식을 또다시 소년병으로 만들 것이다. 도그마 혹은 이데올로기. 이 사회를 지배하는 Delusionism이다. 망상주의는 다음날의 끼니부터 걱정해야만 하는 빈자의 목덜미조차도 굳세게 쥐고 놓아주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의 고통을 잊고 싶은 빈자일수록, 망상을 자신의 정맥으로 주사하는 짓을 그만두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현대의 피그말리온을 자처하지만, 남는 것은 완부(腕部)에 새겨진 적갈색 피멍 뿐이다.

은평구 응암동. 역 출구에서 나오면 금이 쫙쫙 간 연립주택과 세월의 향이 물씬 풍기는 빌라로 빼곡히 채워진 대로변과 마주하게 된다. 그 대로를 따라 500미터 가량을 걷다보면, 미처 페인트칠이 끝나지 못해 텁텁한 시멘트색을 띠는 세층짜리 건물이 있다. 1층에는 저녁시간에도 한산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연탄구이 고깃집이 있고, 3층에는 아이들이 지향모를 허공에 기합을 내지르는 태권도장이 있다. 층간은 자물쇠 없는 화장실이 자리를 차지하고, 언제 청소했는지 모를 좌식 변기에는 누런 황태가 덕지덕지 끼어있다. 변이라도 보려치면 문고리를 꽉 붙잡고 있어야만 한다. 금방이라도 붕괴할 것만 같은 석회빛 입방체 2층에는 저소득층 아동을 돌보는 복지시설이 위치하고 있다. 재작년 가을부터 작년 초봄까지 내가 봉사활동을 했던 곳이다.

글의 진솔함을 위해 고백하는 바이지만, 내가 그곳에 처음 발을 들이민 것은 순수한 사명감 때문이 아니었다. 내 발길이 그곳에 이르게 한 것은, 출생 이후 이룬 바가 없어 텅 비어버린 백지 이력서에 한 줄이나마 채우고자 하는 생존본능이었을 뿐이다. 그런 녀석을 코흘리개들은 꼬박꼬박 "선생님"이라 불러주었고, 그 호칭은 내게 과분하다 못해 참람스럽기까지 한 것이었다. 기껏해야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란 망상을 망상인줄 알면서도 아이들에게 주입하는 일 뿐이었다. 하루는 지독한 회의감이 들어 아이들에게 망상으로부터 벗어나 하고싶은 일을 하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내게 돌아오는 것은 당최 이해할 수 없다는 아이들의 표정과, 공부 의욕을 죽이는 쓸데없는 말을 자제하라는 학부모의 컴플레인 뿐이었다. 이 세상은 어떻게 생겨먹은 것인가. 잠시나마 일었던 내 사명감은 또다시 생존본능으로 환원되었다.

선생 소리를 들어본 자라면 누구나 느꼈겠지만, 학생 중에서도 특별히 정이 가는 녀석이 있고 그렇지 않은 녀석이 있다. 마지막 한달간 내가 전담했던 소녀 D는, 미안하지만 확실히 후자에 속하는 아이였다. 이 잿빛 세상에서 아이들의 존재를 총천연색으로 빛나게 하는 것은 어른들이 상실해버린 생기라는 것인데, 고작해야 중학생인 D는 만사에 찌든듯한 표정으로 일상을 일관했다. 단언컨대 그 표정은 새벽녘 인력시장 잡부의 그것과 흡사했고, 확실히 한창 멋부릴 소녀가 가질만한 표정은 아니었다. 가늠치 못할만큼의 피로는 D의 표정을 일그러지게 하고, 이내는 그녀를 완전히 억눌러 일어서지조차 못하게 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경험치 못한 것을 이해한다고 말할만큼 뻔뻔한 위인이 못된다. D의 일거수일투족을 관망할 수 있다고 해도, 나는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어둠까지는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단지 짐작만 할 따름이었다.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목구멍 끝까지 머금고 있던 이야기꽃을 피워내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D는 곧장 책상에 엎어졌다. 그 오체투지는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닌, 무시무시한 아귀힘을 가진 불가시적 존재에 의한 것으로 여겨졌다. 쉬는 시간이 끝나도 부러 깨우지 않으면 D는 절대 일어나지 않았는데, 간신히 일으킨 그녀의 얼굴은 역류한 혈류 탓인지 더욱 퉁퉁 부어갔다. 어디가 아픈가, 피곤한가 등을 물어도 짜증 일색이었고, 나는 이내 D에게 신경쓰기를 포기했다. 한 명 때문에 의욕있는 다른 학생조차 포기할 수는 없다는, 내 딴에는 철저히 공리주의적인 결론이었다.

