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날이 되면 고등학교 친구 한녀석이 떠오른다. 물론 그 아이와 5분이상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으니 친구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을지 모른다. 아무튼 그 아이는 공부 많이 시킨다는 우리 고등학교에서도 유별나게 성실한 친구였는데, 친구관계를 안 맺을래야 안 맺을수가 없는 기숙사학교에서 독고다이로 살았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야간자율학습이 12시에 종료되었었는데, 그 친구만이 홀로 교실에 남아 2시까지 공부를 하다가왔고, 다음날이면 6시에 점호를 마친뒤 다른 사람들이 아침잠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시간동안 영어듣기를 공부했다. 밥 한번 같이 먹은 기억도 없다. 급식시간 종 땡치면 식당으로 향하는 우리와 달리, 하염없이 단어장을 외우다가 급식종료 10분전쯤에 달려가 밥을 마시듯 퍼먹고는 다시 교실로 달려오곤했던 친구였으니까. 중간에 전학을 가는 바람에 한동안 연락이 끊겼지만, 얼마전 행시를 붙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도 노력하면 얼마든지 걔쯤은 할 수 있었을까? 아니, 애당초 그렇게 노력을 할수나 있었을까?
우리 엄마 또한 한국의 여느 엄마와 다를바 없이, 자식인 내가 "마음먹고" 조금만 더 했다면 서울대를 가고 고시를 패스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어쩌면 "너는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안해서 탈"이라는 부모의 말씀을 맹신해온 우리에게 있어서, 노력이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옵션쯤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크다. 그러니까 이것은 남자애들이 즐겨보는 만화영화와 같다. 한창 악당에게 얻어터지고 있던 주인공이, 빈사의 위기에서 자신의 진정한 힘을 해방하여 혹은 그레이트뭐시기나 슈퍼거시기 등으로 합체하여 악당을 죽지않을만큼 패준 다음, 온갖 멋진척을 하며 "이제 내 능력을 알겠지?"하며 통큰 자비를 베풀어 악당을 살려주는 그 장면말이다. 주인공이 얼마나 얻어터지건, 혹은 주인공이 죽더라도 히로인이 눈물 한방울 흘려주면 괴성을 지르며 다시 부활해 악당을 분쇄시키고야마는, 그 주인공에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대입한다.
문제는 답답한 점도 만화영화와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왜 저놈의 주인공은 진즉에 합체하거나 각성하여 이길 생각은 안하고, 구태여 죽기 직전까지 맞아주며 쓰잘데없이 분량뽑기에 매진하는가? 진작에 그 "전설의 어쩌구"를 발휘했다면 손쉽게 끝장낼 수 있지 않았었나? 그 말은 똑같이 우리에게도 적용되어,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할수있다고 지껄이면서, 왜 지금 마음을 먹지 못하고 있는지의 자기의문으로 확장되고마는 것이다. 그것뿐이라면 다행인 바, 현실세계에서의 우리는 대체로 주인공보다는 악당, 그것도 악당 우두머리보다는 주인공의 손가락질 한번에 쓸려나가는 악당 졸개에 가까우므로 더욱 서글퍼진다. 그 말인즉, 우리에겐 그 "전설의 어쩌구"에 대응되는 "노력하는 능력"조차도 없는 경우가 태반인 것이다.
"나는 쟤보다 머리는 훨씬 더 좋은데, 쟤만큼 노력을 안해서 뛰어넘지 못하는거야"라는 말로 어쩌면 나는 지금껏 내 자격지심의 대상이 되어오던 존재들을 언젠가는 내가 쓰러뜨릴 악당 정도로 폄하해왔을런지 모른다. 나는 단지 노력이라는 스위치를 아직 켜지 않았을 뿐이고, 내가 그 스위치를 ON으로 올리기만 한다면(그러니까 방의 불을 켜고끄듯이) 언제든지 그 존재를 짓밟을 수 있다고 자위해왔을런지 모른다. 그러나 빈사의 위기에서 전설적인 힘이 부여된다는 것이 어디까지나 애들 보는 만화의 기믹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될 시점에 이르러서는, 죽게될 상황이면 곧 죽는 것이 현실이요, 나는 결코 그레이트뭐시기나 슈퍼거시기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처절하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말은 참으로 쉬워서 나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을 것 같은 아침7시 알람이 다시 울리기 전에 이불의 품속에서 벗어나기, 버스에 타서도 짬내어 인강을 듣기, 수업 많은 날 저녁에도 열람실 가기, 담배를 한대 피우고 어서 다시 책읽으러 들어가기 등을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라 하기가 점차 힘들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노력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그 사람의 선천적인 능력이라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할 정도로, 이불과 스마트폰과 담배는 너무나 나를 사랑하여 놓아주지 않는 것이다. 이럴진데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혹은 "노력만 하면"이라는 소리가 입밖으로 쉽게 튀어나와서는 안된다.
