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단보도를 건널때에 중요한 것은 신호등의 색깔이 아니라 누가 먼저 발을 내딛어 건너냐는 것이다. 파란불이 들어와도 누구 하나 발길을 내딛어 건널 생각을 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필시 위험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건너기를 머뭇거리고, 빨간불이 들어와도 누구 하나가 발길을 내딛는다면 사람들은 움찔움찔 움직이려 한다. 가장 먼저 건너기를 주저치 않는 전위적 인물 한명, 또한 그 인물을 따르는 맹신자 두명만 있으면 횡단보도 사람낚시에서도 월척을 거둔다. 이를테면 사기꾼과 혁명가는 백짓장 한장 차이다. 이들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않고 빨간불 건널목을 먼저 개척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한 용기가 없는 대중들은 객관적인 신호등이 아닌 사기꾼이나 혁명가의 전위적 행위에 부화뇌동한다. 다만 혁명가는 대중을 다음 건널목으로 이끄는 것을 목표로 하는 반면, 사기꾼은 대중을 차가 쌩쌩 다니는 차도의 위험 속으로 이끄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 유일한 차이일 뿐이다.
허나 전위적 행위와 악의만으로 사기꾼을 사기꾼이라 부르기에는 무언가 빠진 듯 하다. 대부분의 사기행각에서 사기꾼은 대중을 선동키 위해 단순히 발을 내딛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할 필요가 있는데, 그게 바로 "말"이라는 것이다. 본디 "말"이라는 것은 화폐와 유사하다. "말"은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그것이 일컫는 것의 존재를 담보로 하며, "말"의 가치 또한 그 존재하는 것의 가치로부터 파생된다. 화폐유통량이 급증하거나 화폐를 발행하는 국가의 경제가 아작이 나면 그 화폐는 종이쪼가리가 되듯, 말도 많아질수록, 또 그것에 깔려있는 근간의 가치가 떨어질수록 허망한 것이 된다. 이러한 점에서 사기꾼들의 말은 이를테면 1차대전 직후 독일의 마르크화와 같다. 그들에게 있어서의 "말"이란, 존재치 않는것을 존재하게 하거나, 가치없는 것의 가치를 부풀리기 위한 수단이다. 말만 무성하지, 그 말의 숲을 파헤쳐보면 혀를 쯧쯧 찰만큼 실속은 없다. 화폐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근간이 부실한 "말뿐인 말"은 거품에 불과하며, 바늘로 콕 찌르기만해도 꺼져버리기 일쑤다. 일면 우리사회에서 "말 잘한다"는 뜻이, 말에 대한 본질적인 자격을 갖추었다기보다는 자신이 실제 가진 밑천을 대단한 것인양 부풀리기를 잘한다는 의미로 통용되는 것을 고려해보면, 말을 잘한다는 것은 사기꾼 기질이 있다는 소리와도 일맥상통한다.
*
현대에 이르러 예술이라고 일컬어지는 모든 분야는 대체로 근대이전 상류층에서 주로 탐닉되다가, 시대가 변하면서 점차 일반대중으로 확산되는 발전과정을 거쳐왔다. 허나 유일하게 이러한 시류에 맞서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미술이다. 현대미술은 점차 똥을 싸는 미술가와 그 똥을 찬양하는 평론가로 이루어진 "그들만의 리그"로 변질되고 있으며, 일반 대중은 지나치게 추상으로 향해가는 미술에 대해 더이상 감동을 느끼기 힘들게 되었다. 혹자는 일부 현대미술품의 경매가가 수십억을 넘어간다는 점을 들어 아직까지도 미술은 인간에게 감동을 주는 예술행위라 주장할지도 모르겠는데, 그래 그러면 그 미술품이라는 자산은 과연 유동성이 얼마나 되는가? 그 가치라는 것은 유희왕카드나 리니지 아이템의 가치와 진배없다. 그들 사이에서나 가치있고 의미있는 것일뿐, 당장 일반인이 그것을 사기위해 수많은 돈을 지불하려하지는 않는다. 대중주의적이 되어가는 음악과 문학은 그들 나름대로 가치의 객관성을 정립해 나아가고 있지만, 미술은 거꾸로 대중을 배격하며 자신을 고립시키고 있다.
