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는 어떻게 강대국 대열에 끼었는가?

원래부터 강자였던 자에게 총을 쥐어주는 것보다는, 원래 약자였던 자에게 총을 쥐어주는 것이 더 위험하다. 둘 모두 도덕적이지 않다는 가정 하에, 강자는 원래부터 할 줄 아는 것이 힘쓰는 것밖에 없기에 힘의 논리와 근본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 힘이란 함부로 휘둘렀다가는 막대한 책임을 져야하며, 설령 힘을 휘두를 일이 생기더라도 주변의 다른 강자들의 눈치를 보아야만 한다는 것을 강자는 알고 있다. 그러나 약자에게는 그러한 통찰이 부족하다. 난생 처음으로 힘이라는 것을 가져본 약자는, 어떻게든 자신의 억울했던 과거를 새로 가진 힘을 통해 보상받고자 한다. 때문에 더욱 용감하고 더욱 과감하며 더욱 무질서하다.


이탈리아가 딱 그러한 꼴이었다. 180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간신히 통일국가를 이룩한 이탈리아(이탈리아 통일에 관해서는 본 블로그 근대유럽사 참조)는 난생 처음(은 아니겠지. 로마 시대가 있었으니)으로 강대한 국력을 가진 이후, 영/프 등 기존 열강을 따라하기에 급급했다. 특히나 이탈리아는 지중해 건너 북아프리카와 영/프가 미처 가지지 못한 에티오피아 지역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고, 1~2차 세계대전의 복잡한 정세를 틈타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기회주의적 외교를 고집했다. 평화로운 상황이었다면야 이탈리아가 외교적으로 왕따가 되고도 남았을 일이지만, 이 시기에는 독일이 전 유럽의 어그로를 홀로 끌어주고 있었다.


1차대전의 이탈리아 : 본래 이탈리아는 1882년부터 독-오-이의 삼국동맹의 일원이었다. 그러나 1차대전의 형국이 독일의 판단(슐리펜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을 목도한 이탈리아는 차라리 지중해 제해권을 가진 연합국 측에 서기로 했고, 삼국동맹은 공격동맹이 아닌 방어동맹이라는 이유로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배신한다. 이탈리아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본래 1차대전의 개막 자체가 오스트리아의 세르비아 침략행위로 시작됐으니까. 거기에 더해 이탈리아는 원래 통일 과정에 있어서도 오스트리아와 경합하는 사이였다. 이는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니스와 사보이를 프랑스에 넘겨주면서까지 오스트리아를 견제하고자 했던 역사(http://aceferr.tistory.com/61 참조)에서 드러난다.



이러한 이탈리아-오스트리아 간 악감정을 이용하여 이탈리아를 구워삶은 것은 영국이었다. 이탈리아가 연합국 측에 서서 1차대전에 참전하기 이전, 1915년 4월에 영국은 이탈리아 측에 전후 오스트리아령 Brenner pass(트렌티노Trentino부터 South Tyrol까지)와 트리에스테Trieste, 피우메Fiume(현재 피우메 자유국)를 약속한다. 제안도 제안이거니와, 전쟁 상황도 보아하니 차라리 연합국의 편에 서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이탈리아는 전쟁 발발 1년 쯤이 지난 1915년 5월 추축국에 선전포고를 한다.


뭐 밑에서도 알아보겠지만 이탈리아는 독-오를 상대로 철저히 짓밟힌다. 이탈리아는 이탈리아군의 졸전 기록으로도 유명한데, 2차대전 때에는 수도가 함락하기 일보 직전이었던 프랑스 패잔병에게조차도 패배하는 행태를 보인다. 사실 이탈리아 입장에서도 억울한 면은 있는데, 통일이 되었다고는 해도 이탈리아는 여전히 강대국으로서의 군사적 역량이 한참 부족했다. 그렇다면 똑같이 1800년대 중반에 들어서야 통일한 독일은 어떻게 강대국이 되었느냐? 독일엔 프러시아가 있었잖아... 이탈리아는 이탈리아 반도의 고만고만한 도시국가들이 합쳐진 집합에 불과했기 때문에 통일이 된 이후에도 그다지 포텐셜이 터지지 못했다. 여하튼간에 본국은 졸전을 했지만서도 전체 전쟁에서는 연합국이 승리했으므로 이탈리아는 승전국이 된다. 많은 피를 보고나서야.


무솔리니의 등장 : 전후 승전국이 된 이탈리아는 실제로 영국과의 협정에서 피우메Fiume를 비롯한 약속된 대부분의 지역을 받지 못했다. 그 지역들의 다수민족이 게르만인이거나 슬라브인이었기에 연합국은 민족자결주의를 어겨가면서까지 이탈리아의 소원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이탈리아가 그만큼 함량미달 참전국이기도 했고. 이탈리아는 자신들이 흘린 피에 비해 이 보상이 한참이나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다시금 북아프리카와 발칸 반도에서의 이권을 주장하며 연합국 눈 밖에 나게 된다. 이 때부터 이탈리아는 현상타파적인 면모를 보이게 된다. 특히나 다눈치오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 극단 민족주의 세력은 피우메를 침공하였는데, 막상 이탈리아 정부가 연합국의 눈치를 보며 피우메를 양보하면서 이탈리아 내부에서는 강력한 지도자에 대한 요구가 발생한다.



