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프랑스 이후 유럽협조체제Concert of Europe

나폴레옹 이후의 유럽국가들은 크게 두가지의 양상을 띠게 되었어. 첫째는 유럽의 회의체제가 고정화되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더이상의 혁명을 막기 위해 유럽이 대동단결했다는 것이지.


프랑스가 유럽 전체를 석권한 것은 시간적으로는 매우 짧은 사건이었지만 그 여파가 굉장했다. 지난 시간 설명했듯이, 프러시아를 제외한 유럽국가들은 프랑스를 강대국 반열에서 끌어내리는 것까지는 원치않았고,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프랑스가 약화되면 다음번에는 러시아가 유럽패권국의 자리를 넘볼 것이라는 우려였지. 따라서 파리1조약이나, 나폴레옹이 잠시 복귀한뒤 다시 체결된 파리2조약은 프랑스 입장에서는 상당히 우호적이었어. 프랑스는 결과적으로 1790년의 국경선으로 회귀되었지만, 아주 적은 금액의 전쟁배상금만 부과하면 되었고, 플러스해서 승전국의 군대 점령비용만 좀 부과하면 되는 정도였지. 다만 프랑스가 다시는 패권을 노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 몇가지 장치를 고안했어.



자 위의 지도를 잘 살펴보길 바래. 유럽은 프랑스의 강대국 지위를 유지시켜주는 대신, 프랑스를 포위시켜. 특히 홀란드(네덜란드)와 당시까지만 해도 통일되지 못하고 갈가리 찢어져있던 이탈리아반도의 맹주인 사르디니아Piedmont-Sarnidia를 강화시켜서 프랑스의 북동부와 남동부를 막아놓지. 또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의 패권을 놓고 경쟁중이었는데, 이탈리아 반도의 권한을 모두 오스트리아에게 부여해. 이로서 이탈리아반도는 오스트리아의 사실상 보호령으로 전락하지. 또한 프랑스의 접경국인 프러시아가 라인란트Rhineland와 색소니Saxony 지역을 획득하여 프랑스의 동부전선을 포위해. 특히 프러시아는 프랑스와 최전선에서 맞서는 유일한 강대국이었기에 이정도의 세력강화는 필수적이었지. 또한 갈가리 찢겨져있던 독일에 독일연합German Confederation을 결성하는데, 비록 명목상 기구이고 독일 통일에는 별 기여를 하지 못했지만 프랑스에 대항하여 독일을 강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볼 수 있어. 마지막으로 영국은 전략적 해군기지인 Heligoland와 몰타Malta 섬을 얻게돼.


강대국들의 동맹형성도 활기를 띄기 시작했는데, 앞서 말했듯이 이들의 목적은 바로 프랑스 견제와 추가 혁명의 방지였어. 러시아 알렉산드르 1세의 주도로 형성된 신성동맹Holy Alliance(1815)은 당시 보수적 왕정국가였던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러시아의 왕들의 협조체제였고, 4국동맹Quadruple Alliance(1815)에는 영국까지 끼어들어서 완전한 유럽협조체제가 형성되지.


혁명의 확산과 유럽협조체제의 가동

액스라 샤펠 회의The Congress of Aix-la-Chapelle(1818) : 이 회의의 주된 주제는 바로 프랑스 점령군의 철수문제였어. 근대 민족주의의 태동지인만큼 외국군의 점령에 대한 프랑스의 반감은 심각했고, 점령군들은 이에 대해 상당한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어. 더이상 있어봤자 얻을것도 없었고, 오히려 프랑스의 반감이 심해지면 제2의 프랑스혁명과 제2의 나폴레옹이 등장하지말란 법도 없었지. 따라서 영국-프러시아-오스트리아-러시아 4국동맹 연합군은 점령군 철수를 결정했고, 이와 더불어 프랑스에 또다른 양보책을 건의해. 바로 자신들의 4국동맹에 프랑스를 편입시켜 5국동맹Quintuple Alliance을 결성하는 것이었지. 그렇다면 왜 강대국들이 그렇게 프랑스에게 쳐맞아놓고도 프랑스를 동맹에 편입시켰을까? 첫째는 프랑스의 안보불안감을 감소시키기 위함이야. 쥐도 구석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고립된 프랑스는 강대국의 영향력 행사에 상당한 안보불안감을 느끼고 있었어. 정치학에서 방어적 현실주의에 의하면, 이러한 안보불안감이 군비증강을 낳고, 이내는 전쟁을 낳게되고, 유럽국가들은 이를 알고 프랑스를 포용하게 되었지. 둘째의 이유로는 프랑스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함이야. 동맹의 기능에는 가맹국에 대한 영향력 확보도 포함이 돼. 어찌됐든 프랑스는 패전국임에도 강대국의 지위를 완전히 회복하지.


