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0년대 유럽의 혁명

이번 이야기는 다소 지루한 이야기가 될수도 있겠어. 1830년대에는 마치 짜고치는 고스톱처럼 유럽 각국에서 여러 종류의 혁명이 발생하였는데, 이 혁명들이 가지는 의미는 크지않아. 다만 이러한 혁명들에 대처하는 유럽 강대국들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이 가운데서 유럽협조체제가 어떻게 굴러가게되는지 잘 증명되지.



프랑스 7월혁명 : 먼저 1830년에 프랑스에서 7월혁명이 발생해. 이건 혁명이라기보다는 사실상 정변에 가까운데, 사회적으로 큰 파장이 있던 사건은 아니고 단순히 프랑스의 왕조가 교체되는 사건이야. 프랑스의 유력 가문으로는 나폴레옹 퇴출 이후 강대국에 의해 옹립되었던 루이 18세의 부르봉 왕가가 있고, 또 루이 필립(위 사진)을 중심으로 하는 오를레앙 가문이 있었어. 사실 부르봉 왕조의 루이 18세는 외국군대에 의해 옹립된 황제이고 더군다나 파리 조약에 승인함으로써 프랑스의 패배를 인정했기 때문에 프랑스 국민들의 여론이 좋지 않았어. 이를 이용해서 오를레앙 가문의 루이 필립은 쿠데타를 일으키고 황제에 즉위하지. 러시아는 이에 프랑스에 대한 개입을 주장하지만 타 강대국들의 반대에 의해 무산돼. 그 이유로는 먼저 루이 필립 그 자신이 강대국들에게 저자세로 나갔고(모험적 외교 지양하고 1815년 비엔나 체제 수용), 영국/오스트리아는 러시아군이 프랑스까지 진압하러 오기를 원하지 않았지. 지난 시간에 살펴본 스페인 혁명 때와 그 상황이 비슷하다고 보면 될거야. 그런데 프랑스의 7월혁명은 프랑스에서만 그치지 않아. 이는 이탈리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벨기에로까지 전파되지. 


민족주의적 혁명 : 벨기에, 폴란드 혁명

벨기에 혁명 : 프랑스 혁명 다음달인 1830년 8월, 네덜란드령 벨기에에서 벨기에인들이 네덜란드로부터 독립을 요구하는 혁명이 발생해. 그런데 코딱지만한 크기와는 달리 벨기에는 강대국들에게 상당히 중요한 전략적 가치를 지녔어. 벨기에는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영국-프랑스의 완충지대이자 프랑스-프러시아의 완충지대였지. 프랑스는 자신들이 벨기에 독립을 지지해주면 벨기에인들이 친프랑스적인 성향을 가지게 될 것이라 예상했어. 또한 1815년 비엔나 체제로 프랑스는 주변국들에 의해 포위된 상태였으므로 벨기에라도 그 포위망에서 빠져준다면 이득이었지. 따라서 프랑스는 벨기에의 독립을 지지해. 영국 또한 벨기에가 독립되면 친프랑스적인 국가가 될 것임을 예상했지. 그렇지만 벨기에 독립을 반대하게 되면 벨기에의 친프랑스적 성향이 더욱 강화될 것이고, 이렇게 되면 영국에게 이득이 될 것이 없었기에 별수없이 벨기에 독립을 지지해줘. 벨기에 지역에 별다른 이해관계가 없던 타 강대국들의 승인에 의해 벨기에는 결국 네덜란드로부터 독립돼.


그러나 네덜란드 왕은 빡이 치기 시작했어. 벨기에는 자기네 땅인데 다른 강대국들이 커피나 한잔하면서 벨기에를 독립시키니마니 하는 소리를 해대니 참을수가 없었던게지. 더군다나 네덜란드에도 민족주의 열풍은 피해가지 않았거든. 이 때문에 1831년, 네덜란드 왕이 강대국들의 결정에 불복하고 벨기에를 공격하지. 이미 자기들이 결정한 사안에 대해서 태클을 걸고들어온 네덜란드에 대한 괘씸죄와 벨기에를 독립시키는 것이 이득이라고 생각한 영국과 프랑스는 상호 협의하여 네덜란드군을 축출하기로 하는데, 이번에도 프랑스군이 단독으로 개입하기로 했지. 이는 스페인 혁명(1820) 때 프랑스가 보여준 신뢰감과 효율성에 의한 것이었어. 프랑스군은 네덜란드군을 성공적으로 패퇴시켰고, 영국과 프랑스 어떤 쪽에도 속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벨기에는 영세중립화되지.


