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이틀간 목감기가 심하게 들어있던 나는 늘 공부하던 학교 열람실의 온풍기 바람이 나의 눈과 코와 목구멍, 더 나아가 내 존재까지 바싹바싹 마르게 하고있는 것을 더이상 견딜 수 없게 되었고, 기분전환도 할겸 하루를 카페에서 혼자 보내기로 했다. 내가 가끔 바람이 불어 혼자서 카페에 와서 종일 커피를 세잔 네잔씩 시켜먹으며 우두커니 앉아있는 것은 내 삶의 또다른 별미다. 사람이 세상을 보는 시선은 모두 다르다. 누군가는 다른 사람의 치마가 무슨 색깔인지, 파마는 언제쯤 했을 것인지, 가방은 어느 브랜드의 것인지 등에 관심이 많지만, 누군가는, 특히 나와 같은 사람은, 나 자신과 직접적으로 관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사람이 설령 나체로 서있는 굉장한 미녀라 할지라도 별 눈길이 가지 않는다. 이것은 일면 선천적인 부분이 있어서,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은 각고한 노력을 기울여 관심을 가지려 노력하거나, 하다못해 작위적인 관심을 만들어내려해도 그것이 힘들다. 그런 저주받은 시선을 타고난 나에게 있어서 카페는 내 삶의 순간들 중 거의 유일하게 나와 관계하지 않는 타자에 대한 관심을 갖게하는 장소이다. 카페라는 장소에서 나의 시선이 이렇듯 바뀔 수 있는 이유가 매캐한 담배연기를 실내에서도 편하게 앉아 마음껏 마시며 늘 각성상태를 유지할 수 있어서인지, 평소에는 거의 마시지않는 커피를 서너잔씩 연거푸 들이켜서 나의 죽어있던 말초감각이 모두 새로 벼린 칼처럼 예민하게 되살아나서인지, 갑작스러운 환경변화에 내 신체가 유전자 보전에 대한 위협을 느껴 나의 동공을 확대시키고 염통의 박동을 가속해서인지, 아니면 이른 아침부터 출근하여 잠이 덜깬 표정으로 주문을 받던 아르바이트생이 카페 문을 열기전에 사람의 정신과 시선을 일깨우는 마법의 스프레이를 카페 소파 곳곳에 뿌려놓아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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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담배가 떨어져있던 나는 카페에서 5분 거리의 편의점에서 팔리아멘트 라이트를 한갑샀다. 그곳에서 카페까지 걸어오는 아침길은 간만에 먼지안개가 갠 서울공기 때문인지, 꿈결에서 희미한 상의 움직임만을 보아온 내 눈이 세수라는 아침마다의 성스러운 행위로 인해 개안(開眼)한 것 때문인지 한껏 쾌청했고, 초봄 태양의 깜짝 놀랄 정도로 따가운 햇볕 때문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어젯밤새 모두 야행짐승으로 변해버린 것인지 거리는 아무도 없이 한적했다. 그 길 오른편에는 낡고 조그마한 모텔이 있었는데, 그 모텔은 갖은 덩굴과 등나무로 장식이 되어있었다. 그 모텔의 주인장은 이제쯤 60년 평생을 그 모텔을 운영해온, 그다지 건강해보이지는 않지만 세상의 지저분한 이치쯤은 꿰뚫고 있다고 말하는 듯한 눈빛을 가졌음을, 나는 그 주인장을 본 적이 단한번도 없지만, 확신했다. 거리에는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가 마치 바다 위 요트가 물살을 가르는 소리처럼 들렸다. 오래전부터 생각했지만 그 두 소리는 생각보다 무척 닮아있다. 아마 어느 한쪽을 먼저 들려주고 그것이 어떤 소리인지 가르쳐주지 않는다면 어느것이 길위의 자동차 소리인지 어느것이 바다위의 요트 소리인지 구별해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자동차들은 직선도로에서 마치 평생을 함께할 것처럼 같이 달려가다가는, 이내 교차로에 이르러 각자의 길을 걸었다. 서로가 어디로 향하는지에 대해서는 일말의 의문조차도 품지 않은채, 회자정리라는 고사가 마치 세상살이에서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듯, 수많은 목적모를 자동차들은 성북구의 어느 도로라는 바다를 가르며 나로서는 도저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그 목적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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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게슈탈트 붕괴현상이라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어떠한 음절이나 단어를 보고있으면 처음에는 그것이 원래 의미하는 바의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계속 보고있노라면 그것들이 완전히 해체되어 원래 의미하는 이미지는 떠오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심리현상은 인터넷을 통해 퍼져나간 그저그런 루머일 뿐,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심리현상을 취급하지 않는다. 