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에 앞서
길거리에 서로 머리채를 붙잡고 있는 두 여성이 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이 두 여인에게 왜 싸우는가를 묻는다면, 어떤 여인도 "내가 화난 이유는 첫째로 무엇이고, 둘째로 무엇이며, 셋째로 무엇이다" 라고 친절히 간추려주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두 여인은 서로 머리채를 쥘 수밖에 없었던 스토리를 구구절절히 늘어놓을 것이며, 차라리 요약될 수 없는 그 지리멸렬이 두 여인 간 투쟁의 본질을 간파하는 데에 더 효과적일 것이다. 더군다나 투쟁의 이유가 한 가지 뿐은 아닐 것이며, 이전부터 모종의 계기로 틀어진 관계가 이제와 곪아터진 것이라 보는 것이 더 합당할 것임이 틀림없다.

역사 또한 마찬가지다. 역사는 독립적인 사건이 이산적으로 존재하는 두서없는 무대가 아니며, 유기적 이음새를 갖는 사건과 사건 간의 총체다. 때문에 1차대전의 발발 원인을 사라예보 사건으로 일축하는 것이 어리석기 그지없는 것이고, 단일 인물에 대한 신격화 내지 영웅시가 역사적 흐름을 파악하는 데에 있어서 용인되기 힘든 비약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사 모든 일에는 연유가 있듯, 국가와 국가 간 관계에서도 좀처럼 뜬금없는 사건이나 뜬금없는 인물이 등장하는 일은 드물다. 이 때문에 최근 1년간의 이스라엘-아랍세계 간 갈등이나 북중관계를 언급하면서도, 짧게는 수십년에서 길게는 수백년을 소급하여 소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은 1~2차대전의 발발 배경에 대해 이야기할 예정인데, 주제와 다소 관계없는 장황한 서론으로 시작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메일 혹은 댓글로 외교사 질의를 보내오는 독자 중, 몇몇 독자는 내 설명이 너무 길어서 읽기가 힘들다고 요약해줄 것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밝히는 바이지만 나에게는 두 여인의 투쟁과 같은 복잡다단한 국제관계를 단언으로 요약할 수 있는 능력도 권한도 없다. 장문의 스토리가 부가되지 않은 요약은 곡해와 왜곡의 훌륭한 재료가 될 수밖에 없다. 또한 역사는 사실 못지 않게 해석도 중요한 바, 숟가락으로 밥까지 떠줬으면 됐지, 위장을 주물러 소화까지 시켜주고 싶은 생각은 내게 없다.

2차대전 발발에 관한 이론: 대공황론


2차대전의 발발 원인으로 흔히 지목되는 사건은 미국발 세계 대공황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해석을 굉장히 경계하는데, 이 요약에는 대공황이 구체적으로 각국에 어떤 영향을 미쳤기에 대규모 살육전으로 이어졌는지에 대한 고찰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대공황이라는 단일 사건에 대한 확대해석은, 흔히 전쟁이라는 것이 군수산업자본(방산업체)-국가 간 결탁에 의해 일어난다는 음모론의 근원이 된다. 즉, 군수자본이 팽창해야만 하는 국가를 부추겨 전쟁을 일으키게 한 후, 무기를 팔아 수익을 낸다는 것이다. 분명하게 말해두는 바이지만, 군수자본은 예나 지금이나 국가를 매수하여 이익을 챙길만큼 거대하게 성장해본 역사가 없으며, 이는 미국 최대의 군수업체 록히드 마틴을 열개 묶어두어도 월마트 규모에 못 미친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게다가 국가 경제가 휘청일 때면 가장 먼저 삭감되는 국방비의 고탄력성을 고려해볼때, 이러한 음모론의 설득력은 0에 수렴한다.

허나 그렇다고해도 대공황의 역사적 역할을 무시할 수 없고, 2차대전의 시점을 수십년 가량 앞당긴 점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대공황은 1920~30년대 그렇지 않아도 불길이 일듯 혼란했던 각국의 국내외 정세에 휘발유를 끼얹은 사건이며, 대공황이라는 거대 사건이 없었다면 2차대전은 수십년 정도 유예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기된 나의 전제에서 파악할 수 있듯, 2차대전은 굳이 대공황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거치게될 수순이었다.