현대의 순수미술가라는 직업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완벽한 구도를 포착해내는 것도, 선명한 색채를 선택하는 것도, 유려한 테크닉을 구사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척도들로 미술가의 실력이 평가받았던 시대는, "현실세계의 묘사"라는 현대 이전 미술만이 가지었던 사회적 역할을 카메라가 완벽하게 대체한 후에 막을 내렸다. 요컨대 미술은 그것만이 설 수 있었던 사회적인 입지(왕의 초상을 그린다든지, 전쟁의 전황을 기록한다든지)가 크게 줄어들었으며, 이러한 연유로 인해 미술가들은 또다른 생존방식을 찾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현실을 캔버스에 똑같이 묘사하는 것이 무의미한 행위로 전락해버린 현대에 이르러 미술가들은 이전 시대에는 일종의 일탈행위라고 여겨졌던 추상이라는 것을 너도나도(라고 쓰고 개나소나라고 읽는다) 시작하게 되었으며, 그 일탈행위 자체를 미술의 알파와 오메가인양 포장하고있다. 이를테면 몬드리안이든 칸딘스키든 폴록이든 정상예술(일반대중이 지지하는 미를 추구라는)이 주류인 상황에서나 흥미로운 일탈이 되는 것이지, 그 일탈이 주류가 된 상황에서는 그저 수많은 쓰레기들 중 하나의 쓰레기가 된다. 미술 본연의 목적은 인간이 작품을 보고 "자연스레"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인데, 현대미술은 그것과는 거꾸로 일반대중이 결코 아름답다고 여기지 못할 쓰레기를 추상해놓고는 그것에 온갖 철학적/사회적 의미를 부여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아름답다고 느낄 것을 강요하고 있다. 그 의미라는 것은 일반대중이 배경설명 없이 작품만 보고서는 알 수 없으며, 미술가 자신만이 아는, 아니 미술가 자신만이라도 알면 다행인 것이다. 이른바 작위적인 아름다움이다.
이러한 문제를 부추기는 것은 평론가다. 현대미술가의 대부분은 마땅한 철학적 기반이 부재하거나 미약하기 때문에 그것을 부여하는 역할은 평론가가 아웃소싱을 맡는다. 미술평론가들의 역할은, 미술가들이 싸놓은 똥을 금이라고 대중에게 선전하고서는 "그것이 똥이지 어찌하여 금이냐"는 사람을 심미안 없고 무지한 자로 매도하여 똥을 똥이라 하지 못하고 금을 금이라 하지 못하는 호변호금 불가의 세상을 구축한다. 평론가들은 권위의식과 선민의식에 의거해 지극히 자의적인 미적 관념체계를 대중에게 주입하여 미술가와 평론가로 이어지는 공생관계의 기득권을 수호한다. 미술이 대중에게 외면받자 먹고살 길이 없어진 그들의 발악이다. 미술은 더이상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야하는지에 대한 사용설명서가 없으면 해석하기가 힘들게 되었으며, 따라서 이전 시대에는 미술과는 다소 동떨어진 분야로 여겨졌던 철학과 사회학에 빌붙어 기생하게 된 것이다.
고로 다소 상투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현대미술가들과 평론가들은 거진 사기꾼들이다. 이를테면 현대미술의 동작원리는 이렇다. 미술가-평론가 집단은 쓰레기를 가져다놓고 그 쓰레기가 가치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내부거래를 통해 가치를 올린 뒤, 순진무구한 누군가가 그것에 낚여 쓰레기를 사겠다고하면 높은 값으로 팔아치우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들은 투기꾼들이라 볼수도 있다. 미술가들에게 있어서 미에 대한 목적의식이나 붓솜씨는 이제 아무래도 좋다. 자신의 똥을 금으로 보이게 할말한 말솜씨만 있으면 예술가라는 명함을 팔 수 있다.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피상적이지만은 의미있는 철학적 목적에서 떠나 현대미술은 지금 여기에 이르러있다.