대개의 경우에 사람들은 어떤 무엇인가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노력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 요상하기 짝이 없는 문장이 성립되는 것은, "노력"이 우리의 인식과는 달리 아무나 할 수 있는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시선이 제발 책 밖으로 벗어나지않게 하기위해, 손이 펜을 그만 돌리게 하기위해, 허벅지가 스마트폰의 진동을 무시하게 하기위해 사력을 다해 노력한다. 이내는 썩은 동태눈으로 4시간동안 "앉아만" 있었던 것을 4시간동안 공부했다고 자위한다. 그러면서도 감히 마음먹고 노력"만" 하면 뭐든 될것이라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힘든 것을, 우리가 "노력형 인재"라며 은연중에 무시하고 폄훼하였던 그 누군가는 해내었다는 것이다. 이쯤되면 노력은 옵션이 아니라 선천적인 능력임이 자명해진다. 우리가 "노력만 하면 그놈을 이길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지금은 노력도 안하고 있으며 그놈에게 지고있다는 소리다. 아마 영원히 지게될 것이다.
우리 엄마 또한 한국의 여느 엄마와 다를바 없이, 자식인 내가 "마음먹고" 조금만 더 했다면 서울대를 가고 고시를 패스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어쩌면 "너는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안해서 탈"이라는 부모의 말씀을 맹신해온 우리에게 있어서, 노력이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옵션쯤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크다. 그러니까 이것은 남자애들이 즐겨보는 만화영화와 같다. 한창 악당에게 얻어터지고 있던 주인공이, 빈사의 위기에서 자신의 진정한 힘을 해방하여 혹은 그레이트뭐시기나 슈퍼거시기 등으로 합체하여 악당을 죽지않을만큼 패준 다음, 온갖 멋진척을 하며 "이제 내 능력을 알겠지?"하며 통큰 자비를 베풀어 악당을 살려주는 그 장면말이다. 주인공이 얼마나 얻어터지건, 혹은 주인공이 죽더라도 히로인이 눈물 한방울 흘려주면 괴성을 지르며 다시 부활해 악당을 분쇄시키고야마는, 그 주인공에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대입한다.
문제는 답답한 점도 만화영화와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왜 저놈의 주인공은 진즉에 합체하거나 각성하여 이길 생각은 안하고, 구태여 죽기 직전까지 맞아주며 쓰잘데없이 분량뽑기에 매진하는가? 진작에 그 "전설의 어쩌구"를 발휘했다면 손쉽게 끝장낼 수 있지 않았었나? 그 말은 똑같이 우리에게도 적용되어,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할수있다고 지껄이면서, 왜 지금 마음을 먹지 못하고 있는지의 자기의문으로 확장되고마는 것이다. 그것뿐이라면 다행인 바, 현실세계에서의 우리는 대체로 주인공보다는 악당, 그것도 악당 우두머리보다는 주인공의 손가락질 한번에 쓸려나가는 악당 졸개에 가까우므로 더욱 서글퍼진다. 그 말인즉, 우리에겐 그 "전설의 어쩌구"에 대응되는 "노력하는 능력"조차도 없는 경우가 태반인 것이다.
"나는 쟤보다 머리는 훨씬 더 좋은데, 쟤만큼 노력을 안해서 뛰어넘지 못하는거야"라는 말로 어쩌면 나는 지금껏 내 자격지심의 대상이 되어오던 존재들을 언젠가는 내가 쓰러뜨릴 악당 정도로 폄하해왔을런지 모른다. 나는 단지 노력이라는 스위치를 아직 켜지 않았을 뿐이고, 내가 그 스위치를 ON으로 올리기만 한다면(그러니까 방의 불을 켜고끄듯이) 언제든지 그 존재를 짓밟을 수 있다고 자위해왔을런지 모른다. 그러나 빈사의 위기에서 전설적인 힘이 부여된다는 것이 어디까지나 애들 보는 만화의 기믹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될 시점에 이르러서는, 죽게될 상황이면 곧 죽는 것이 현실이요, 나는 결코 그레이트뭐시기나 슈퍼거시기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처절하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말은 참으로 쉬워서 나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을 것 같은 아침7시 알람이 다시 울리기 전에 이불의 품속에서 벗어나기, 버스에 타서도 짬내어 인강을 듣기, 수업 많은 날 저녁에도 열람실 가기, 담배를 한대 피우고 어서 다시 책읽으러 들어가기 등을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라 하기가 점차 힘들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노력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그 사람의 선천적인 능력이라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할 정도로, 이불과 스마트폰과 담배는 너무나 나를 사랑하여 놓아주지 않는 것이다. 이럴진데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혹은 "노력만 하면"이라는 소리가 입밖으로 쉽게 튀어나와서는 안된다.
대개의 경우에 사람들은 어떤 무엇인가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노력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 요상하기 짝이 없는 문장이 성립되는 것은, "노력"이 우리의 인식과는 달리 아무나 할 수 있는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시선이 제발 책 밖으로 벗어나지않게 하기위해, 손이 펜을 그만 돌리게 하기위해, 허벅지가 스마트폰의 진동을 무시하게 하기위해 사력을 다해 노력한다. 이내는 썩은 동태눈으로 4시간동안 "앉아만" 있었던 것을 4시간동안 공부했다고 자위한다. 그러면서도 감히 마음먹고 노력"만" 하면 뭐든 될것이라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힘든 것을, 우리가 "노력형 인재"라며 은연중에 무시하고 폄훼하였던 그 누군가는 해내었다는 것이다. 이쯤되면 노력은 옵션이 아니라 선천적인 능력임이 자명해진다. 우리가 "노력만 하면 그놈을 이길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지금은 노력도 안하고 있으며 그놈에게 지고있다는 소리다. 아마 영원히 지게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