세계대전 시즌1의 배경


비스마르크 외교 : 앞서 서론에서도 언급했듯이, 1~2차대전이라는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1800년대 초 나폴레옹 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 크림전쟁, 보오전쟁과 보불전쟁에 대해서는 내 블로그 근대유럽사 시리즈에서 설명한 바 있고, 지나치게 이야기가 길어질 수 있다. 간단하게만 언급한다면 이 시기에 독일을 비롯한 유럽 각국의 민족주의가 본격적으로 발흥했다는 점과 유럽 각국은 항상 잘나가는 놈을 경계해왔다는 점을 명심하면 된다. 독일은 보오전쟁과 보불전쟁으로 통일을 달성하고 유럽 제1의 산업/군사강국으로 성장하는 데에 성공하였지만, 독일 수상 비스마르크는 세력균형을 위해 잘나가는 한 놈을 두들겨 패야만 직성이 풀리는 유럽역사를 간파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독일은 빌헬름 2세 황제가 비스마르크를 해임하기까지, 신생강국치고는 상당히 얌전한 태도를 보여왔다. 더불어 비스마르크는 혹시라도 독일이 유럽 강대국들과 전쟁을 해야할 상황에 대비, 러시아와 재보장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프랑스-러시아가 동맹을 맺어 독일의 전선이 양분할되는 상황을 막고자 했다.


유럽의 양극화 : 그러나 비스마르크의 외교적 성과는 독일 민족주의자들의 전적인 지지를 받으며 즉위한 빌헬름 2세에 의해 모조리 깨졌다. 빌헬름 2세 입장에서도 통일 조국의 영광을 바라는 국내 민족주의의 물결에 귀닫고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빌헬름 2세는 섬세한 비스마르크 외교의 정수가 담긴 독일-러시아간 재보장 조약을 파기하였으며, 이 때문에 독일에 대한 안보불안감에 시달리기 시작한 러시아는 결국 프랑스와 동맹을 체결한다. 특히나 Weltpolitik으로 대표되는 빌헬름 2세의 적극적인 팽창 정책과 독일-영국 간 해군 군비경쟁은 그렇지 않아도 독일의 성장을 경계하던 유럽 각국의 불안감을 크게 증폭시킨다. 이는 비스마르크가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상황이었으나, 독일 카이저는 차라리 러시아 같이 애매한 동맹보다는 오스트리아와 같은 확실한 동반자와 관계를 공고히 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1900년대 초반 유럽에는 영-프-러로 이어지는 연합국(삼국협상)과, 중부 유럽을 장악한 독-오-이로 이어지는 추축국(삼국동맹)으로 판도가 나뉘게 된다.



발칸 반도의 불안정한 정세 : 이 시기는 특히나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경합하던 발칸 반도(현재의 그리스~동남부 유럽)에서 많은 사건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프랑스 혁명으로 발흥한 민족주의가 전유럽으로 확산되어 독일과 이탈리아의 통일이라는 결과를 낳았고, 양대 통일강국의 등장은 예로부터 오스만 제국이 지배했던 발칸 반도의 소수 민족에게 크게 고무적인 일이었다. 마침 오스만은 터키 해협(보스포로스~다르다넬스 지역. 지중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해협이기 때문에 러시아가 흑해를 통해 지중해로 나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곳이었다.)으로 팽창하려는 러시아에게 수차례 얻어맞아 붕괴 직전의 거인으로 연명하고 있었고, 발칸 소수 민족들은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분리 독립운동을 전개한다. 그러나 이는 발칸 반도 바로 위에 위치하고 있었던 오스트리아에게 무척이나 위협적이었다. 발칸 반도에 친러시아적인 독립 국가가 탄생하면 오스트리아의 안보 부담이 증가할 뿐 아니라, 그렇잖아도 다민족 국가인 오스트리아라고 해서 분리독립 운동의 물결에서 피해갈 수 있다는(즉 오스만 꼴이 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라예보 사건으로 총성은 울리고 : 이제서야 세르비아계 청년이 오스트리아 페르디난트 황태자를 저격한 사라예보 사건이 나온다.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는 사라예보 사건이 1차대전의 원인이라고 하면서 그 전후의 어떤 이야기도 기재하지 않는데, 물론 황태자가 암살된 것이 큰일이기야 하지만서도 그런 일을 가지고 어째서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동맹국들까지 1차대전에 가담했는지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렇게 확실하고 간편한 교과서로 인해 한국인이라면 "응? 1차대전? 사라예보 사건 때문이지."하고 반사적으로 대답하면서도, 도대체 그게 왜 1차대전의 발발 원인이 되었는지는 아무도 알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는 것이다.


