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을의 아침하늘을 감히 요약할 수 있는 표현 따위는 없었다. 부두를 덮쳐오는 한바탕의 풍랑, 마음을 덮쳐오는 한켠의 절경은 그저 10월 중순 어느 날의 말 못할 느낌으로만 간직될 수 있었다. 새파란 도화지 위에는 페르시아를 물리치고 개선의 행진길에 오른 아테네 함대와도 같은 구름 행렬에, 한 스푼의 감동과 또 한 티백의 쓸쓸함이 그려졌다. 청춘의 일상을 담은 도화지들은 모종의 연결고리를 통해 서로 맞물려 기억의 톱니바퀴를 이루고, 이내는 스물여섯의 한 청년을 완성해내었다. 청년 속엔 풍경이 있었고, 풍경 속엔 청년이 있었다.
그리고 운명의 순간은 찾아온다. 세파의 바다 속에 던져진 총천연색 청년은, 물묻은 수채화가 번져버리듯 색채와 윤곽을 잃고 뭉개져버린다. 그리고선 이내 깨닫게 되는 것이다. 지워져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수채화 물감이 아니라 유성잉크로 쓰여진 활자로 자신을 가공하여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바다 속에 자신을 던져본 청년은 더이상 자신의 형체가 사라지지 않음에 안도한다. 동시에 한때는 찬란했었던 색채의 부재에 회의한다. 회심 속 절망에 빠진 청년을 홀로 두고 활자의 종이배는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조류에 의해 알 수 없는 곳으로 순항해 나아갈 것이다. 지독한 폭풍우에 종이배가 갈기갈기 찢어져 침몰하는 순간에도, 여전히 활자들은 청년의 단편을 담지하고 있을 것이다.
종이배를 띄워보내고 문득 고개를 치켜드니 경추에서 우지끈하고 장작패는 소리가 들려온다. 청년은 그것이 우습다고 생각했다. 하늘을 바라 살아온 청년의 목은, 위로 치켜드는 것조차도 하나의 도전이 되어 버렸을만큼이나 아래를 향해있는 데에 익숙해 있었다. 한 편의 코미디와 같은 역설이다. 청년은 한번도 보지도 못한, 보려고 하지도 않았던 그곳에 대한 맹목을 후회한다. 그곳의 실재에 대해 회의한다. 그 와중에도 목은 다시금 힘없이 아래로 아래로 떨구어진다.
새벽 버스 창가에 자욱이 낀 불투명 위에 청년은 부르튼 손등으로 투명의 여백을 만들어냈다. 회백색 불투명의 캔버스 안에는 세상의 풍경화가 그려진다. 그리고 차디찬 바깥 공기와 후텁지근한 버스 냄새가 심술을 부려 투명한 풍경화에 성에를 엎지를 때까지, 청년은 하염없이 흐려져가는 자신의 작품을 바라본다. 세상의 풍경화 속엔, 여물지 않은 아침 햇살 아래 여전히 지난 밤의 숙취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취객들이 있었다. 머리엔 희끗희끗한 때이른 눈이 내리고 복부에는 가죽벨트를 끊을듯한 산맥이 융기한 중년들이 쭈그려 앉아있는 광화문 거리는, 어쩌면 청년이 타고있는 버스의 종착역일지도 모른다.
청년은 불꺼진 거리에서도 반딧불처럼 빛을 유지하고 있는 편의점에 들어간다. 차게 식어있는 김밥과 커피를 집어들고 졸음이 가시지 않은 또다른 청년에게 여남은 잔돈을 내민다. 전자레인지에 1분여를 돌렸건만, 김밥엔 여전히 찬 맛이 감돌았다. 곱게 다린 와이셔츠에 혹 김가루라도 묻을까, 손바닥만한 김밥을 한입에 넣어버린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가련히 여길 여유가 없음을, 청년은 깨달은지 오래되었다. 네다섯 시간을 니코틴 결핍상태로 있어야할 것이 떠올라 네 개비 남짓 남은 담뱃갑을 단숨에 피워 없앤다. 다리라도 편하게 쉬었으면 좋으련만, 서울의 심장부에서도 새벽5시부터 여는 카페는 찾을 수 없었다.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하거라 하는 아버지의 문자를 받았지만, 정말로 편하게 했다가는 또다시 새벽의 냉기 속으로 내몰려야함을 청년은 몇차례 낙방을 통해 알고 있었다. 자아는 불투명의 독방 안에 완벽하게 유폐된 채, 세상의 저울 앞에 선 청년의 얼굴에는 어딘가 일그러진 인위적인 미소만이 떠올랐다. 그리고선 순백의 A4 용지를 빼곡히 채운 흑백의 활자 덩어리를 게워낸다. 이내 세상이 달갑지 않은 눈길로 그 활자 덩어리를 거부하면, 청년은 더 많은 활자로 채워진 종이뭉치를 토해내고선 슬픈 웃음을 지어보일 것이다.
문득 몇가지 의문이 청년의 가슴을 총알처럼 관통한다. 왜 미련과 후회란 놈은 항상 이미 늦어버렸을 때가 되어서야 올까? 왜 더이상 멈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기 자신도 하나의 인간이라는 사실이 떠오르는걸까? 어째서 나의 전진이 아무 지향도 갖고있지 않았음을 이제서야 깨닫게 되는 것일까? 이렇게될 줄 알았다면, 나는 그 청년에게 좀더 많은 것들을 선물해주어야 했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어야 했고, 더 많은 사람들과 더 오랜 시간을 함께 해야했다. 경치좋은 곳으로 함께 여행도 갔어야했고, 방황이라는 달콤한 휴식을 두려워 말았어야 했다.
길지않은 세월이 지나고, 또다시 휘황한 색채가 하늘에 그려진다. 그 풍경 속에 더이상 청년은 없다. 모두들 그렇게 아저씨가 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