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테면 내가 이따금씩 상상하는 어떤 세상이 있다. 내가 먼미래의 어느날 내적 사유의 결과로서 죽음이 살아감보다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가정하자. 나는 곧장 보건복지부 홈페이지 메뉴 중 "자살지원센터 이용신청" 페이지로 들어가 공인인증서로 본인인증을 한 뒤, 인적사항을 기입한다. 신청 후 채 1시간이 지나지않아 보건복지부 산하 자살지원센터 본부 상담원에게서 전화가 오고, 필요한 서류를 지참하고 가까운 센터 지부로 방문한다. 서울특별시 거주자라면 누구나 대중교통을 통해 30분 이내로 도착할 수 있는 센터 지부에 이르면, 신원조회를 실시하고 자살사유 등을 상세히 기록한다. 이때 만약 내가 채무관계, 질병의 고통, 사랑하는 이의 결별 혹은 죽음 등의 트라우마로 인한 "외부환경에 강압당한 타의적 자살"을 희망할 경우에는 자살의 자격이 박탈되어 도로 집으로 돌려보내지고, 순전히 나 자신의 사유결과 및 삶에 대한 의지박약으로 지원할 때만 자살지원서비스를 제공한다.
심도있는 신원조회를 끝낸 나는 이윽고 법적/행정적으로 세상에서 나 자신을 삭제시키는 작업을 진행한다. 재산상속, 가족관계의 해소, 사망신고 등이 모두 이 과정에서 이루어지고 원한다면 유서를 남길 수도 있다. 이것은 "사회적 죽음"의 과정이다. 사회적으로 자살이 완료된 나는 "육체적 죽음"을 위해 3평 남짓한 "집행실"로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친구 가족들과 통화할 시간이 주어진다. 소지품이 있다면 유품상자에 넣어 택배로 보낼수도 있다. 이렇게 "죽음의 준비"를 끝마친 나는, 내가 희망한 자살의 양식에 필요한 도구가 구비되어있는 집행실로 들어간다. 통상적으로 쓰이는 거의 모든 자살도구들이 구비되어 있지만, 기차에 치어죽거나 높은 곳에서 투신을 하는 등 멀쩡히 살아있는 타인에게 피해를 끼칠만한 양식은 선택할 수 없다. 집행실에 들어간 이후에도 내가 희망한다면 언제든지 지원서비스를 중단시키고 다시금 삶을 살아갈 수 있지만, 이러한 경우에는 두번다시 서비스를 재이용할 수 없다. 소위 "습관적 자살시도자"들로 인해 세금이 지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이것은 어차피 현실에 있을수 없는 일이므로 비현실적인 결론을 맺어보겠다. 집행실에 들어가 결국 자살을 택한, 즉 살아있으되 죽음을 갈망한 생명은 곧바로 죽음 앞에 있으되 가장 삶을 갈망하는 이들 중 가장 어린 나이 순으로 모종의 기술을 통해 전송된다. 이렇게 생명을 부여받은 "삶의 의지자"들은 삶을 포기한 자들이 원래 살수있었던 남은 수명을 부여받는다. 즉 생명의 이식인 셈이다. 그로써 세상에는 살아있으되 죽음을 지향하는 이들이 사라지고, 점차로 삶의 의지가 넘쳐나는 생명력의 세상이 이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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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전도사가 있다던가? 나는 자살전도사다. 누군가가 내게 다가와 힘들어서 죽고싶다는 이야기를 하는 이면에는 나에게서 알량한 위로 따위를 받으려는 속셈이 있겠지만, 나는 그러한 이들에게 망설임없이 자살하라고 한다. 