상기 서술하였듯, 발칸 반도에서는 이제 오스트리아 vs 세르비아+러시아의 갈등 구도가 형성되었다. 독일은 사실 자국의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얽혀있지 않은 발칸 반도 문제에 연루되어 쓸데없이 다른 강대국을 자극하는 것을 꺼려했었는데, 그렇다해서 발칸 반도 전체에 러시아의 세력이 침투하는 것도 그다지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다. 영국과의 동맹 교섭도 실패하면서 유럽의 삼국협상 vs 삼국동맹 구도가 심화되자, 차라리 그나마 있는 동맹국이라도 챙기자는 심정에 독일은 오스트리아의 발칸 팽창을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로 알려진 지역은 1900년대 초반 발칸 반도에서 오스트리아 제국과 세르비아 왕국(1878년 독립)이 경합하던 지역이었는데, 이 지역을 당대 유럽의 최강대국 독일을 등에 업은 오스트리아가 합병한다. 이는 보스니아 지역 내 세르비아 주민들을 크게 자극하는 것이었는데, 이에 더해 오스트리아 제국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1914년 6월 어느 날 사라예보(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에 방문한 것이다. 세르비아계 결사단체 "검은 손"은 이에 오스트리아 황태자에 대한 테러를 모의하였고, 이에 성공하여 오스트리아 황태자는 총탄에 맞아 숨진다.



벨 에포크 : 1차대전에 대해 좀더 간접적인 배경을 살펴보자면, 당시 유럽의 사회적 분위기를 이야기해야 한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접어드는 시대의 유럽을 벨 에포크 시대라 한다. 사회와 과학의 진보는 유럽 젊은이들에게 낭만을 심어주었고, 미개한 민족을 개화시켜야 한다는 유럽인의 사명감이라는 것도 이 때에 극대화된다. 특히나 대규모 전쟁이라고는 수십년 전 보불전쟁이 마지막이었기 때문에, 유럽인들은 "뭐 잘못되면 전쟁 한번 하면 되지"하는 안일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설령 전쟁이 발발한다해도 유럽 각국의 경제적 상호의존성 때문에 전쟁이 길게 지속되지 못할 것이라는 자신감도 넘쳤다. 1차대전 발발 직후, 영국군 모병소가 자진입대하겠다는 영국 젊은이들로 미어터졌다는 점에서 유럽인들의 환상을 잘 알 수 있다.


cf) 1차대전 중 유명한 일화로 크리스마스 휴전이 있는데, 1914년 12월 성탄절, 서부전선의 연합군과 독일군 일부가 상부의 허가없이 자율적으로 총을 내려놓고 잠시동안의 휴전을 가졌던 일을 일컫는다. 훈훈한 이야기이지만, 이 에피소드는 1차대전 직전까지의 유럽인들이 전쟁의 참혹성에 대해 얼마나 진지하지 못한 자세로 접근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현실은 유럽인들의 생각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나폴레옹의 국민개병제도(레비 앙 마세)와 민족주의의 출현 이후, 전쟁이 더 이상 소수 용병이나 귀족/기사에 의해 수행되는 단편적인 사건이 아니었다. 국민개병제도 자체가 소수 직업군인을 거대한 규모의 군대로 성장시키기 위한 매커니즘이었고, 이 제도의 근간이 되는 민족주의는 전장에서 군인과 민간인의 경계를 희미하게 했다. 일단 한 국가가 전쟁을 수행하는 이상, 이전처럼 민간인들이 국가 간 투쟁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서 있을 수 있는 여지는 없었다. 모든 국민은 전쟁 수행에 있어서 직접 전선에 나가든, 후방 생산라인에 종사하든 전쟁과 연루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전쟁 중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는 데에 정당성을 부여해주었을 뿐 아니라, 전후처리 또한 전범국의 지도부 뿐이 아닌 전범국의 모든 국민이 책임을 공유하게 하는 성격을 갖게 하는 데에 일조한다.