나폴리 혁명(1820) : 이 시기에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중 하나인 나폴리에서 헌정질서를 요구하는 혁명이 발생해.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혁명이었기 때문에 이를 보호령으로 삼고있던 오스트리아가 심각한 위협을 느껴서 이를 진압하고자 했고, 이를 논의하기 위해 트로파우와 라이바흐에서 회의가 열려. 프랑스 입장에서는 이탈리아반도가 오스트리아와의 경쟁지역이었기 때문에 나폴리 혁명이 더욱 확산되어 오스트리아까지 퍼지길 원하고 있었지만, 패전국 입장에서 그런말을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어. 반면 영국은 당시 러시아 육군과 무너졌지만 여전히 강력한 프랑스 육군을 견제하고 있었는데, 지리상으로 프랑스와 러시아 중간지점에 위치한 오스트리아가 이 둘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으로 판단, 오스트리아가 약화되는 것은 영국이 원하는 상황이 아니었어. 오스트리아가 약화되면 프랑스와 러시아가 날뛰더라도 유럽대륙에서 더이상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남아있지 않게되기 때문이지. 영국과 오스트리아의 입김으로 인해 결국 나폴리 혁명은 진압되었어.


스페인 혁명(1820) : 시간상으로 스페인 혁명은 나폴리 혁명에 앞서 일어났어. 그런데 강대국들의 대처가 1823년에나 되어서야 이루어지게 돼. 그 이유는 바로 러시아의 오지랖에 대한 유럽 각국의 견제심리였지. 스페인은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헌법이 존재했는데, 스페인 왕은 헌법을 무시하고 전쟁군주로서 통치하여 국민의 반감을 샀어. 또한 나폴레옹 프랑스 이전의 라틴아메리카에서의 거대한 식민지를 되찾고자 다시 해외팽창을 시도하는데, 이에 군대의 반감 또한 높아졌지. 생각해봐. 안그래도 프랑스에게 털리고털려서 힘든데 또 라틴아메리카까지 가고싶겠냐구. 이에 러시아 알렉산드르 1세 황제는 때아닌 오지랖을 부리게 돼. 이 스페인 혁명을 저지하기 위해 바로 러시아가 진압에 나서겠다는 거였지. 그러나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러시아와 스페인은 유럽의 극과 극에 위치해 있어. 러시아 군대가 스페인까지 가기 위해서는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랑스 영토를 통과해야했고, 결국에 스페인까지 도달하게 되면 영국의 턱밑에 오게되는 꼴이었지. 따라서 러시아를 제외한 타 강대국들은 러시아의 개입을 극구 반대하고 나섰어. 이 때문에 스페인 혁명 이후 3년간 강대국들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하게 되었지. 결국 강대국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프랑스의 단독개입을 선택했어. 지리적으로 프랑스가 스페인이 가장 가까웠고, 스페인의 봉기를 진압할 수 있을정도로 강력한 육군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지.


동방문제의 대두와 러시아의 성장



자 일단 이쯤에서 유럽문제는 대충 안정화되었어. 대신에 유럽입장에서는 동방인 오스만 제국(터키) 문제가 또다시 수면위로 부상하게 되었지.  오스만은 투르크 인들이 건국한 제국으로, 그 범위가 굉장했기 때문에 다민족국가였어. 전성기에는 유럽대륙의 헝가리까지 그 영향력이 미쳤고, 과학기술은 유럽 국가들을 능가하였지. 그러나 유럽국가들이 지들끼리 물고 뜯으며 경쟁을 통한 발전을 이루는 동안, 오스만은 상대적으로 경쟁하는 국가가 적었기 때문에 어느순간부터 쇠퇴하기 시작해. 동방문제가 대두된 건 바로 이 오스만이 쇠락하고 있던 시기였지. 당시 오스만의 별칭이 유럽의 병신병자였을 정도야.

cf) 오스만의 다민족문제는 이후 발칸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의 기폭제로도 작용한다.


오스만은 여러모로 망조를 띠고 있었는데, 첫째로 유럽세력이 약화되는 오스만에 대하여 영향력을 갖고자 오스만에 침투하기 시작했어. 러시아는 오스만과 접경하고 있었기에 영토적으로 침투, 영국과 프랑스는 정치적, 경제적 수단을 통해 오스만에 침투하였지. 둘째로 오스만이 쇠퇴하면서 중앙정부의 권한이 약해졌고, 이에 따라 지방통치자가 준독립적 권한을 갖고 행세하게 돼. 가장 유력한 인물이 바로 이집트의 파샤(황제 술탄 아래의 지방장관)이던 메흐메트 알리Mehemet Ali야. 메흐메트 알리는 자신의 세력권을 확장해나가며 오스만을 좀먹고 있었지. 셋째는 지배계층인 투르크 계에 대한 비 투르크계의 민족반란이야. 특히 이는 세르비아, 그리스 등에서 심각했지.


