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왕. 플루토. 거창하게도 저승세계의 지배자란 뜻이지만, 전(前) 행성 주제에 지구 따까리 역할이나 하는 놈보다도 작아서 영 그 이름의 위용이 살지를 않는다. 모름지기 인간이 죽음에 대해 갖는 거대하고 추상적인 공포를 고려하자면 명왕이라는 칭호는 외려 목성에 더 어울렸으리라. 우주의 먼지 한 톨 크기도 안되면서 딴엔 크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라하는 인간이 처음 명왕성을 발견했을 때는, 아마도 적잖이 실망했을 것이다. 태양계의 끝판왕이라 함은, 뭔가 다크하고 강려크한 존재였어야 했다. 근데 이건뭐 태양계의 수호자 역할을 하는 목성처럼 강력한 것도 아니고, 토성처럼 예쁘게 생긴 것도 아니고, 천왕성이나 해왕성처럼 러브라인을 꾸릴만한 비슷한 행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존나 작고, 존나 춥고, 존나 볼거없는 그 왜행성은 저승 지배자라는 이름값의 반푼어치도 못하는 루저로 보였겠지.
근데 이상하게도 명왕성을 보면 태양계 한 귀퉁이에 떨어져 있는 먼나라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 정감이 간달까? 장장 250여 년에 걸쳐 태양 주위 한바퀴를 빨빨거리고 돌아봤자 누구도 잘했다며 땀 닦아줄 놈 없고, 빛의 속도로 가도 4시간 반 정도가 걸리는 거리에 떨어져있는 존만한 놈들이 행성이다 행성이 아니다 따위를 논하여 자존심에 크나큰 상처를 낸다. 공전에 입시나 취업을 대입하고 존만한 놈들에 "남들"이라는 오지랖 넓은 대중을 대입하면, 어 왠지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얘긴데? 좀 멀리 떨어져있다 뿐이지 그녀석은 꼭 우리같은 인생을 살고있다. 아니면 우리가 명왕성 같은 인생을 살고 있든가.
필시 과학자들은 목성과 토성이 어째서 그리 거대해졌는지에나 관심이 있지, 명왕성이 왜 그리 존만해졌는지엔 크게 관심이 없을테다. 명왕은 억울하다. 태양으로부터 하도 거리가 머니 땡겨올만한 밑천도 없었을 것. 떡고물은 이미 안짝의 금수저들이 다 주워먹은 상태다. 없는 밑천 싹싹 긁어모아 그래도 월세방이나 하나 구했나 싶었는데 그뿐이다. 덩치가 더 불어나기는커녕 내 덩치에 육박하는 애새끼 카론까지 딸리고나니 안그래도 바닥난 쌀통은 또다시 반절이 난다. 속은 얼어붙고 있는데 시발것 눈치없는 소행성들이 계속해서 처박아대니 겨울철 입을만한 두터운 대기조차 없는 명왕은 더욱더 상처투성이가 된다. 근데 빛의 속도로 4시간 반 떨어진 놈들은 목성같은 거대행성이 될 노오력을 하지 않았다며 무시한다. 차라리 이럴거면 목성이나 토성 위성계에 들어가는 편이, 좀 쥐어짜이는 인생을 살더라도 지금보단 신세가 좀 폈을런지 모른다.
뭐 그나마도 행성계에 끼워줄 때는 사정이 좀 나았다. 어찌됐건 태양계 끄트머리에서 행성이라고 불릴만한 천체는 명왕이 유일했으니 "새로운 지평"이라는 뜻을 가진 탐사선도 쏴주었고(물론 명왕성은 걍 지나가다 어찌사나 한번 들른 거지만), 교과서에도 점 한톨 크기로 실어주긴 했었다. 죄다 존나 작다, 존나 춥다, 존나 볼거없다는 이야기긴 했어도 모두가 내 존재를 알아줬으니 그나마 나았다. 근데 목성이나 토성에 비교해가며 작은 크기를 굳이 만천하에 드러낼 필요까진 없었잖아? 작디작은 치부를 욕보인 명왕의 남성성은 그렇게 거세되었다. 차라리 그건 같은 행성들이니 괜찮지, 심지어는 행성 축에도 못끼는 따까리들과 크기 비교를 당하고 있으니 아무리 식어버린 존만한 얼음덩어리여도 어찌 속에서 열불이 일지 않겠나. 결국 소행성 충돌이면 공평하게 너도 한방 나도 한방인 것을.
서러운건 그뿐이 아니다. 거꾸로 자전하는 새끼, 드러누워서 편하게 공전하는 새끼 등등 특이한 놈은 명왕뿐만이 아닌데, 명왕의 공전궤도가 좀 찌그러져 있어서 감히 높으신 해왕성님의 공전궤도를 침범한다고 해대니, 큰놈이 하면 로맨스고 작은놈이 하면 불륜이다. 어째서 다른 놈들의 일탈은 개성으로 취급받는데, 명왕의 일탈은 눈흘김의 대상이 되는가. 어차피 아무도 관심도 안주는 세상, 공전이라도 내 맘대로 돌겠다는데 왜 지랄들이야. 어쩌면 그게 폴록이 찍은 점 하나의 가치와 내가 찍은 점 하나의 가치가 다른 이유일테다. 똥을 싸도 목성급, 하다못해 천왕성급은 되는 놈이 싸야 작품이 된다. 헬태양계에서는 목성은 뭘해도 목성이고, 명왕은 뭘해도 명왕이다.
태양빛을 받지 못해 따스하지 못한 것을, 날때부터 냉혈한 놈이었다 손가락질 해대니 억울해 미칠 지경이다. 조금만 더 덩치가 있었다면 명왕의 얼음은 순백의 상징이 되었을 터, 그러질 못해서 지옥의 왕이라는 음침한 이름까지 붙었다. 생각해보니 태양 가까이에 태어나지 못한 것이, 또 크게 태어나지 못한 것이 죄라면 죄다. 출생마저도 자산이고 덕이라 참칭하는 세상이니 명왕은 대역죄인이다. 먹고살기가 쉬웠던 시절이 언제 있었겠냐만은, 조금의 희망도 보이지 않는 것은 거참 너무하다.
과학적 지식이야 내게 그다지 없으니 차치하고서라도, 다음과 같은 감성적인 이유에서라도 명왕성은 다시 행성계에 편입되어야만 한다. 우리와 제일 비슷한 삶을 살고있는 놈을 우리 손으로 내쫓으면 대체 누가 걔를 끌어안아줄까? 태양계인이면 명왕성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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