또한 사회/산업의 발전으로 인해 단일 군주가 자신의 국가를 통제하기에 힘들게 되었다. 실제 1차대전 참전국들의 군주들은 서로 친인척 관계로 얽혀 있었고, 어떻게든 전쟁을 피해보고자 했다. 독일이 영국 측에 계속 러브콜을 보낸 것도 이 때문이며, 삼국협상과 삼국동맹의 결성 또한 실제로 전쟁을 수행하겠다는 의지보다는 발생할지도 모를 전쟁 억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자국 국민들의 전쟁의지(?)와 민족주의는 일개 군주가 나선다고 해서 꺼질만한 불길이 아니었으며, 동맹을 공고히 하고 외교적 고립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발칸 반도에서의 심리적 대리전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1차대전의 전황



1차대전의 개막 : 사라예보 사건 직후 오스트리아는 즉시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전송,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가 해당 사건을 조사하겠다는 조항을 제외하고 모두 수용했지만, 오스트리아는 1914년 7월 세르비아 침공을 단행한다. 곧바로 세르비아의 뒤를 봐주던 러시아가 병력동원을 시작하였고, 독오동맹에 의거하여 독일도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한다. 동시에 프랑스-러시아 동맹의 일원이었던 프랑스가 독일에 전쟁을 선포하고, 이에 더해 영국도 참전하면서 1차대전이 시작된다.


슐리펜 계획과 영국의 참전 : 프랑스야 보불전쟁 때 독일에게 치욕을 당했으니 그렇다쳐도, 사실 영국이 참전하게 된 계기는 보다 심도있는 관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크림전쟁으로 러시아와 한바탕 붙으며 크게 국력을 소진했었던 영국은 복잡다단한 유럽 문제일랑 신경끄고 자국의 식민지 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독일의 러브콜을 매몰차게 거절하지 않고 계속 간만 보았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영국은 그저 유럽의 상황이 흘러가는 것을 보고, 러시아+프랑스와 독일+오스트리아 중 어느 한 쪽이 폭주하면 그제서야 견제 목적으로 개입하기야 하겠지만, 처음부터 승산모를 전쟁에 연루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막상 독일은 영국의 어장관리에 지쳐 영국을 완전히 포기했지만...


물론 1차대전 직전 독일-영국은 해군 군비경쟁으로 경쟁한 역사가 있었지만, 고립주의 외교를 펼치던 영국이 참전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독일의 슐리펜 계획이다. 비스마르크를 해임하기는 했어도 프랑스-러시아와의 양면전쟁의 위험성은 독일 빌헬름 2세도 잘 알고 있었던 바, 여기에 대한 대처를 해야만 했다. 이에 슐리펜 계획을 입안하는데, 이는 러시아의 동원령이 완료되기 이전에 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 방면으로 프랑스 북부를 기습하여 속전속결로 프랑스에 진입하겠다는 작전이었다. 빠르게 프랑스를 무력화시킨 이후 즈음에 되어서야 러시아의 느려터진 동원령이 끝날 것이고, 그때 다시 동부전선에서 전쟁을 수행하면 된다는, 계획대로만 착착 진행된다면 양면전쟁을 피할 수 있는 꽤나 괜찮은 작전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치명적인 하자를 갖고 있었는데, 애당초에 프랑스 국경 방면으로 진격하는 것이 아니라, 영국이 중립을 보장해주던(그러니까 영국이 이해관계를 갖고 있던) 벨/네/룩의 중립을 크게 훼손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는 그다지 참전할 의사가 없던 영국마저도 독일의 적으로 참전하게 된 원인이 되었으며, 독일이 전쟁을 수행하는 명분을 짓이겨 없애버렸다. 물론 국제정치에서는 현실과 힘이 중요하지만, 명분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요소 중 하나이다. 독일은 슐리펜 계획으로 인해 전쟁의 윤리적 이니셔티브를 놓쳐버렸고, 나아가 강력한 적국을 하나 더 만든 꼴이 된 것이다.


이탈리아의 연합국 참전 : 이탈리아는 통일 이후 줄곧 능력은 없지만 욕심은 많은 꼴불견이었다. 이에 따라 이탈리아는 2차대전까지 기회주의적 외교노선을 고집하였으며,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빼먹을 것만 빼먹는 전술을 구사했다. 이러고서도 외교적으로 고립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2차대전까지 유럽의 관심을 독일이 모조리 끌어들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합국은 연합국 나름대로 이탈리아를 대독일 포위전선으로 삼고 싶어했고, 독일을 독일대로 이탈리아를 동맹으로 두고 싶어했다. 원래 이탈리아는 독-오-이 삼국동맹의 일원이었으나, 1차대전 발발 이후 간을 보다가 독-오를 배신하고 연합국으로 참전한다. 이 이면에는 영국이 이탈리아 측에 전후 오스트리아령 항구 도시 일부를 할양해주겠다는 약속(런던 조약)이 있었다.