나아가 자살의 여러가지 양식들과 그 양식들이 어떠한 생물학적 매커니즘으로 그들의 목숨에 마침표를 찍어줄 것인지, 또한 그러한 양식들이 각기 갖는 서로다른 고통의 정도(물론 나는 자살을 안해봐서 모르지만 그럴 것으로 추정되는)를 알려주고선 최선의 자살양식을 고민해보라고 한다. 일종의 세일즈맨과 같다. 내가 판매하는 상품은 다름아닌 고객의 자발적인 죽음이고, 나는 그가 잘못된 상품을 선택하여 불필요한 고생을 하지 않도록 조언해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진짜배기 세일즈맨과 다른 점이라면, 첫째로 그러한 세일즈활동으로 내게 떨어지는 대가나 인센티브는 전무하다는 것이고, 둘째로 나는 그저 어떠한 상품이 있다는 것만을 알려줄 뿐 그 상품을 구입하는 데에 있어서 어떤 강요 및 관여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이 세일즈가 지금껏 단 한차례도 성공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고로 내 고객들은 여전히 한사람도 빠짐없이 살아있으니 이것이 내가 무능한 세일즈맨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들이 애시당초 상품에 대한 구입의사도 없으면서 견적만을 묻고가는 뜨내기 고객들이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이것은 자살교사죄도, 자살방조죄도 아니다. 자살교사란 자살의 의지가 없는 이에게 자살을 결의케 하는 것인데, 나는 자살의 의지가 충만한 이들의 의견을 존중만 해줄뿐이다. 그렇다고해서 내가 그들의 자살을 돕거나 자살의 수단을 제공하는 것도 아니므로 자살방조죄 또한 아니다. 그들이 죽고싶다고 할때, 다른 사람들은 "그래도 살아야한다"고 말한다면, 나는 "죽고싶으면 죽으면 된다"고 말하는 것만 다를 뿐이다. 그러한 점에서 나는 "자살자를 구원한다"는 말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사고회로가 죽음으로 점철된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그가 그토록이나 혐멸해 마지않는 생의 세계로 억지로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그에게 자신의 생명에 대한 자결권을 주어 그가 갈구하는 영원한 안식으로 인도하는 것이 더욱 의미에 부합되지 아니한가.
그러나 나도 아무 고객이나 받지는 않는다. 세일즈맨이 길가는 아무나 붙잡고 판촉을 하지않듯, 내 고객은 반드시 이렇다할만한 트라우마로 인한 자살충동이 아닌 그저 배부른 세계에서 목숨에 위협받을 일 없이 살다보니 우러나오는 타나토스적 자살충동을 느끼는 이들이어야 한다. 트라우마가 있는 고객의 경우, 내가 그 트라우마를 직접 겪어보지않은 이상 함부로 이야기할 수가 없으므로 판촉행위를 하지 않는다. 허나 이토록 고객을 가려받는다고 해도, 자살전도사라는 내 커리어 유지에는 전혀 지장이 없을만큼의 고객들이 항시 대기하고 있다. 더욱이 단골이 존재하기 힘든 내 업종에 있어서도 단골고객이 존재하는데, 이들은 늘상 죽음을 입에 달고사는 이들이다. 공교롭게도 이들은 죄다 "이유없이 죽고싶지만 실제로 죽기는 싫은 사람들의 연맹"이라는 단체의 회원들인지, 아무리 좋은 상품을 소개해주어도 고개만 끄덕일뿐 구매할 의사를 내비치지 않는다. 그러고나서 한달 즈음이 지나서는 다시 찾아와 상품이 품절되지 않았는지를 묻는다. 물론 내가 파는 상품은 인류가 절멸할 때까지 품절될 일이 없기에 그런 걱정을 할 필요도 없지만, 이들은 또 견적만 거창하게 묻고서는 자리를 떠버린다.