그런 D를 전담해달라는 복지사 선생님의 요청을 들었을 때, 나는 솔직히 달갑지가 않았다. 숙제를 해오지 않거나 수업시간에 조는 것 정도에는 나는 매우 관대한 편이었다. 심지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것 또한 나는 허락했다. 그러나 어떻게든 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내 모든 시도에 "몰라요"라는 대답으로 일관하는 D의 끝모를 무기력증은, 나로서도 어찌하기가 힘든 것이었다. 예상대로 수업은 전혀 진행될 줄을 몰랐고, 한달이 다 지나도록 예비고1 문법 교과서는 그저 처음 열 페이지 정도만이 나달나달해졌을 뿐이었다. 나는 엄격함 따위 걸레짜듯 모조리 짜내고 구연동화까지 흉내내며 수업을 진행해보았지만, D는 그러한 과정마저도 고통스레 여겨졌는지 매번 울음을 터뜨렸다.

여담이지만, 메가스터디 손주은 회장이 대학시절 과외했던 경험을 이야기하는 동영상을 본 적이 있다. 그 이야기에 등장하는 여학생이 D와 꼭 닮아있었기에, 특히 관심을 갖고 시청했던 기억이 난다. 손 회장은 공부 안하던 고3 여학생에게 어떤 치욕을 주었고, 어떻게 때려가며 공부를 시켰는지 자랑스레 떠벌렸다. 그렇게 그 여학생은 서울대에 진학하여 고시를 패스했다는, 결국 가장 전형적인 현대 동화의 내용이었다.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렇다면 내가 D에게도 그랬어야 했는가? 망상을 좇지 않으면 (손 회장의 말을 빌리자면) 창부만도 못한 삶을 살것이며, 망상을 좇는 것만이 네가 영위해야할 유일한 삶의 양식이라고 D에게 쏘아붙여야 했는가? 그랬다면 나는 틀림없이 지금쯤 살인자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용두사미라. 픽션없는 내 일기엔 손 회장의 일화와는 달리 극적인 결말 또한 없다. 내가 봉사활동을 끝마치던 시점에도 문법책의 10페이지 이후는 여전히 새책이나 진배 없었고, D가 울음을 멎거나 활기차게 쉬는 시간을 보내는 일도 없었다. 모종의 이유로 허리를 곧추세우는 것마저도 힘겨운 아이에게 망상을 향한 돌격을 지시하는 것은, 비난받아야 마땅할 범죄였다. 자신의 모든 지향이 망상임을 알았을 때에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자들이나 망상을 꿈꿀 수 있는 것이다. 확실히 D에게는 그럴 힘이 없어보였다. 그저 맏언니의 다음 학기 등록금과 다음 달의 가스비가 심폐부를 후벼파는 D에게, 너절한 성공 스토리 따위를 들려주는 만행은 외려 그녀가 더욱 세상으로부터 눈과 귀를 닫게하는 데에만 일조할 것이다.

마지막 수업에도 울증에 가득찬 D에게 나는 차라리 무기력으로부터의 탈피를 요청했다. 공부가 아닌 다른 무엇도 좋으니, 한번 시작해보라 충고했다. 책상에 얼굴을 박고 있는다해서 실존하는 세상이 비존재로 일갈되는 것이 아니다. 무기력이라는 암덩이는 D의 성장에 따라 그녀의 양분을 앗아먹으며 똑같이 성장할 것이고, 이내는 그녀의 의지를 완전히 짓눌러 지배하려 들 것이다. 주체성 없이 무기력한 그녀에게는 망상의 추구만이 요구될 것이며, D는 자신이 이루지 못해 아쉬운 바를 또다시 망상으로 가공하여 아들딸들에게 심어줄 것이다. 참람스럽게도 "선생"이라는 호칭을 듣는 무능력한 내가 D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그것 뿐이었다. D는 처음으로 내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었고, 나는 그 끄덕임의 진정성을 의심치 않기로 했다.

망상을 이겨내는 것은 주체성이다. 적어도 내가 내린 결론은 그랬다. 사회로부터 주어지는 지향점을 용감히 거부하고, 완전한 주체성만을 추구하는 자만이 망상이 아닌 실체에 가까워질 것이다. 성공이라는 기치는 결과적으로 극소수의 승리를 보장하는 매커니즘이며, 그 이외의 이들을 노예적 타성으로부터 탈출하지 못하게 하는 족쇄다. 그러나 용자는 아무도 없었다. 너도, 나도 모조리 망상을 버리지 못했다. 전장에서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고도 행군의 목적을 의심치 않는 우리가 신기루의 테두리에 이르렀을 때에, 그곳에는 쓸쓸한 소년병의 무덤만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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