서부전선 : 계획이란 것이 모두 그런 것이지만, 독일의 슐리펜 계획은 보기좋게 박살났다. 슐리펜 계획은 병력의 기동성에 크게 의존하는데, 아직 기갑무기가 전력화되지 않았던 1차대전 시기에 프랑스 방면 진군이 빠를 리가 없었다. 특히나 마른 강 인근에서 독일의 진격루트가 비염환자 왼쪽 콧구멍처럼 막히면서부터 독일의 서부전선은 고착화된다. 이때부터 서부전선에는 연합군과 독일군 간 장기간의 참호전이 일어나게 되며, 100m 전진을 위해 수천 수만 명이 죽어나가는 헬게이트가 열린다. 고착화된 참호를 돌파하기 위해 탱크와 화생방무기가 이때 처음 도입되지만, 그러한 신무기의 운용교리가 정립되어있지 않았던 당시의 수준으로는 제대로 활용할 수가 없었다. 독일의 예측과는 달리 서부전선은 기동전이 아닌 철저히 방어전/참호전으로 진행되었으며, 더 이상 슐리펜 계획을 고수할 수가 없게 되었다.


동부전선 : 러시아는 독일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동원령을 마치고 독일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1차대전의 이미지가 참호전으로 굳어져 있는데 그건 사실 서부전선의 이야기이고, 작전 종심이 길고 넓은 동부의 평야지대에서는 기동전이라 할만한 전쟁양상이 전개되었다. 서부전선에서와는 달리 동부전선에서의 독일군은 러시아군을 상대로 나름 선전하고 있었지만, 서부전선에 구멍이 생겼다가는 독일 본토가 떨어질 판이라 확실한 승기를 잡지는 못했다. 한편 영국+프랑스는 오스만(오스만은 터키 해협을 두고 러시아와 옥신각신하던 사이였기에 독일 편에 서서 참전한다. 여기에 더해 오스만이 영국에 주문했던 군함을 영국 측에서 한마디 상의도 없이 가져가버리는 바람에 오스만의 반영감정이 심해진다.)에서 갈리폴리 작전을 전개하여 터키 해협을 통해 연합국 러시아를 지원하려 하지만 실패한다.


해상전 : 영국은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독일의 해안을 봉쇄한다. 모든 무역/보급로가 차단된 상황에서 독일은 이 봉쇄를 타개해보고자 잠수함 작전을 펼쳤는데, 이 잠수함 작전의 주안점은 당대 세계의 공장으로 급부상하고 있던 미국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보급로 차단에 있었다.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미국은 전쟁이고 뭐고 돈만 벌면 끝이라는 생각에 유럽 문제에 깊게 개입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 U-Boat가 미국 상선과 여객선을 무차별 격침하기 시작하면서 입장이 달라진다. 독일 또한 이 잠수함 작전이 미국의 참전을 야기할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건 아니었으나, 유럽에서 뚝 떨어져 저 멀리 아메리카에 있는 미국이 참전한다해도 오랜 시일이 걸릴 것임이 틀림없었고, 독일 지도부는 그때까지만 해도 미국 참전 이전까지는 유럽에서의 전황을 대충 정리할 자신이 있었다. 혹시나 하는 심정에 독일은 멕시코로 하여금, 미국-독일 간 전쟁이 발발할 시 멕시코가 미국의 빈집을 털어 빼앗긴 영토(뉴멕시코, 애리조나, 텍사스)를 되찾으라는 전보를 보냈는데, 이 전보가 미국 첩보망에 걸리는 바람에 미국마저 독일에 전쟁을 선포하게 된다. 이를 짐머만 전보 사건이라 한다.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 그러던 중 독일 입장에서는 반가운 사건이 러시아에서 발생한다. 그렇잖아도 내부 부조리와 기근 등에 썩을대로 썩었던 러시아 내부에서는 1917년 3월 봉기가 발생한다. 이 혁명으로 인해 집권 정당성을 잃은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고 제정 러시아는 붕괴한다. 권력의 공백을 채운 것은 케렌스키를 수장으로 하는 임시내각과 레닌을 주축으로 하는 소비에트였는데, 임시내각조차도 러시아 인민들의 가장 중요한 요구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발 그 씨X놈의 전쟁 좀 그만두라는 것이다. 케렌스키는 오히려 독일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는 데에 집중하여 제 무덤을 파는 데에 급급했다.