나는 심리학 전공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학풍의 심리를 배우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지만(전공이 아니라는 핑계보다는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더 옳은 이유겠다), 게슈탈트 붕괴현상이라는 것이 루머로 만들어진 것이 사실이라해도, 이 현상이 최소한 혈액형심리학 따위보다는 많은 함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에 귀를 기울이고 시선을 고정시키면 들리지 않던 것이 들리고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 이를테면 아무도 그들의 쿼츠 손목시계의 초침이 가는 소리나 카페모카의 거품이 터지는 소리에 신경을 쓰지않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들어오는 모든 데시벨을 진공청소기로 흡입해버린 듯 고요한 순간이나, 시계와 카페모카 잔에 가만히 귀를 대면 그 소리는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수많은 "대단한 것들" 사이에서 그들의 존재의 외침은 부러 듣지않으면 도저히 그런 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그들은 더할나위없이 명백히 존재한다. 작고 희미하지만 그들 또한 존재의 함의를 지니고 있으며, 어쩌면 "대단한 것들"이 오만하게 자랑하는 소음과 가까운 우렁찬 외침보다는 그 함의의 밀도가 비교할 수 없이 높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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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는 비교적 좁은 한층한층으로 구성된 4층 건물이다. 1층에는 초콜릿이나 치즈 따위가 올려진 허니브레드와 베이글을 전시해두었고, 도대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이름만 들어서는 전혀 알수없는 커피들의 이름이 빼곡히 들어있는 메뉴판이 있었으며, 카운터에는 아직도 꿈결의 커튼 속을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듯 졸려보이는 아르바이트생이 의례적인 인사를 했다. 사실 커피를 시키며 메뉴판을 보는 것은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바닐라라떼와 캬라멜마끼아또를 색깔로만 구별할 뿐이며, 카페모카와 모카치노의 맛이 어떻게 다른지를 말하지 못한다. 설령 말할 수 없는 미묘한 맛의 차이-이를테면 시나몬향이라든가-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카페모카에는 환장하지만 모카치노는 절대로 먹지않는 특이성향을 만드는 것은 드문 일이다. 인간의 혀가 수많은 맛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우리의 뇌는 그럴 정도로 예민하고 분절적이지 않다. 대충 "호감"의 영역에 가까우면 맛있다고 생각할 것이고, 대충 "비호감"의 영역에 가까우면 맛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맛에 특히 예민한 사람이 아니라면, 색에 특히 예민하지 않은 사람이 다홍색을 주황색이라고 뭉뚱그려 말하듯, 커피 메뉴판에서 어떤 커피를 골라도 별반 차이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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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과 3층은 비흡연석, 4층만이 흡연석이다. 아마 볼일이 급한 사람이 커피는 시키지 않고 볼일만 보고 나갈것이라는 생각에서인지 1층과 2층에는 화장실이 없고, 3층에 여자화장실, 4층에 남자화장실이 있다. 요즘 짓는 건물들은 이런 층구조가 비교적 당연시되고 있는데, 왜 항상 여자화장실이 남자화장실보다 낮은 층에 있는지, 왜 남자들만 화장실에 갈 때 매캐한 담배냄새를 맡으며 가야하는지는 의문이다. 남성과 여성이 다르고 여성은 신체구조가 연약하므로 배려받아야한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백화점의 수십층을 하루종일 오르내리는 여성들이 왜 카페에서는 고작 계단 한층 더 올라가는 것을 배려받아야하는지, 눈매운 담배연기가 남성에는 그다지 해롭지 않고 여성을 향해서만 크루즈미사일처럼 건강에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닌데 왜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용변을 보러가며 온몸에 담배냄새를 묻혀야하는지는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희생을 일방에게 강요하고 다른 일방에게 특권을 쥐어주는 것이 과연 남녀평등이고, 이런 것들이 당연해지는 것이 평등사회로의 진보인가? 