폴란드 혁명 : 현대의 폴란드 지역은 1800년대 당시에 러시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라는 세 강대국에 의해 분할점령되어 지속적으로 핍박받았지. 1815년 폴란드 왕국이 러시아의 보호령으로 재건(러시아 황제가 폴란드 왕 겸임)되긴 했지만, 이내 1830년 11월, 폴란드는 완전한 독립 쟁취를 주장하며 혁명을 일으켜. 이 혁명은 러시아령 폴란드에서 최초 발생하게 되었지. 러시아의 오지랖은 여기서도 여실히 드러났지. 아 뭐 어차피 자기네들 세력권이었으니까 오지랖이라고 할 수는 없겠다. 무튼 러시아는 이번에도 개입을 주구장창 주장했지. 프러시아나 오스트리아 입장에서는 자기네 폴란드 땅에서도 언제 혁명이 발생할지 모르는데 러시아가 미리부터 진압해주겠다니 ㄳㄳ하고 찬성해줬지.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 땅과 거리도 멀고 이해관계도 없었기 때문에 "너네들끼리 알아서 하세요"하는 식으로 나와. 이에 폴란드 혁명은 러시아군에 의해 진압되지.

cf) 이러한 영국-프랑스의 폴란드에 대한 입장은 2차대전 때도 그대로 이어지게되는데, 1939년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이전에 폴란드를 수호하겠노라 선언했음에도 실제적인 도움은 하나도 주지 않아. 폴란드는 유럽의 천덕꾸러기였던 셈이지.


(내용과 관계없음)


여왕에 대한 반란 : 포르투갈, 스페인 혁명

포르투갈 혁명 : 혁명의 여파는 이베리아 반도에까지 확산돼. 나폴레옹 전쟁 당시부터 이베리아 국가들(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영국과 협력관계였어. 웰링턴 공작의 게릴라가 그 예시지. 이후 포르투갈은 영국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돼. 당시 포르투갈은 친영적인 마리아 2세 여왕이 집권하고 있었는데, 마리아 여왕의 삼촌인 돔 미구엘Dom Miguel이 마리아 2세를 축출하고 왕위에 올라(1828). 돔 미구엘은 자신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기존에 빨던 영국을 제치고 유럽 대륙강대국에게 알랑방구를 뀌기 시작해. 이에 마리아 2세는 자신의 아버지이자 선왕이던 돔 페드로Dom Pedro가 통치하던 브라질로 망명, 이 부녀는 돔 미구엘을 다시 축출하기 위한 계획을 짜지. 마리아 2세-돔 페드로 부녀를 도와준게 바로 영국이야. 돔 페드로와 마리아 2세는 영국의 지원으로 성공적으로 포르투갈에 상륙하여 돔 미구엘 정권을 붕괴시켜. 결과적으로 영국은 포르투갈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했고, 현대에 이르러서도 영국-포르투갈 관계는 매우 밀접하게 유지되고 있어.


2차 스페인 혁명 : 스페인에서는 또다시 혁명이 발생하는데, 1820년의 혁명이 군대의 왕에 대한 반란이라면, 1830년대의 혁명은 정변의 성격을 가졌지. 당시에 이사벨라 여왕이 스페인을 통치하고 있었는데, 여왕의 삼촌인 돈 카를로스Don Carlos가 포르투갈의 반란자 돔 미구엘과 합세하여 쿠데타를 일으키지. 자 이쯤 되면 포르투갈 혁명과 스페인 혁명의 공통점이 바로 여왕의 법적 정통성에 대한 반기라는 것을 알 수 있지. 그러나 포르투갈의 돔 미구엘이 패배함으로써 스페인 돈 카를로스도 수세에 몰리게 되었어. 영국이 이사벨라 여왕을 지지한 이유는 포르투갈 혁명 때와 같아. 스페인을 계속해서 영국의 영향권 하에 놓을 필요가 있었지. 프랑스 또한 이전에 1차 스페인 혁명을 진압해준 적(1820년)이 있었고 그 이후로 해서 스페인에 꽤나 떵떵거리고 있었지. 따라서 영국과 프랑스는 스페인의 정권교체를 원하지 않았어. 영국, 프랑스의 지원에 의해 스페인에서도 이사벨라 여왕이 다시 복권되지.

cf) 스페인어에서 Don은 존칭어. 돈키호테도 이름은 키호테다. Mr. 같은 의미라 해야되나? 무튼 이름은 카를로스임. 그냥 카를로스(까를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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