물론 이것은 사견일 뿐이다. 어떤 이들은 나를더러 미학의 ㅁ자도 모르는 무뢰한이라며 비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피카소라는 이름이 붙어있지 않았다면 아비뇽의 처녀들을 보고 어떤 아름다움도 느끼지 못했을 작자들이 내게 할 소리는 아니다. 물론 이것은 19년전 다녔던 미술학원 원장이 내 소방차 그림을 내 눈 앞에서 북북 찢어버린 이후로 생겨난 미술에 대한 피해의식일 수도 있다. 동시에 그때 나의 미술적 감수성마저도 갈가리 찢어져버렸기 때문일수도 있다.
*
어딜가나 사기꾼 기질이 환영받는 세상이다. 말 잘하는 사람이 각광받는 시대고, 자기가 가진 능력과는 별개로 그것을 어떻게 부풀려내느냐가 관건인 세상이기도 하다. 분명 내 주변에는 별다른 삶의 고난없이 남들 공부할때 공부하고 대학갈때 대학가고 결혼할때 결혼하는 이들 뿐인데, 취업할때만 되면 이들은 엄청난 역경을 이겨내고 칠전팔기하여 면접관 앞에 서있는 개선장군이 된다. 토익만점을 받아도 그냥 열심히만 해서 받으면 안되고, 무언가 그로 하여금 토익공부를 하지 못하게하는 대단한 역경과 시련이 있어야만 하며, 그는 그러한 역경과 시련에도 어찌하여 그에 굴복치 아니하고 토익만점이라는 최종보스를 쓰러뜨릴 수 있었는지 대서사시가 마련되어 있어야만 한다. 고작해봐야 해X스학원을 다니며 공부한 것을 흡사 전쟁터 한복판에서 군용무전기로 LC를 공부하고 삐라로 RC를 공부한 것처럼 포장해야한다. 이것은 양반이다. 심지어 가서 사진만 실컷 찍어온 유럽여행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했던 미군 일병의 일기처럼 써제끼는 양반도 천지에 널렸다. 물론 진정한 시련과 대서사시를 갖추고 있는 "20대"는 드물며, 시련과 대서사시의 결과물치고 토익만점이나 유럽여행이라는 것은 지나치게 소박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를 성실히 수행해온, 개선장군이 아닌 순례자처럼 자신이 걸어야할 길을 굴곡없이 묵묵하게 걸어온 인생이 격하되는 세상이다. 파리바X뜨 크루아상 하나를 먹어도 반드시 눈물을 머금고 씹어야만한다. 그래야만 인생을 논할, 아니 최소한 이 사회에 편입될 자격이 생기는 것이다. 눈물나는 대서사시를 살아온 이 사회의 청년들이 어째서 그 대서사시를 이어쓸 것을 포기하고 일개 샐러리맨이 되려고 줄을 서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질문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렇게도 격정적인 인생을 살았으면서도, 어째서 그들 자신을 보다 큰 목적이 아닌 "입에 풀칠"하는 데에 투신하는지는 설명치 않는다. 분명 한국사회에는 출생-입시-취업-승진으로 이어지는 단조로운 인생이 대부분인데, 자기소개서 속 세상은 참으로 격정적인 세상이다.
말은 내뱉자마자 공기중으로 소멸하지만, 말에 따르는 책임은 수은처럼 가라앉아 오랫동안 존속한다. 말을 잘한다는 것은 그에 비례하여 책임 또한 막중해짐을 의미하며, 말을 못한다는 것은 책임이 가벼워짐을 뜻한다. 이것은 시시콜콜한 격언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자신을 근사하게 포장하면 포장할수록 주위의 기대치는 높아지며, 자신의 본모습이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드러나면(전문용어로, 없는 밑천 다 뽀록나면) 필시 욕먹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뜨내기에게 허세부리는 것이 아니라면, 자신이 평생 뼈를 묻고자하는 직장에 들어가고자 한바탕 사기극을 벌이는 것은 결국 자기 무덤을 셀프로 파는 일이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인생의 스토리가 반드시 개선장군의 스토리일 필요는 없다. 순례자의 스토리도 그 나름대로 얼마나 의미있는 것인가?