내게 자살전도를 받은 이들은, 대개의 경우 내가 내뱉는 말에 질려버린채 나와 연을 끊어버리거나 혹은 내 앞에서 다시는 죽고싶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된다. 허나 나는, 그들이 죽음이라는 것을 지나치게 관념적으로 이야기하고 있기에 일종의 충격요법으로써 죽음의 실체적 모습들을 보여주며 자살할 생각을 그만두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울증이 나에게로 전이되어오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도 아니다. 외려 나는, 죽고싶다는 말만 하지 않는다면, 누군가가 나에게 고뇌를 털어놓는 행위란 내가 그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방증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더할나위 없이 성의있게 그의 고민을 들어주고 보잘것없는 해결책을 제시해준다. 허나 일단 그러한 고뇌 끝에 삶을 끝내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한 이들에게는 그 어떤 해결책이나 위로도 무위로 돌아간다. 여행? 자기계발서적 탐독? 연애? 종교? 이미 죽음으로 점철된 그들의 뇌내구조는 다른 어떤 삶의 양식들로도 대체될 수 없다. 그들의 삶의 지향은 이미 죽음으로 바뀌어있으며, 살아있는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죽음이고, 그들은 그저 죽기위해 살아있는 존재다. 이것은 뇌사상태와 전혀 다를바가 없다. 이들에게 있어서 삶의 의지가 재림할 확률은 뇌사상태의 환자가 깨어날 확률과 같다.
나는 진심으로 그들에게 그들 자신의 뜻에 따라 자살하라고 권유하는 것이며, 그들이 어떠한 선택을 하든 존중하고 응원할 의사가 있다. 그것은 내가 그들의 목숨을 가벼이 여기거나, 그들의 고뇌 한페이지 한페이지를 동네 중국집 찌라시 보듯 얕보아서가 아니다. 외려 나는 인간 자신이 언제 어떻게 태어나는 것을 선택할 수 없지만, 언제 어떻게 죽을지에 대해서는 아주 약간이나마 선택권을 가지며, 그 선택의 실행에 있어서 타자나 외부환경 혹은 인간존재의 한시성에 의하지 않고 순전히 자신만의 의지에 의거하는 것을 인간자유의 극치라고 본다. 자신의 손으로 DNA 깊숙한 곳에 새겨져있는 자기보호 매커니즘을 극복하고 자신의 숨통을 끊는 것이야말로 부처가 말한 고뇌와 번뇌 만사로부터의 해탈이며, 시도때도 없이 먹고싶고 싸고싶고 자고싶고 섹스하고 싶어하는 우리네 유물론적인 몸뚱이로부터 해방되는 진테제다. 수명에 의해, 질병에 의해, 사고로 인해, 혹은 똑같은 자살이라 할지라도 빚더미에 의해, 생활고로 인해, 트라우마로 인해 죽는 것보다는, 오로지 자신의 내적 이성 혹은 합리성이 "이 세상은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결론을 내린다면 충실히 그에 따라 삶을 버리는 것이 아름다운 삶인 동시에 아름다운 죽음인 것이다. 머릿속엔 죽음만을 생각하면서 정작 몸은 죽지못하는 꼴은 아무래도 추하고 배리적이기 짝이 없다.
이렇게 말하면 나를 아주 쓰레기같은 싸이코패스 취급하는 사람도 물론 없지 않다. 이를테면 언젠가 한번 학교 익명게시판에 15년간 자살을 생각해왔다는 글이 올라왔었다. 특별한 사유도 없이 15년간 자살하고싶었다는 그에게 나는, 15년이면 자살을 결의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아니었나, 알량한 자기 한 목숨 담보로 걸고 주변인들을 얼마나 힘들게했나, 죽고싶다면 자신의 사유결론에 따라야만 한다고 댓글을 달았다가 뭇 사람들로부터 싸이코라는 소리를 들었다. 물론 나를 지탄하는 이들 중에는 그 글을 쓴 이도 포함되어있었다. 이거원, 15년동안 죽을 생각을 했다는 놈이 정작 죽으라고하니 발악을 한다.
