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화 이후 프로페셔널리즘이라는 것은 여느 분야를 가리지않고 긍정적인 의미를 내포한 단어로 쓰여왔다. 다만 그 쓰임새는 사전적인 의미와는 조금 다른데, 원래 프로페셔널리즘이란 어떤 전문적인 분야에 무한한 책임감을 갖고 일에 임하는 장인정신을 지칭하는 단어지만, 실생활에서는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쿨하게 맡은 일에만 집중하는 것"이라는 너절한 "쿨"의 개념에 의거하는 뜻으로 곧잘 쓰인다. 나아가 이것은 감정에 대한 배격 혹은 감정에 대한 제어능력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프로페셔널리즘에 대한 왜곡된 인식, 그리고 그에 대한 인간의 선망은 여러 느와르물에서도 적절히 반영되어있다. 이를테면 <레옹>에서는 표적의 염통에 망설임없이 총알을 박아넣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맨온파이어>에서는 "I'm a professional."이라며 유괴사건에서 자신은 맡은 임무만 했을뿐 아무것도 모른다고 발뺌하는 마피아 조직원들에게서 우리는 극단적으로 왜곡된 프로페셔널리즘을 찾는다. 더군다나 <터미네이터>류의 영화가 히트를 쳤던 이유 또한 다 때리고 부수는 미국식 스토리 전개와 아놀드의 거대한 대흉근이 배나온 중년남성들의 향수를 자극시켰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관람객들은 아무런 감정을 갖지않고 목표물을 향해서 달려가는 프로페셔널한 살인기계들에게 일종의 선망을 가지게 되었고, 그래서 지금까지도 <터미네이터>라 하면 기계에 대항해 투쟁하던 인간 사라 코너나 카일 리스가 아닌 T-800과 T-1000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기계세계나 범죄세계에서 비롯된 감정배척적인 프로페셔널리즘은 이제금 평범한 인간들의 사바세계로 내려와 인세의 번뇌로부터 그들을 구원하는 미륵불의 역할을 자처하고있다. 특히나 대인관계에서 발휘되는 프로페셔널리즘은, 인간이 인간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부산물로 생겨나는 심적인 고통을 막아주고 쾌락과 이익만을 삼투압으로 통과시켜주는 일종의 세포벽으로서 역할하고 있다. 태생이 하찮은 닝겐이다보니 감정을 느끼는 것 자체는 완전히 피할 수 없지만, 하다못해 부질없는 곳에라도 감정을 "낭비"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한다. 이에 따라 대인관계에서 또한 일종의 경영공학적 방법론이 도입되었다. 어쩌면 구름과 같은 관계를 철저히 정리하고 분류하여 나의 감정을 효율적으로 배분할 것인지, 어쩌면 상처받고 살지않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실수 해를 찾을 수 있는 방정식"이라는 정량적인 문제로 환원시킬 것인지 따위가 현대인류의 인간관계를 대표하는 일차목표라 볼 수 있다. 가히 프로페셔널리즘은 이러한 "분류와 배분을 통한 낭비의 배격"으로부터 시작된다고해도 비약이 없다. 레옹도 암살대상을 선정할 때 No woman, No kid의 원칙을 가졌고, 터미네이터도 목표에 순위를 두었었다. 다른 것은, 누구 대가리에 총알을 박을 것이냐가 아니라 누구에게 더 감정을 줄 것이냐의 문제란 것일 뿐.
일례로 연애조차도 이제는 계통분류학적인 것이 되어서, (남자 기준으로) 여친, 여사친, 섹파, 썸녀, 심녀, 똑같은 여친이라도 결혼용, 연애용 등의 분류로 나누어 각각 자신이 어느정도 마음을 줄 것인지 규정한다. 이 자기규정을 따르지 못한 이들은 각종 커뮤니티 게시판에 고민글을 올리곤 하는데, 이게 또 아주 가관이다. 섹파가 좋아졌어요라든가, 여친이 있는데 썸녀가 끌려요라든가, 사귀고 있는 여자가 결혼용은 아니에요라든가 하는 고민글이 있을때마다 나는 그들이 감정을 조금이라도 낭비하고 싶지않아한다는 것을 읽는다. 여자들 글은 더 볼만하다. 외모와 소득 따위를 상중하로 매긴 여러 남자 중 누구와 사귈까요하는 질문은 이제금 지식인 스테레오타입이다. 이를테면 그들의 경우, 섹파는 자신의 페니스를 발기시킬 정도로만, 썸녀는 이따금씩 여친 눈속이고 한눈 팔고싶을 정도로만, 외모상급 소득하급 남친은 데이트가 즐거울 정도로만 사랑해야하는데 그 이상의 감정을 가져 낭비하게 되니 혼란스럽고 두려운 것이다. 왜? 그들은 자기가 분류한 상대에게 그에 맞는 감정만을 가지려고하는 쿨가이들이자 프로페셔널들이니까.