나는 그냥 솔직한 자기소개서 쓰련다. 격정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 재미있고 의미있는 25년이었다. 뭐 누군가는 나보러 편하게 살았다고 할지는 모르겠지만, 순례자의 삶이 개선장군의 삶보다 편한 것이라는 명제는 누가 만들어냈는가? 또한 격정적이지 않았다해서 자신의 삶이 격정적이었다고 주장하는 자칭 개선장군들에 비해 사고회로가 미숙하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25살 청년에게 그 이상의 서사시가 존재하기는 힘들고, 나는 그것을 정직하게 인정할 것이다.
허나 전위적 행위와 악의만으로 사기꾼을 사기꾼이라 부르기에는 무언가 빠진 듯 하다. 대부분의 사기행각에서 사기꾼은 대중을 선동키 위해 단순히 발을 내딛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할 필요가 있는데, 그게 바로 "말"이라는 것이다. 본디 "말"이라는 것은 화폐와 유사하다. "말"은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그것이 일컫는 것의 존재를 담보로 하며, "말"의 가치 또한 그 존재하는 것의 가치로부터 파생된다. 화폐유통량이 급증하거나 화폐를 발행하는 국가의 경제가 아작이 나면 그 화폐는 종이쪼가리가 되듯, 말도 많아질수록, 또 그것에 깔려있는 근간의 가치가 떨어질수록 허망한 것이 된다. 이러한 점에서 사기꾼들의 말은 이를테면 1차대전 직후 독일의 마르크화와 같다. 그들에게 있어서의 "말"이란, 존재치 않는것을 존재하게 하거나, 가치없는 것의 가치를 부풀리기 위한 수단이다. 말만 무성하지, 그 말의 숲을 파헤쳐보면 혀를 쯧쯧 찰만큼 실속은 없다. 화폐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근간이 부실한 "말뿐인 말"은 거품에 불과하며, 바늘로 콕 찌르기만해도 꺼져버리기 일쑤다. 일면 우리사회에서 "말 잘한다"는 뜻이, 말에 대한 본질적인 자격을 갖추었다기보다는 자신이 실제 가진 밑천을 대단한 것인양 부풀리기를 잘한다는 의미로 통용되는 것을 고려해보면, 말을 잘한다는 것은 사기꾼 기질이 있다는 소리와도 일맥상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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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 이르러 예술이라고 일컬어지는 모든 분야는 대체로 근대이전 상류층에서 주로 탐닉되다가, 시대가 변하면서 점차 일반대중으로 확산되는 발전과정을 거쳐왔다. 허나 유일하게 이러한 시류에 맞서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미술이다. 현대미술은 점차 똥을 싸는 미술가와 그 똥을 찬양하는 평론가로 이루어진 "그들만의 리그"로 변질되고 있으며, 일반 대중은 지나치게 추상으로 향해가는 미술에 대해 더이상 감동을 느끼기 힘들게 되었다. 혹자는 일부 현대미술품의 경매가가 수십억을 넘어간다는 점을 들어 아직까지도 미술은 인간에게 감동을 주는 예술행위라 주장할지도 모르겠는데, 그래 그러면 그 미술품이라는 자산은 과연 유동성이 얼마나 되는가? 그 가치라는 것은 유희왕카드나 리니지 아이템의 가치와 진배없다. 그들 사이에서나 가치있고 의미있는 것일뿐, 당장 일반인이 그것을 사기위해 수많은 돈을 지불하려하지는 않는다. 대중주의적이 되어가는 음악과 문학은 그들 나름대로 가치의 객관성을 정립해 나아가고 있지만, 미술은 거꾸로 대중을 배격하며 자신을 고립시키고 있다.