그러나 나는 그 누구보다도 생명을 존엄한 것으로 여긴다. 동시에 생명은 무척이나 존엄하기 때문에, 남의 생명이든 자신의 생명이든 하찮게 여기는 이에 의해 소유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이를테면 수술실에서 환자의 생명을 책임져야할 외과의사가 살인자여서는 안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술대에 눕는 환자 자신도 반드시 살고자하는 의지를 가져야만 한다. 환자 자신부터가 살아갈 의지가 없다면, 그러한 수술의 목적은 아무래도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런고로 자신의 생명을 존엄하게 여기는 이들의 생명만이 존엄하고 살려야할 가치가 있는 것이며, 이유없이 자신의 생명조차 버리고자 하는 이들의 생명에는 일말의 존엄한 구석도 없는 것이다. 생명의 존엄성이란 생명의 주인부터가 그 생명을 소중히 여길때, 즉 살고싶어할 때 해당되는 소리다. 이를테면 돈이라는 것은, 내가 돈을 중요시하지 않는다해도 내가 아닌 타자들이 돈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가치를 지닌다. 허나 자신의 생명이란 것은, 나 자신이 그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면 어떤 누구도 중요한 것으로 간주치 아니한다. 내가 죽어도 이 세상은 더할나위 없이 정상적으로 흘러갈 것이며, 그저 일주일정도 가까운 이들 사이에서 회자되고는 내가 이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조차도 머지않아 말살될 것이다. 자기자신부터가 소중히 여기지않는 생명은 세상의 관점에서 그다지 가치가 없다.
솔직히 말해 그렇다. 별 이유없이 죽고싶다고 하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기실은 죽음과 가장 먼 쪽에 서있는 것이다. 죽음에 가장 가까운 이들은 그 어두운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려 발버둥을 치는데, 정작 가장 따스하고 강렬한 빛 아래 있는 이들이 그 그늘을 동경하는 것이다. 인간의 사상, 이성, 감성, 신체 등 모든 것이 생명을 향하여 있는데, 이 지침이 죽음을 향한다면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은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다. 이를테면 그들은 그것이 삶의 의지 따위와는 관계없이 호르몬적인 어떤 것의 귀책으로 돌리려는 성향이 강한데, 그렇다면 문제는 더욱 허망해진다. 우리의 생의지조차도 유물론적인 생화학에 의존하는 것이라면, 인간존재는 한없이 무력한 존재로 전락한다. 그저 우리의 삶과 죽음도, 우리의 생의지와 관계없이, 돌이 풍화되는 것과 같은 물리/화학적인 순리에 따른다는 허무주의이다. 쉽게말해 약 한알 덜먹고 더먹음에 따라 인간의 생의지마저 좌우된다면, 그때야말로 생명의 존엄성 따위는 억장과 같이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고로 나는, 내가 구태주의자니 파시스트니 싸이코패스니 하는 소리를 듣는 한이 있더라도, 자살문제에 있어 인간의 생의지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심도있는 신원조회를 끝낸 나는 이윽고 법적/행정적으로 세상에서 나 자신을 삭제시키는 작업을 진행한다. 재산상속, 가족관계의 해소, 사망신고 등이 모두 이 과정에서 이루어지고 원한다면 유서를 남길 수도 있다. 이것은 "사회적 죽음"의 과정이다. 사회적으로 자살이 완료된 나는 "육체적 죽음"을 위해 3평 남짓한 "집행실"로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친구 가족들과 통화할 시간이 주어진다. 소지품이 있다면 유품상자에 넣어 택배로 보낼수도 있다. 이렇게 "죽음의 준비"를 끝마친 나는, 내가 희망한 자살의 양식에 필요한 도구가 구비되어있는 집행실로 들어간다. 