그러나 이런 병신같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오스만은 유럽 국가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요충지였어. 오스만은 사실상 러시아와 타 유럽강대국 간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고 있었지. 특히 오스만을 가운데 끼고 있는 오스트리아는, 오스만이 무너질 경우 러시아와 직접 대적해야될 판이었고, 러시아 입장에서 또한 오스만이 무너지게 되면 분명 유럽세력들은 오스만을 나눠먹기에 바쁠거고, 그렇게되면 강대국들과 직접 접경해야하는 지경에 이를 수 있었지.


그리스 혁명 : 이렇게 오스만이 곧 오늘내일하는 시기에 오스만령 그리스에서 혁명이 일어나. 그리스 혁명세력은 러시아에게 지원을 요청하는데, 러시아가 오스만과 가장 가까운 강대국이었고 전통적으로 오스만과 경쟁하여 감정이 좋지 않은 국가였기 때문이지. 러시아는 그리스 혁명세력의 요구를 받아들여 오스만 측에 기독교인들에 대한 탄압을 중지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내. 이는 그리스를 순수히 도와주기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가 독립하게 되면 그리스에 대한 이권을 러시아가 독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지. 그러나 오스만은 러시아의 최후통첩을 무시하고 러시아와 단교(1821)해. 이로 인해 알렉산드르 1세는 꼭지가 돌게 됐지.


영국과 오스트리아는 다급했어. 만약 그리스가 독립에 성공하게 된다면 필시 그리스는 러시아의 세력권에 복속될 것이고, 그렇게되면 그토록 두려워하던 러시아의 팽창이 현실화되는 것이었어. 이에 영국 외상 케슬레이와 오스트리아 외상 메테르니히는 "니가 거기에 개입하는 순간 너는 프랑스와 다를바 없어짐"하며 알렉산드르 1세를 설득하여 러시아의 개입을 막아. 그토록 혁명에 반대하던 러시아이기에 그리스 혁명을 지지할 명분도 없었기에 러시아는 이를 받아들여 그리스 혁명에 대한 개입을 포기하지. 그러던 중 오스만은 성공적으로 그리스 혁명을 진압해(1825).


요 형이 새로운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


그러나 알렉산드르 1세가 사망하고 뒤이어 황제에 즉위한 니콜라이 1세 러시아 황제는 생각을 바꾸게 돼. 아니 이제 프랑스도 몰락했고, 영국도 어차피 직접적으로 러시아에 대항 못할거고, 프러시아는 쩌리고, 이제 남은건 오스트리아인거야. 그런데 러시아군은 바로 나폴레옹의 먼치킨 군대를 물리친 당대 최강의 육군이었지. 부족할게 뭐있나 싶어서 다시 그리스에 대한 개입을 결정하게 돼. 도저히 러시아님을 막을 수 없습니다 영국은 러시아를 더이상 견제할 힘이 없다는 걸 알았고, 차라리 영국도 오스만에 개입해서 떡고물이라도 얻어먹어보자는 심정이었지. 여기에 난데없이 프랑스도 가세했어. 프랑스는 자신을 목조르고 있던 강대국들의 의견분열을 최대한 활용해보고자 했어. 오스트리아가 여전히 그리스 개입에 반대하는 동안 영국-프랑스-러시아는 연합함대를 구성하여 오스만을 압박하지.


그렇지만 이때까지도 영국과 프랑스는 오스만과 전쟁을 하자는 뜻은 아니었어. 유럽의 병자인 오스만과 전쟁해서 오스만이 약화되면 결국 러시아 좋은일 시켜주는 거였거든. 그런데 아니나다를까 러시아 니콜라이 1세는 바로 오스만 측에 전쟁을 선포(1828)했어. 그러나 약체인 오스만을 상대로 러시아는 상당히 고전하여 1여년이 지나서야 승리하게 돼. 이는 러시아군의 비효율과 무능, 장비낙후 때문이었지. 어찌됐거나 러시아가 승리한 이 전쟁에서 러시아는 아드리아노플 조약을 체결하고 영토를 대폭 확장하게 돼.


그리스 혁명을 빌미로 오스만과 전쟁을 한 러시아는 세르비아, 몰다비아 공국, 왈라키아 공국(현대의 루마니아)을 획득하였고, 그리스는 터키로부터 자치권을 획득하고 러시아 세력권에 편입돼(독립이 아님). 영국과 프랑스는 벙쪄있었어. 우려했던 일이 현실화되어 러시아가 팽창했을뿐만 아니라, 자기네들은 떡고물도 없이 끝나버린 전쟁이었지. 오히려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오스만이 지나치게 약화되었기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에게는 손해만 된 결과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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