현대의 순수미술가라는 직업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완벽한 구도를 포착해내는 것도, 선명한 색채를 선택하는 것도, 유려한 테크닉을 구사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척도들로 미술가의 실력이 평가받았던 시대는, "현실세계의 묘사"라는 현대 이전 미술만이 가지었던 사회적 역할을 카메라가 완벽하게 대체한 후에 막을 내렸다. 요컨대 미술은 그것만이 설 수 있었던 사회적인 입지(왕의 초상을 그린다든지, 전쟁의 전황을 기록한다든지)가 크게 줄어들었으며, 이러한 연유로 인해 미술가들은 또다른 생존방식을 찾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현실을 캔버스에 똑같이 묘사하는 것이 무의미한 행위로 전락해버린 현대에 이르러 미술가들은 이전 시대에는 일종의 일탈행위라고 여겨졌던 추상이라는 것을 너도나도(라고 쓰고 개나소나라고 읽는다) 시작하게 되었으며, 그 일탈행위 자체를 미술의 알파와 오메가인양 포장하고있다. 이를테면 몬드리안이든 칸딘스키든 폴록이든 정상예술(일반대중이 지지하는 미를 추구라는)이 주류인 상황에서나 흥미로운 일탈이 되는 것이지, 그 일탈이 주류가 된 상황에서는 그저 수많은 쓰레기들 중 하나의 쓰레기가 된다. 미술 본연의 목적은 인간이 작품을 보고 "자연스레"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인데, 현대미술은 그것과는 거꾸로 일반대중이 결코 아름답다고 여기지 못할 쓰레기를 추상해놓고는 그것에 온갖 철학적/사회적 의미를 부여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아름답다고 느낄 것을 강요하고 있다. 그 의미라는 것은 일반대중이 배경설명 없이 작품만 보고서는 알 수 없으며, 미술가 자신만이 아는, 아니 미술가 자신만이라도 알면 다행인 것이다. 이른바 작위적인 아름다움이다.
이러한 문제를 부추기는 것은 평론가다. 현대미술가의 대부분은 마땅한 철학적 기반이 부재하거나 미약하기 때문에 그것을 부여하는 역할은 평론가가 아웃소싱을 맡는다. 미술평론가들의 역할은, 미술가들이 싸놓은 똥을 금이라고 대중에게 선전하고서는 "그것이 똥이지 어찌하여 금이냐"는 사람을 심미안 없고 무지한 자로 매도하여 똥을 똥이라 하지 못하고 금을 금이라 하지 못하는 호변호금 불가의 세상을 구축한다. 평론가들은 권위의식과 선민의식에 의거해 지극히 자의적인 미적 관념체계를 대중에게 주입하여 미술가와 평론가로 이어지는 공생관계의 기득권을 수호한다. 미술이 대중에게 외면받자 먹고살 길이 없어진 그들의 발악이다. 미술은 더이상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야하는지에 대한 사용설명서가 없으면 해석하기가 힘들게 되었으며, 따라서 이전 시대에는 미술과는 다소 동떨어진 분야로 여겨졌던 철학과 사회학에 빌붙어 기생하게 된 것이다.
고로 다소 상투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현대미술가들과 평론가들은 거진 사기꾼들이다. 이를테면 현대미술의 동작원리는 이렇다. 미술가-평론가 집단은 쓰레기를 가져다놓고 그 쓰레기가 가치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내부거래를 통해 가치를 올린 뒤, 순진무구한 누군가가 그것에 낚여 쓰레기를 사겠다고하면 높은 값으로 팔아치우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들은 투기꾼들이라 볼수도 있다. 미술가들에게 있어서 미에 대한 목적의식이나 붓솜씨는 이제 아무래도 좋다. 자신의 똥을 금으로 보이게 할말한 말솜씨만 있으면 예술가라는 명함을 팔 수 있다.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피상적이지만은 의미있는 철학적 목적에서 떠나 현대미술은 지금 여기에 이르러있다.
