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이 특별한 날인줄로만 알았던 것은 나 자신이 특수한, 그러니까 세계의 보편성에서 한발짝쯤 떨어져 특별하고도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는(혹은 살아갈) 존재라는 자부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특수성이라고 믿어왔던 것들이, 아무리 내가 발버둥쳐봤자 결과적으로는 세계의 보편적 질서 내지는 경멸의 향내를 머금은 인간 군상의 부정적 경향성과 눈물나리만치도 합치함을 만 24년이라는 시간이 증명해주었을 때에, 생일은 그저 365일이라는 내가 살아내어야할 1년의 많은 나날 중 하루에 불과해진다. 어쩌면 살아감이라는 것은 내가 그다지 특별한 존재가 아님을 알아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하숙집 주인집에는 아기가 태어났다. 뭇 사람들의 온 관심을 한몸에 받는다. 원래 시선집중의 대상이었던 6살 남짓한 꼬맹이 여자애는 이제 관심의 한켠으로 밀려난다. 자신만을 예뻐해주던 어른들의 관심이 갓난아기로 집중되는 것이 못마땅했던지, 괜한 심술도 부려보고 짜증도 내어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누나노릇 못한다는 면박, 여자애는 그저 서러이 울 뿐이다. 그것은 이제 자신이 특별한 존재일 수 없음을 알게된데서 비롯된 설움일 것이다. 이봐 꼬맹아, 그런걸로 울 필요는 없어. 시간은 너에게도 나에게도 그 아기에게도 공평해서, 만 24살이 되는 해에는 자신의 특별함으로 인해 관심받고 사랑받는 것보다 차라리 세상의 품에 내 몸을 숨기고, 그것에서 안도하고 또 환멸할테니 말이야. 누구도 피해갈 수 없지. 결국 우리는 세상의 축복받는 주인공으로 태어나서는, 머지않아 잊혀지는 행인6으로 죽는게 당연한 이치니까.

문득 발디디고 있는 이 땅이 차갑다. 들이마시고 있는 공기도 얼음장같다. 늘 속을 덥혀주던 담배도 오늘은 뼛속까지 얼어붙는구나. 얇은 파카 한장으로 견딜 수 있는만큼의 추위는, 더운 것을 싫어하는 나에게 계절이 주는 선물이다. 여전히 처음본 그 순간의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서는 "이젠 아줌마가 다 되었지?"하며 내게 1년마다 찾아와 너스레를 떨며 인사하고, 찬바람으로 내 볼을 한번 쓰다듬고서는 말없이 세달을 내 옆에 꼬옥 붙어있는 것이다. 그 차가운 따스함에 취해 머쓱히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채 그녀의 손을 쥐고 영원을 붙잡고자하니, 겨울은 인사도 않고 어느샌가 가버려 있었다. 그녀를 태운 버스를 잡으려 발버둥치느라 온몸이 땀으로 물들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내 시야에서 멀찍이 벗어나 있었다. 간절히 그녀를 바라다 늦가을볕에 익숙해졌을 때즈음, 그러니까 내 생일 즈음이 되면 또다시 찾아오곤 했던 것이다. 특별치 못한 인간의 대단치 못한 생일이지만은, 항상 내 생일엔 겨울이 왔기에 나의 탄생과 존재가 세상에 겨울을 도래하게 할만큼의 의미가 있다고 나는 착각해왔던,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착각하고 싶은 것이다.

모월 모일에 태어나 나는 세상의 기대를 받았다. 세상이 내게서 기대를 거두어갔을 때에 나는 나 자신의 기대를 받았다. 나 자신마저도 나에 대한 마지막 기대를 박탈하였을때, 그래서 결국은 세상을 내게로 스며들게함을 포기하고 내가 세상으로 스며듦을 선택하였을 때에 나는 이내 죽었고 세상은 내 존재만큼 덩치가 커졌다. 내가 태어난 모월 모일은 세상에 내가 스며든 그 덩치만큼 유의미하다. 고로 동시에 무의미하다. 그런데도 생일이면 이렇게 청승을 떠는 것은, 기저의 나 자신이 세계로부터 완전히 삭제되는 것, 그래서 세계라는 포식자가 나를 집어삼켜 이내는 철저히 소화시키고야마는 것을 처절하게 거부하는 부질없는 생존본능 때문일 것이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외계에 내 삶을 내 손으로 제물바치고 있는 와중에, 일년에 단 하루만이라도 세상의 포악한 손아귀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역설적인 모험이다. 그렇게 나는 하루간 부활한다. 그리고 그 모월 모일이 지나면 나는 다시금 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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