뭐 됐다. 어쩌면 이런 것에 의문을 품고 어떠한 합리적인 잣대를 들이대며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이 행위 자체가 사회적으로 "찌질하고 옹졸한 남성"이라는 지탄을 받기에 충분한 근거가 될런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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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층 흡연석은 마치 카페 전체건물과는 따로 똑 떨어진 다른 차원의 세계인 듯 했다. 카페 전체에 은은하게 퍼져있는 몽롱하고 달콤한 향기와는 다른 담배냄새가 진동을 했고, 몇몇 사람들이 그 연기 가운데 연신 콜록거리며 또다른 연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들의 처량한 모습은 제국주의 영국 시절 만리타향 호주로 유배당해온 범죄자들을 연상케했다. 사회에서 담배가 죄악시된 것은 얼마되지 않은 일이다. 술이야 친구를 만나면 한번쯤 마실 수 있는 것이고, 노름이나 게임은 빠지지만 않을 정도로 하면 되고, 모르는 여자와 원나잇스탠드를 하는 것은 젊은 날에 해볼수 있는 어떤 특권처럼 여겨지지만, 유독 담배만은 그 자체로서 건강 이외에는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모질고 맹목적인 비판을 받고 있다. 물론 담배를 태우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담배연기를 맡게하여 그들의 삶의 질을 해치는 것까지 두둔하고자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렇다고하여 모든 흡연인들을 죄인취급하는 것 또한 그다지 바람직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최소한 술에 취해 살인했다는 사람은 있어도, 담배에 취해 살인했다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더이상 설 곳이 없어진 흡연자들은 깊은 골목 구석탱이나 한적한 카페의 옥탑층 등에 몰려 마치 청나라 말기의 아편굴과 같은 장면을 연출한다. 큰 길거리와 도로에는 더이상 담배꽁초를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지만, 궁지에 몰린 흡연자들은 구태여 드러내 찾을 수조차 없는 곳들에 꽁초를 버리기 시작했고, 세상은 철저히 비흡연자들의 세계와 흡연자들의 아편굴로 분절되어 간다. 그러나 그러한 탄압속에서도 흡연자들은, 마치 흡연이라는 행위가 권위에 의한 억압과 탄압 속에서도 반드시 수호해야하는 인간의 존엄성이나 되는 것처럼, 쉽사리 찾을 수 없는 세상의 어느 한 구석에서 나프틸아민과 니켈과 벤젠과 비닐 크롤라이드와 비소와 카드뮴을 들이마시고 내뿜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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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에 가까워올 무렵 어느 커플이 내 앞좌석을 차지하고 앉았고, 나는 이내 그들을 데생하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혔다. 남자는 여자에게 다음주에 한적한 교외의 펜션으로 가자고 유혹 중이고, 여자는 이내 남자의 속내를 다 알고있다는 듯 망설이는 척인지 아니면 정말로 망설이는 것인지 모를 묘한 표정을 짓는다. 단언컨대, 모든 남자는 성욕을 기준으로 보자면 다 똑같은 존재이다. 남자라는 동물은 페니스에 솜털이 난 직후부터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마주치는 모든 여자들과의 섹스를 최소한 한번 이상씩 생각한다. 여자에게 있어서 남녀사이에 친구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남자에게 있어서 최소한 그말은 순전히 그 여자에게 느끼는 성욕의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그 여자에게 성욕을 강렬하게 느낀다면 연인이 되고싶은 것이고, 별다른 성욕을 느끼지 못한다면 친구로 지내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친구나 연인이라는 직접적인 형태로 남자와 관계하는 여자들에게만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앞서 말했듯 "마주치는 모든 여자들"에 해당되는 이야기다. 남자들은 지하철이나 버스에서도 끊임없이 미니스커트를 입은 어떤 여성의 맨다리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어렵사리 눈을 뗀다고해도 그 맨다리에 대한 생각을 하지않는 것을 하지 못한다. 남자들은 여성이 두터운 니트와 미군 방탄복 두께의 패딩점퍼를 입어도 그 속에 숨겨진 가슴을 상상하는 존재다. 수컷들이 여자들에게 해주는 모든 것들은 종국적으로 그 여자와의 섹스를 위함이며, 일단 그것을 이루고나면 남자들은 곧장 차가워진다. 혹여나 차가워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음 섹스를 위함이다. 이는 여성의 오르가즘은 어느정도 시간을 갖고 지속되는 반면, 남성의 오르가즘은 사정과 동시에 끝나 잠이 쏟아지는 생리현상에서도 알수있다.