물론 이것은 사견일 뿐이다. 어떤 이들은 나를더러 미학의 ㅁ자도 모르는 무뢰한이라며 비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피카소라는 이름이 붙어있지 않았다면 아비뇽의 처녀들을 보고 어떤 아름다움도 느끼지 못했을 작자들이 내게 할 소리는 아니다. 물론 이것은 19년전 다녔던 미술학원 원장이 내 소방차 그림을 내 눈 앞에서 북북 찢어버린 이후로 생겨난 미술에 대한 피해의식일 수도 있다. 동시에 그때 나의 미술적 감수성마저도 갈가리 찢어져버렸기 때문일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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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가나 사기꾼 기질이 환영받는 세상이다. 말 잘하는 사람이 각광받는 시대고, 자기가 가진 능력과는 별개로 그것을 어떻게 부풀려내느냐가 관건인 세상이기도 하다. 분명 내 주변에는 별다른 삶의 고난없이 남들 공부할때 공부하고 대학갈때 대학가고 결혼할때 결혼하는 이들 뿐인데, 취업할때만 되면 이들은 엄청난 역경을 이겨내고 칠전팔기하여 면접관 앞에 서있는 개선장군이 된다. 토익만점을 받아도 그냥 열심히만 해서 받으면 안되고, 무언가 그로 하여금 토익공부를 하지 못하게하는 대단한 역경과 시련이 있어야만 하며, 그는 그러한 역경과 시련에도 어찌하여 그에 굴복치 아니하고 토익만점이라는 최종보스를 쓰러뜨릴 수 있었는지 대서사시가 마련되어 있어야만 한다. 고작해봐야 해X스학원을 다니며 공부한 것을 흡사 전쟁터 한복판에서 군용무전기로 LC를 공부하고 삐라로 RC를 공부한 것처럼 포장해야한다. 이것은 양반이다. 심지어 가서 사진만 실컷 찍어온 유럽여행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했던 미군 일병의 일기처럼 써제끼는 양반도 천지에 널렸다. 물론 진정한 시련과 대서사시를 갖추고 있는 "20대"는 드물며, 시련과 대서사시의 결과물치고 토익만점이나 유럽여행이라는 것은 지나치게 소박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를 성실히 수행해온, 개선장군이 아닌 순례자처럼 자신이 걸어야할 길을 굴곡없이 묵묵하게 걸어온 인생이 격하되는 세상이다. 파리바X뜨 크루아상 하나를 먹어도 반드시 눈물을 머금고 씹어야만한다. 그래야만 인생을 논할, 아니 최소한 이 사회에 편입될 자격이 생기는 것이다. 눈물나는 대서사시를 살아온 이 사회의 청년들이 어째서 그 대서사시를 이어쓸 것을 포기하고 일개 샐러리맨이 되려고 줄을 서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질문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렇게도 격정적인 인생을 살았으면서도, 어째서 그들 자신을 보다 큰 목적이 아닌 "입에 풀칠"하는 데에 투신하는지는 설명치 않는다. 분명 한국사회에는 출생-입시-취업-승진으로 이어지는 단조로운 인생이 대부분인데, 자기소개서 속 세상은 참으로 격정적인 세상이다.
말은 내뱉자마자 공기중으로 소멸하지만, 말에 따르는 책임은 수은처럼 가라앉아 오랫동안 존속한다. 말을 잘한다는 것은 그에 비례하여 책임 또한 막중해짐을 의미하며, 말을 못한다는 것은 책임이 가벼워짐을 뜻한다. 이것은 시시콜콜한 격언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자신을 근사하게 포장하면 포장할수록 주위의 기대치는 높아지며, 자신의 본모습이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드러나면(전문용어로, 없는 밑천 다 뽀록나면) 필시 욕먹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뜨내기에게 허세부리는 것이 아니라면, 자신이 평생 뼈를 묻고자하는 직장에 들어가고자 한바탕 사기극을 벌이는 것은 결국 자기 무덤을 셀프로 파는 일이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인생의 스토리가 반드시 개선장군의 스토리일 필요는 없다. 순례자의 스토리도 그 나름대로 얼마나 의미있는 것인가?
나는 그냥 솔직한 자기소개서 쓰련다. 격정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 재미있고 의미있는 25년이었다. 뭐 누군가는 나보러 편하게 살았다고 할지는 모르겠지만, 순례자의 삶이 개선장군의 삶보다 편한 것이라는 명제는 누가 만들어냈는가? 또한 격정적이지 않았다해서 자신의 삶이 격정적이었다고 주장하는 자칭 개선장군들에 비해 사고회로가 미숙하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25살 청년에게 그 이상의 서사시가 존재하기는 힘들고, 나는 그것을 정직하게 인정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