통상적으로 쓰이는 거의 모든 자살도구들이 구비되어 있지만, 기차에 치어죽거나 높은 곳에서 투신을 하는 등 멀쩡히 살아있는 타인에게 피해를 끼칠만한 양식은 선택할 수 없다. 집행실에 들어간 이후에도 내가 희망한다면 언제든지 지원서비스를 중단시키고 다시금 삶을 살아갈 수 있지만, 이러한 경우에는 두번다시 서비스를 재이용할 수 없다. 소위 "습관적 자살시도자"들로 인해 세금이 지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이것은 어차피 현실에 있을수 없는 일이므로 비현실적인 결론을 맺어보겠다. 집행실에 들어가 결국 자살을 택한, 즉 살아있으되 죽음을 갈망한 생명은 곧바로 죽음 앞에 있으되 가장 삶을 갈망하는 이들 중 가장 어린 나이 순으로 모종의 기술을 통해 전송된다. 이렇게 생명을 부여받은 "삶의 의지자"들은 삶을 포기한 자들이 원래 살수있었던 남은 수명을 부여받는다. 즉 생명의 이식인 셈이다. 그로써 세상에는 살아있으되 죽음을 지향하는 이들이 사라지고, 점차로 삶의 의지가 넘쳐나는 생명력의 세상이 이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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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전도사가 있다던가? 나는 자살전도사다. 누군가가 내게 다가와 힘들어서 죽고싶다는 이야기를 하는 이면에는 나에게서 알량한 위로 따위를 받으려는 속셈이 있겠지만, 나는 그러한 이들에게 망설임없이 자살하라고 한다. 나아가 자살의 여러가지 양식들과 그 양식들이 어떠한 생물학적 매커니즘으로 그들의 목숨에 마침표를 찍어줄 것인지, 또한 그러한 양식들이 각기 갖는 서로다른 고통의 정도(물론 나는 자살을 안해봐서 모르지만 그럴 것으로 추정되는)를 알려주고선 최선의 자살양식을 고민해보라고 한다. 일종의 세일즈맨과 같다. 내가 판매하는 상품은 다름아닌 고객의 자발적인 죽음이고, 나는 그가 잘못된 상품을 선택하여 불필요한 고생을 하지 않도록 조언해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진짜배기 세일즈맨과 다른 점이라면, 첫째로 그러한 세일즈활동으로 내게 떨어지는 대가나 인센티브는 전무하다는 것이고, 둘째로 나는 그저 어떠한 상품이 있다는 것만을 알려줄 뿐 그 상품을 구입하는 데에 있어서 어떤 강요 및 관여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이 세일즈가 지금껏 단 한차례도 성공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고로 내 고객들은 여전히 한사람도 빠짐없이 살아있으니 이것이 내가 무능한 세일즈맨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들이 애시당초 상품에 대한 구입의사도 없으면서 견적만을 묻고가는 뜨내기 고객들이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이것은 자살교사죄도, 자살방조죄도 아니다. 자살교사란 자살의 의지가 없는 이에게 자살을 결의케 하는 것인데, 나는 자살의 의지가 충만한 이들의 의견을 존중만 해줄뿐이다. 그렇다고해서 내가 그들의 자살을 돕거나 자살의 수단을 제공하는 것도 아니므로 자살방조죄 또한 아니다. 그들이 죽고싶다고 할때, 다른 사람들은 "그래도 살아야한다"고 말한다면, 나는 "죽고싶으면 죽으면 된다"고 말하는 것만 다를 뿐이다. 그러한 점에서 나는 "자살자를 구원한다"는 말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사고회로가 죽음으로 점철된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그가 그토록이나 혐멸해 마지않는 생의 세계로 억지로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그에게 자신의 생명에 대한 자결권을 주어 그가 갈구하는 영원한 안식으로 인도하는 것이 더욱 의미에 부합되지 아니한가.