이쯤 말했으니 눈치채겠지만, 위와같은 고민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감정에 앞서 분류가 선행되었기 때문이다. 분류는 이성이 하는건데 거기에 감정을 끼워넣자니 잘되면 이상한거다. 이성으로 감정을 억누르라는 말 또한, 감정이 이성에 선행된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런데 설령 감정으로 분류를 한다고해도 문제가 있다. 감정은 상수가 아니라는 것이다. 꼴뵈기싫던 놈이 꿈에 한번 나온 이후로 좀 묘해진다든가, 그렇게 좋아하던 놈을 만나기가 갑자기 귀찮아진다든가 하는 일은 무척이나 많다. 이걸 죄다 상수로 상정하고 방정식을 세우니 그게 맞는 식일리가 있나. 그러니 이제는 분류 자체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 신기한건, 그런 맞지도 않는 남의 방정식을 지들이 풀어주겠다고 댓글다는 놈들이다. 아주 페르미들 납셨다.
참 웃긴게 그렇다. 기계는 사람을 닮아가고 있다. 애플의 Siri와 삼성의 S voice는 누가누가 사람흉내 잘내나 경쟁을 한다. 딱딱한 기계음은 보다 자연스러운 사람 목소리를 모방하게 되었고, 사용자가 "사랑해" 혹은 "힘들어"라고 말하면 미리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된 답변이나마 따스한 대답을 해준다. 그런데 정작 사람은 기계를 지향한다. 쓸데없는 감정을 잊기를 갈망한다. 따지고보면 모든 감정의 "쓸모"를 찾는 것은 아무래도 무의미한 노력이다. 섹파나 심남에게 갖는 쓸데없는 감정을 쓸데없다고 말한다면, 여친이나 썸남에게 갖는 감정은 쓸데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대체 어디서 나오나. 생산성의 측면에서 보자면 섹스든 연애든 짝사랑이든 죄다 낭비다. 괜스레 시간 빼먹고 마음고생만 시키는 것들 뿐이다. 적절한 대상에게 적절한 마음을 분배하겠다는 생각은, 다시말해 감정의 동적인 모습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고, 동적인 감정을 무시하는 것은 곧 고뇌할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감정에 있어서 결코 쿨하거나 프로페셔널해질 수 없음을 솔직하게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런 척이야 할 수 있겠지만, 그 또한 자기기만일 뿐이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고, 이 글은 그저그런 원론에 불과하다는 당신에게 물어보자. 당신은 "힘들어 하지말자"고 자기최면을 거는 어떤 일 때문에 단 한번도 힘든적이 없었던가?
이러한 프로페셔널리즘에 대한 왜곡된 인식, 그리고 그에 대한 인간의 선망은 여러 느와르물에서도 적절히 반영되어있다. 이를테면 <레옹>에서는 표적의 염통에 망설임없이 총알을 박아넣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맨온파이어>에서는 "I'm a professional."이라며 유괴사건에서 자신은 맡은 임무만 했을뿐 아무것도 모른다고 발뺌하는 마피아 조직원들에게서 우리는 극단적으로 왜곡된 프로페셔널리즘을 찾는다. 더군다나 <터미네이터>류의 영화가 히트를 쳤던 이유 또한 다 때리고 부수는 미국식 스토리 전개와 아놀드의 거대한 대흉근이 배나온 중년남성들의 향수를 자극시켰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관람객들은 아무런 감정을 갖지않고 목표물을 향해서 달려가는 프로페셔널한 살인기계들에게 일종의 선망을 가지게 되었고, 그래서 지금까지도 <터미네이터>라 하면 기계에 대항해 투쟁하던 인간 사라 코너나 카일 리스가 아닌 T-800과 T-1000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기계세계나 범죄세계에서 비롯된 감정배척적인 프로페셔널리즘은 이제금 평범한 인간들의 사바세계로 내려와 인세의 번뇌로부터 그들을 구원하는 미륵불의 역할을 자처하고있다. 특히나 대인관계에서 발휘되는 프로페셔널리즘은, 인간이 인간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부산물로 생겨나는 심적인 고통을 막아주고 쾌락과 이익만을 삼투압으로 통과시켜주는 일종의 세포벽으로서 역할하고 있다. 태생이 하찮은 닝겐이다보니 감정을 느끼는 것 자체는 완전히 피할 수 없지만, 하다못해 부질없는 곳에라도 감정을 "낭비"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한다. 이에 따라 대인관계에서 또한 일종의 경영공학적 방법론이 도입되었다. 어쩌면 구름과 같은 관계를 철저히 정리하고 분류하여 나의 감정을 효율적으로 배분할 것인지, 어쩌면 상처받고 살지않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실수 해를 찾을 수 있는 방정식"이라는 정량적인 문제로 환원시킬 것인지 따위가 현대인류의 인간관계를 대표하는 일차목표라 볼 수 있다. 가히 프로페셔널리즘은 이러한 "분류와 배분을 통한 낭비의 배격"으로부터 시작된다고해도 비약이 없다. 레옹도 암살대상을 선정할 때 No woman, No kid의 원칙을 가졌고, 터미네이터도 목표에 순위를 두었었다. 다른 것은, 누구 대가리에 총알을 박을 것이냐가 아니라 누구에게 더 감정을 줄 것이냐의 문제란 것일 뿐.
