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sid1=102&sid2=257&oid=020&aid=0002754866 참조
이번에 새로 취임하신 미중년의 우리 총장님께서 파릇파릇한 15학번 새내기들에게 따스한 축사 대신 눈이 번쩍 뜨이는 돌직구를 날리셨나보다. 그새 세상이 낯설어졌다. 대학이란 아직 가지 못한 자들과 이미 다녀온 자들이 입을 한데 모아 "낭만이 있는 곳"이라 예찬하는 공간이어 왔다. 그곳에서의 핑크빛 4년은 한국에서 일평생을 살며 자유와 설렘을 느낄 수 있는 일생일대의 유일한 기회처럼 여겨져왔다. 그 "숨통트임"에 대한 갈망은 일면 보상심리라고 해도 좋았다. 그것은 치열한 입시행군을 끝낸 자들을 반기는 시원한 막걸리 한잔과 같은 위로였고, 어른들의 금속빛 세상 속에서 열정적으로 전진해나아갈 예비전사들을 지켜주는 견고한 강철방패와 같은 위안이었다. 그래서 한국인들에겐 대학시절이 그렇게 특별한건지도 모른다. 그 잠시나마의 휴식은 현실이라는 미명으로 박탈되어서는 안될 특권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특권은, 백발 미중년 총장님의 판결문에 가까운 축사와 함께 무기한 유예될 것임이 선고되었다. 그리고 그 판결은 완고한 어조만큼이나 진지했고 정확했다.
낭만의 영정 앞에서 나는 읍소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행복을 유예하며 살아왔나. 또 우리는 그렇게 유예한 행복이 미래에 가서 배가 되어 돌아오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얼마나 실망하며 살아왔나. 삶의 모든 시점에서 우리는 무언가가 끝났음을 축복받기보다는, 무언가가 시작됨을 독촉받아왔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런 서슬퍼런 독촉의 칼날을 포장하고 있는 칼집은 늘상 끝이 왔을때의 달콤함이었다. 그 달콤함은, 이제와 깨닫게된 것이지만, 실체라고는 없는 신기루 같은 것이었다. 그저 도살자의 우악스런 손에 이끌려가기 전 소를 유혹하는 여물과 같았다. 우리는 병신같이 그렇게 맨날 속아왔다. 성공한 부모나 성공못한 부모나 결국 자신들도 똑같은 병신의 길을 걸어왔으면서 자식에게 미래의 행복을 운운하고, "대학가서 미팅할래, 공장가서 미싱할래" 따위를 급훈이랍시고 걸어둔 교사들은 스스로를 난세의 메시아라 칭하며 입시라는 고기분쇄기에 학생들을 갈아넣었다. 그렇게 적금쌓듯 유예한 내 행복들을 대학와서 좀 쓰려나 해서 봤더니 죄다 부도수표였다 씨팔것.
생각해보니 그렇다. 우리는 늘상 사다리를 타고 그저 올라가고 있었다. 어디를 향하는지도 몰랐다. 그저 이 사다리를 오르면 형언할 수 없는 행복이 어련히 알아서 있겠거니 바랐고, 그 피상적이기 짝이 없는 희망이 우리가 일종의 "다 부질없다"는 염세를 떨쳐내고 어딘가를 향해 일보씩 전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을지 모른다. 우리의 발버둥은, 겪어본 적도 없는 오르가즘을 찾아 허공에 발정난 울음소리를 게워내는 저 암고양이의 그것과 꼭 닮아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자아실현이라고 했지만, 나는 그것을 자아상실이라고 불렀다. 기저의 나 자신은 어느샌가 사라져있거나, 혹 그 형체가 남아있더라도 이제는 손잡고 데려올 수도 없이 저 아래에 있었다. 결국 우리가 사다리를 타고 도달한 곳은 금속빛 어른세계의 거대한 아구창이었고, 날카로운 쇠이빨을 보고 우리가 씹어먹힐 줄을 알게된 그 순간에 이르러서야 우린 그저 거미줄에 포획된 무기력한 매미처럼 그 아구창에 기어들어갈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자각했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자식세대에게도 기약없는 미래의 행복을 운운하며 그들을 금속 아구창 속에 쑤셔넣는 데에 여생을 보내게 될 것임이 자명해졌다.
따스한 개강날 둘러앉아 막걸리를 마시고있는 신입생들을 보며, 취업스터디를 같이 하는 형이 "내가 저때였으면 열람실간다"고 중얼거렸다. 반박하려던 찰나에 나 또한 그런 사고방식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음을 돌이켜보니 입이 떼어지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난 학교를 5년째 다니고 있지만 어느 열람실이 사람이 많고적은지 혹은 냉난방이 좋고나쁜지만 알았지, 그 드넓은 캠퍼스 부지에서 어디가 지칠때 드러누워 맥주 한캔까고 하늘을 보기좋은지 혹은 어디가 여자친구와 몰래 키스하기 좋은지는 알지를 못했다. 그런 곳을 꿰고있는 애들이 보이면 그저 "생각도 없는 놈"으로 매도하고선, 차디찬 칸막이 사이에 숨어 머리를 쥐어뜯고있는 나 자신을 합리화했다. 물론 그 합리화의 담보는 이미 한번 속아넘어갔었던 "미래"라는 부도수표였다. 나는 세상에게서 그러한 부실한 담보를 받고, 돌려받을 기약없는 내 시간과 행복들을 세상에 빌려주었다.
이력서 한줄한줄을 채우며 생각했다. 네다섯 글자 남짓한 볼품없는 활자들만이 내가 늘상 본전도 떼이는 호구 사채업자 짓이나마 여실히 해왔다는 것을 증명해보이고 있었다. 365일의 나날들은 철저하게 자기소개서 한줄로 압축되어 더이상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혼탁액 비스무리한 것이 되었다. 그런 혼탁액, 자괴로 가득찬 정액을 뿜어낸 나는 다섯번쯤 마스터베이션을 한듯 허망했다. 나의 4년, 나의 생각, 나의 삶은 이제와 3000자의 절박으로 요약되어 있었다. 당최 그것은 무엇에 대한 절박인가? 무엇을 향한 갈망이고, 또 무엇을 가리키는 지향인가? 언젠가는 아름답게 꽃핀 육지에 도달할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으로, 무풍지대에서 나침반은 보지않고 애꿎게 노젓기만을 반복했던 것이 지워지지 않는 잉크로 자신있게 적을 수 있는 내 이력의 전부였다. 나의 절박과 갈망과 지향에는 어떤 목적지도, 구심점도 없었다. 그리고 육지는 제발로 내게 다가와주지 않았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금속 아구창이 내가 향했던 곳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스터디 그 형의 말대로 내가 신입생 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마실 것이다. 미중년 총장님의 전진하라는 이야기는 잠시 잊어두고 동기들의 어깨춤이 멎도록 진탕 마시고 취하고 토할 것이다. 어차피 오르고 올라봐야 금속빛 아구창 뿐이라면, 매미와 같이 찰나의 순간만이라도 환희와 쾌락에 젖을 것이다. 더이상 유예도 호구짓도 하지 않으련다.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바라보지 않으면, 미래에도 내가 찾는 행복 따위는 없다. 끊임없이 취업의 관문, 승진의 관문, 노후의 관문 따위를 지나며 그저 숨만 붙어있을 뿐인 산 송장이 될 것이 우리의 숙명이라면, 4년이라는 시간이나마 아무것도 무서울 것 없는 보상심리에 푹 빠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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