그러나 나도 아무 고객이나 받지는 않는다. 세일즈맨이 길가는 아무나 붙잡고 판촉을 하지않듯, 내 고객은 반드시 이렇다할만한 트라우마로 인한 자살충동이 아닌 그저 배부른 세계에서 목숨에 위협받을 일 없이 살다보니 우러나오는 타나토스적 자살충동을 느끼는 이들이어야 한다. 트라우마가 있는 고객의 경우, 내가 그 트라우마를 직접 겪어보지않은 이상 함부로 이야기할 수가 없으므로 판촉행위를 하지 않는다. 허나 이토록 고객을 가려받는다고 해도, 자살전도사라는 내 커리어 유지에는 전혀 지장이 없을만큼의 고객들이 항시 대기하고 있다. 더욱이 단골이 존재하기 힘든 내 업종에 있어서도 단골고객이 존재하는데, 이들은 늘상 죽음을 입에 달고사는 이들이다. 공교롭게도 이들은 죄다 "이유없이 죽고싶지만 실제로 죽기는 싫은 사람들의 연맹"이라는 단체의 회원들인지, 아무리 좋은 상품을 소개해주어도 고개만 끄덕일뿐 구매할 의사를 내비치지 않는다. 그러고나서 한달 즈음이 지나서는 다시 찾아와 상품이 품절되지 않았는지를 묻는다. 물론 내가 파는 상품은 인류가 절멸할 때까지 품절될 일이 없기에 그런 걱정을 할 필요도 없지만, 이들은 또 견적만 거창하게 묻고서는 자리를 떠버린다.
내게 자살전도를 받은 이들은, 대개의 경우 내가 내뱉는 말에 질려버린채 나와 연을 끊어버리거나 혹은 내 앞에서 다시는 죽고싶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된다. 허나 나는, 그들이 죽음이라는 것을 지나치게 관념적으로 이야기하고 있기에 일종의 충격요법으로써 죽음의 실체적 모습들을 보여주며 자살할 생각을 그만두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울증이 나에게로 전이되어오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도 아니다. 외려 나는, 죽고싶다는 말만 하지 않는다면, 누군가가 나에게 고뇌를 털어놓는 행위란 내가 그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방증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더할나위 없이 성의있게 그의 고민을 들어주고 보잘것없는 해결책을 제시해준다. 허나 일단 그러한 고뇌 끝에 삶을 끝내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한 이들에게는 그 어떤 해결책이나 위로도 무위로 돌아간다. 여행? 자기계발서적 탐독? 연애? 종교? 이미 죽음으로 점철된 그들의 뇌내구조는 다른 어떤 삶의 양식들로도 대체될 수 없다. 그들의 삶의 지향은 이미 죽음으로 바뀌어있으며, 살아있는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죽음이고, 그들은 그저 죽기위해 살아있는 존재다. 이것은 뇌사상태와 전혀 다를바가 없다. 이들에게 있어서 삶의 의지가 재림할 확률은 뇌사상태의 환자가 깨어날 확률과 같다.
나는 진심으로 그들에게 그들 자신의 뜻에 따라 자살하라고 권유하는 것이며, 그들이 어떠한 선택을 하든 존중하고 응원할 의사가 있다. 그것은 내가 그들의 목숨을 가벼이 여기거나, 그들의 고뇌 한페이지 한페이지를 동네 중국집 찌라시 보듯 얕보아서가 아니다. 외려 나는 인간 자신이 언제 어떻게 태어나는 것을 선택할 수 없지만, 언제 어떻게 죽을지에 대해서는 아주 약간이나마 선택권을 가지며, 그 선택의 실행에 있어서 타자나 외부환경 혹은 인간존재의 한시성에 의하지 않고 순전히 자신만의 의지에 의거하는 것을 인간자유의 극치라고 본다. 자신의 손으로 DNA 깊숙한 곳에 새겨져있는 자기보호 매커니즘을 극복하고 자신의 숨통을 끊는 것이야말로 부처가 말한 고뇌와 번뇌 만사로부터의 해탈이며, 시도때도 없이 먹고싶고 싸고싶고 자고싶고 섹스하고 싶어하는 우리네 유물론적인 몸뚱이로부터 해방되는 진테제다. 수명에 의해, 질병에 의해, 사고로 인해, 혹은 똑같은 자살이라 할지라도 빚더미에 의해, 생활고로 인해, 트라우마로 인해 죽는 것보다는, 오로지 자신의 내적 이성 혹은 합리성이 "이 세상은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결론을 내린다면 충실히 그에 따라 삶을 버리는 것이 아름다운 삶인 동시에 아름다운 죽음인 것이다. 머릿속엔 죽음만을 생각하면서 정작 몸은 죽지못하는 꼴은 아무래도 추하고 배리적이기 짝이 없다.