이런 점에서 남성은 생물학적으로 도저히 벗어낼 수 없는 호르몬이라는 굴레를 짊어지고 있다. 남성들은 그들의 어머니나 누이를 제외한 모든 여성들과 인간 대 인간의 교류를 하기 힘들다. 모든 남성들은 궁극적으로 모든 여성들을 성적 대상으로 상상하고, 그렇게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는 남성에게 있어서도 굉장한 굴레인 동시에 여성을 동등한 인간존재가 아닌 성적도구로 여기게하는 사고방식이다. 이제껏 역사상 여성을 억압한 것은 다름아닌 남성의 이러한 성욕기반적 사고방식이며, 남성이 성욕을 자신의 의지대로 조절할 수 있게하는 최첨단 칩 같은 것을 모든 남성의 뇌와 페니스에 심어야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남녀평등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동시에 남녀평등을 외치면서도 한편으로는 남성에게 보호받고 싶어하는 여성들의 이중잣대를 없애는 칩도 개발된 이후여야 할테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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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원자폭탄 이외에 가장 끔찍한 발명품을 꼽으라면 나는 반드시 휴대전화를 꼽을 것이요, 휴대전화 중에서도 최악인 것을 꼽으라면 나는 반드시 스마트폰을 꼽을 것이다. 요즘은 어딜가나 사람들의 시선과 포즈가 모두 똑같다. 모조리 스마트폰이라는 5인치 정도의 작은 화면에 눈을 박고 무엇인가를 열심히 보거나, 무엇인가를 열심히 쓰거나, 누군가와 대화를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저 배경화면을 의미없이 드래그한다. 차라리 혼자있는 무료한 시간만 그렇게 보낸다면 나을 것이다. 심지어 사람들은 친구나 연인을 만나서도 끊임없이 5인치 화면에 눈을 박고 떼지 않는다. 카카오톡으로 친구 A와 약속을 잡고 A와 만나면, A와 같이 있는 자리에서는 또다시 친구 B와 카카오톡으로 이야기한다. 그러한 행위로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이 세상과 인연의 그물망으로부터 단절되어있지 않다는 확신을 받고 싶어하며, 그러한 확신에서 안위를 느끼고 삶의 의미를 찾는다. 사람들은 점차로 스마트폰이라는 도구를 통하지 않고서도 인간이 얼마든지 드넓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매커니즘을 수십개쯤은 우습게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가고 있으며, 그러한 천부적인 매커니즘들을 포기한채 굳이 그러한 5인치짜리 작은 화면을 통해서만 소통하려고 한다.
사람들끼리 눈을 마주치는 일들이 줄어들었고, 잠시나마라도 "손에 아무것도 들고있지 않는 혹은 아무것도 할것이 없는" 허무와 고독이라는 것을 참아내기 힘들어진다. 인간의 정신은 고요와 정적에서 찾을 수 있는, 이를테면 쿼츠 시계의 초침 소리라든가 카페모카의 거품이 터지는 소리 등을 완전히 무의미한 것으로 매도하고 "대단한" 스마트폰에 매진한다. 인간은 사상과 사고의 자유를 외치는 한편으로, 끊임없이 방대한 그들 자신의 정신을 5인치 스마트폰에 구겨넣고 재단한다. 유비쿼터스가 "언제 어디서나"라는 뜻이라고 했던가? 좀 꼬아서 해석하자면, 내 생각에 유비쿼터스는 "언제"와 "어디서"를 완전히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어느 시간에 어느 장소에 있든 사람들은 똑같은 짓거리를 하고 있을뿐이며, 따라서 어느 특정 시간과 어느 특정 장소라는 특수성과 그 특수성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의미들은 모조리 사라진다. 이것은 인간에게 무한한 자유가 주어졌다고해도, 인간 정신이 그 자유의 방대함을 온전히 누릴만큼의 진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계속해서 자신의 사고를 가둬두고 제한시킬 수 있는 틀을 찾는다는 별수없는 "속박의 본성"을 보여주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