일례로 연애조차도 이제는 계통분류학적인 것이 되어서, (남자 기준으로) 여친, 여사친, 섹파, 썸녀, 심녀, 똑같은 여친이라도 결혼용, 연애용 등의 분류로 나누어 각각 자신이 어느정도 마음을 줄 것인지 규정한다. 이 자기규정을 따르지 못한 이들은 각종 커뮤니티 게시판에 고민글을 올리곤 하는데, 이게 또 아주 가관이다. 섹파가 좋아졌어요라든가, 여친이 있는데 썸녀가 끌려요라든가, 사귀고 있는 여자가 결혼용은 아니에요라든가 하는 고민글이 있을때마다 나는 그들이 감정을 조금이라도 낭비하고 싶지않아한다는 것을 읽는다. 여자들 글은 더 볼만하다. 외모와 소득 따위를 상중하로 매긴 여러 남자 중 누구와 사귈까요하는 질문은 이제금 지식인 스테레오타입이다. 이를테면 그들의 경우, 섹파는 자신의 페니스를 발기시킬 정도로만, 썸녀는 이따금씩 여친 눈속이고 한눈 팔고싶을 정도로만, 외모상급 소득하급 남친은 데이트가 즐거울 정도로만 사랑해야하는데 그 이상의 감정을 가져 낭비하게 되니 혼란스럽고 두려운 것이다. 왜? 그들은 자기가 분류한 상대에게 그에 맞는 감정만을 가지려고하는 쿨가이들이자 프로페셔널들이니까.
이쯤 말했으니 눈치채겠지만, 위와같은 고민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감정에 앞서 분류가 선행되었기 때문이다. 분류는 이성이 하는건데 거기에 감정을 끼워넣자니 잘되면 이상한거다. 이성으로 감정을 억누르라는 말 또한, 감정이 이성에 선행된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런데 설령 감정으로 분류를 한다고해도 문제가 있다. 감정은 상수가 아니라는 것이다. 꼴뵈기싫던 놈이 꿈에 한번 나온 이후로 좀 묘해진다든가, 그렇게 좋아하던 놈을 만나기가 갑자기 귀찮아진다든가 하는 일은 무척이나 많다. 이걸 죄다 상수로 상정하고 방정식을 세우니 그게 맞는 식일리가 있나. 그러니 이제는 분류 자체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 신기한건, 그런 맞지도 않는 남의 방정식을 지들이 풀어주겠다고 댓글다는 놈들이다. 아주 페르미들 납셨다.
참 웃긴게 그렇다. 기계는 사람을 닮아가고 있다. 애플의 Siri와 삼성의 S voice는 누가누가 사람흉내 잘내나 경쟁을 한다. 딱딱한 기계음은 보다 자연스러운 사람 목소리를 모방하게 되었고, 사용자가 "사랑해" 혹은 "힘들어"라고 말하면 미리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된 답변이나마 따스한 대답을 해준다. 그런데 정작 사람은 기계를 지향한다. 쓸데없는 감정을 잊기를 갈망한다. 따지고보면 모든 감정의 "쓸모"를 찾는 것은 아무래도 무의미한 노력이다. 섹파나 심남에게 갖는 쓸데없는 감정을 쓸데없다고 말한다면, 여친이나 썸남에게 갖는 감정은 쓸데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대체 어디서 나오나. 생산성의 측면에서 보자면 섹스든 연애든 짝사랑이든 죄다 낭비다. 괜스레 시간 빼먹고 마음고생만 시키는 것들 뿐이다. 적절한 대상에게 적절한 마음을 분배하겠다는 생각은, 다시말해 감정의 동적인 모습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고, 동적인 감정을 무시하는 것은 곧 고뇌할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감정에 있어서 결코 쿨하거나 프로페셔널해질 수 없음을 솔직하게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런 척이야 할 수 있겠지만, 그 또한 자기기만일 뿐이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고, 이 글은 그저그런 원론에 불과하다는 당신에게 물어보자. 당신은 "힘들어 하지말자"고 자기최면을 거는 어떤 일 때문에 단 한번도 힘든적이 없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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