독일은 러시아가 혁명으로 붕괴하면 뒤늦게나마 양면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었고 서부전선으로 역량을 집중할 수 있었다. 뭐 이제와서 독일이 승리하기에는 늦었지만, 그래도 서부전선에서 선전한다면 독일이 꽤나 유리한 입지에서 정전협정을 체결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본전은 찾는 셈이었다. 이에 독일은 러시아의 완전한 철수를 위해 온갖 수를 쓰는데, 그 중 하나가 레닌의 볼셰비키 지원이었다. 스위스에 망명해있던 레닌은 독일의 도움을 통해 러시아로 잠입하는 데에 성공하였고, 이윽고 1917년 11월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 소비에트가 집권하게 된다.


레닌은 독일의 지원에 대한 보답으로 독일과의 단독 강화를 계획한다. 그러나 막상 독일은 러시아의 혼란을 틈타 조금이라도 영토를 더 차지하고자 진군을 멈추지 않았고, 발트3국(에스토니아/리투아니아/라트비아)와 폴란드, 우크라이나 등의 분리독립 운동을 조장하여 러시아를 더욱 약체화하는 데에 힘을 쏟는다. 또한 독일 입장에서는 미군이 본격적으로 유럽에 상륙하기 이전에 동부전선이라도 확실히 정리해둘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치욕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 러시아는 국내 정세도 정리하지 못한 상태에서 독일과의 전쟁을 계속할 수가 없었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Brest-Litovsk 조약으로 독일-러시아 간 강화가 체결된다. 급했던 것은 러시아였던지라 이 조약은 러시아에게 크게 불리한 것이었는데, 러시아는 이 조약으로 인해 유럽방면의 영토 절반, 인구 5600만, 석탄 및 철강 산업 역량의 70%을 상실한다. 물론 결과적으론 독일이 패망하면서 이 조약이 휴짓조각이 되었지만.


1차대전의 종식



독일의 패망 : 동부전선에서 러시아가 리타이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미군이 유럽에 본격적으로 상륙하기 시작하자 독일은 맥을 못추게 된다. 더욱이 비실한 노인 러시아 대신 든든하고 젊은 동반자인 미국을 얻은 연합군은 불가리아에도 상륙, 독일은 기껏 정리해둔 동부전선에 또 역량을 분산시켜야 했다. 독일 내에서도 회의론이 득세하기 시작했고, 이내 빌헬름 2세 제정이 붕괴되고 공화정이 들어선다. 킬 군항에서는 독일 해군의 결사 명령에 항의하는 수병들의 봉기가 일어났고, 독일의 전쟁 역량은 완전히 마비되기에 이른다.


이 과정이 무척이나 중요한데, 1차대전에서의 독일의 마지막 모습이 2차대전으로 이어지게 되는 중요한 연결고리가 된다. 서부전선에서 미군이 참전한 연합군에 밀리기 시작했지만서도 동부전선에서는 나름 선전하여 러시아를 굴복시켰고, 아직까지 독일 본토로의 연합군 진입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즉 2차대전 때와는 달리, 1차대전 때의 독일은 완전히 분쇄되지는 않았다. 이 사실은 당시 독일 국민들이 "다 이겨가는 전쟁을 내부의 모순으로 인해 패배했다."는 근거없는 생각을 가지게 하였고, 이후 아돌프 히틀러가 이러한 독일의 내재된 불만을 극대화하여 집권하게 된다. 그러나 사실상 독일 경제는 전쟁 수행으로 인해 붕괴 직전에 있었으며, 서부전선 또한 전쟁 내내 교착상태에 있었던 것이 슬금슬금 독일 국경으로 향하고 있었으니, 이러한 생각은 그다지 진지하게 고려할 것이 못 되었다.


1918년 11월, 연합군과 독일군 간 적대행위는 공식적으로 종결되며 1차대전은 발발 4년만에 막을 내리게 된다. 독일을 중점으로 쓴 글이라 잘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오스트리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도 1차대전 이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다. 1차대전은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오스만 제국이라는 3대 제국을 무너뜨린 전쟁이고, 이는 상기 서술하였듯 단일 군주제의 한계를 명명백백 드러내는 결과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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