이렇게 말하면 나를 아주 쓰레기같은 싸이코패스 취급하는 사람도 물론 없지 않다. 이를테면 언젠가 한번 학교 익명게시판에 15년간 자살을 생각해왔다는 글이 올라왔었다. 특별한 사유도 없이 15년간 자살하고싶었다는 그에게 나는, 15년이면 자살을 결의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아니었나, 알량한 자기 한 목숨 담보로 걸고 주변인들을 얼마나 힘들게했나, 죽고싶다면 자신의 사유결론에 따라야만 한다고 댓글을 달았다가 뭇 사람들로부터 싸이코라는 소리를 들었다. 물론 나를 지탄하는 이들 중에는 그 글을 쓴 이도 포함되어있었다. 이거원, 15년동안 죽을 생각을 했다는 놈이 정작 죽으라고하니 발악을 한다.
그러나 나는 그 누구보다도 생명을 존엄한 것으로 여긴다. 동시에 생명은 무척이나 존엄하기 때문에, 남의 생명이든 자신의 생명이든 하찮게 여기는 이에 의해 소유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이를테면 수술실에서 환자의 생명을 책임져야할 외과의사가 살인자여서는 안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술대에 눕는 환자 자신도 반드시 살고자하는 의지를 가져야만 한다. 환자 자신부터가 살아갈 의지가 없다면, 그러한 수술의 목적은 아무래도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런고로 자신의 생명을 존엄하게 여기는 이들의 생명만이 존엄하고 살려야할 가치가 있는 것이며, 이유없이 자신의 생명조차 버리고자 하는 이들의 생명에는 일말의 존엄한 구석도 없는 것이다. 생명의 존엄성이란 생명의 주인부터가 그 생명을 소중히 여길때, 즉 살고싶어할 때 해당되는 소리다. 이를테면 돈이라는 것은, 내가 돈을 중요시하지 않는다해도 내가 아닌 타자들이 돈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가치를 지닌다. 허나 자신의 생명이란 것은, 나 자신이 그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면 어떤 누구도 중요한 것으로 간주치 아니한다. 내가 죽어도 이 세상은 더할나위 없이 정상적으로 흘러갈 것이며, 그저 일주일정도 가까운 이들 사이에서 회자되고는 내가 이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조차도 머지않아 말살될 것이다. 자기자신부터가 소중히 여기지않는 생명은 세상의 관점에서 그다지 가치가 없다.
솔직히 말해 그렇다. 별 이유없이 죽고싶다고 하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기실은 죽음과 가장 먼 쪽에 서있는 것이다. 죽음에 가장 가까운 이들은 그 어두운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려 발버둥을 치는데, 정작 가장 따스하고 강렬한 빛 아래 있는 이들이 그 그늘을 동경하는 것이다. 인간의 사상, 이성, 감성, 신체 등 모든 것이 생명을 향하여 있는데, 이 지침이 죽음을 향한다면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은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다. 이를테면 그들은 그것이 삶의 의지 따위와는 관계없이 호르몬적인 어떤 것의 귀책으로 돌리려는 성향이 강한데, 그렇다면 문제는 더욱 허망해진다. 우리의 생의지조차도 유물론적인 생화학에 의존하는 것이라면, 인간존재는 한없이 무력한 존재로 전락한다. 그저 우리의 삶과 죽음도, 우리의 생의지와 관계없이, 돌이 풍화되는 것과 같은 물리/화학적인 순리에 따른다는 허무주의이다. 쉽게말해 약 한알 덜먹고 더먹음에 따라 인간의 생의지마저 좌우된다면, 그때야말로 생명의 존엄성 따위는 억장과 같이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고로 나는, 내가 구태주의자니 파시스트니 싸이코패스니 하는 소리를 듣는 한이 있더라도, 자살문제에 있어 인간의 생의지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