이 즈음하여 1920년대 초에 등장한 것이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이다. 사실 집권과정이나 지지기반이나 독일 히틀러의 등장과 유사한 면이 매우 많기 때문에 실제로 히틀러가 무솔리니의 사상(사상이랄 것도 없었지만)과 집권과정을 벤치마킹하기도 했다. 독일과 다른 점이라면 아무도 이탈리아에 관심을 주지 않았다는 것 정도. 이탈리아는 1차대전으로 경제가 피폐해져 있었고, 이탈리아 왕 또한 이러한 국가 분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무솔리니를 1922년 총리로 임명한다. 이윽고 무솔리니는 득표수에 관계없이 집권당은 무조건 의석의 2/3를 차지한다는 법안을 통과하여 이탈리아의 독재 시대를 개막한다. 무솔리니는 유고슬라비아의 내분을 이용해 피우메를 재점령하고 알바니아를 보호령화한다.


대독 포위망으로서의 이탈리아 : 기회주의자들은, 기회가 없을 때는 입닥치고 죽어지내는 것이 상책이다. 히틀러가 집권하며 유럽의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연합국은 다시금 독일을 예의주시하기 시작했고, 이탈리아 입장에서는 사방팔방으로 포위당한 독일의 편을 드느니 또 다시 연합국 측에 서는 것이 더 나았다. 이탈리아 입장에서 또한 독일의 팽창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었는데, 기껏 자신들의 종주국 행세를 하던 오스트리아를 쳐부수고 (물론 자기들이 쳐부순건 아니었지만) 이제서야 좀 잠잠해질 줄 알았는데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먹어버리면 모든 것이 무위로 돌아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계산 때문에 이탈리아는 히틀러 등장 초기까지만 해도 연합국에 비교적 협조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무솔리니-히틀러 간 관계가 애초부터 좋았다는 것은 오해에 불과하다.


에티오피아 침공 : 그러나 이탈리아가 곧바로 외교노선을 선회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음 글에서 좀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영/프는 나치 독일의 재무장에 대해 무력하게 방조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영국은 영독 해군협정(1935년)을 맺어 독일의 재무장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정책들은 볼셰비즘을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러한 논의는 다음 글로 미루고 이탈리아에 집중해보자. 이 사건으로 이탈리아는 영/프를 이빨빠진 호구로 보게 된다. 이탈리아는 다시금 강대국들 눈치를 보지 않고 팽창할 기회를 마주하게 되었으며,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독립국으로 남아있던 에티오피아(당시 아비시니아) 침공을 단행한다. 영/프는 이탈리아의 이러한 행보에 또다시 무기력으로 일관하며, 대독 포위망에 남아있어주기만 한다면 에티오피아 점령을 묵인할 것임을 약속했다. 그러나 한번쯤 눈감아주는 것은 가능해도 외교적 고립은 피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 때부터 이탈리아는 친독적인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스페인 내전 : 한편 스페인 또한 대공황을 피해가지 못했다. 혼란한 국정 속에 1931년 스페인 왕 알폰소 13세는 프랑스로 망명했고, 총선에서 스페인인민전선(공화당)이 승리한다. 스페인 공화당은 이내 교육의 세속화, 교회 재산 환수, 국영화 정책 등을 실시했는데, 이러한 급진적인 정책은 스페인 내 군부와 종교 인사 및 보수파를 자극했다. 공화당은 이내 군부를 비롯한 보수파를 탄압했고, 탄압당한 군부 인사 중 하나가 향후 스페인의 철권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 참모총장이었다.


프랑코를 주축으로 한 스페인 보수파는 스페인 식민지 모로코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모로코의 통제권을 얻는 데에 성공한다. 그러나 스페인 해군, 경찰, 수도 마드리드, 주요 공업도시 등은 공화파의 영향권 내에 있었다. 프랑코가 이끄는 보수파가 스페인 본토까지 진격하기 위해서는 지브롤터 해협을 도하하여 상륙작전을 벌여야 했는데, 일개 쿠데타군에 불과한 보수파에게는 이러한 전력 투사력이 없었다. 이에 프랑코는 반좌파/반공화주의적이던 독일과 이탈리아를 설득하는 데에 성공하여 수송선과 항공 병력을 지원받는다. 영/프는 스페인 내전이 유럽 전체의 전쟁으로 확전될 것을 두려워하여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았고, 소련도 공화파를 지원하긴 했으되 자국의 사정으로 인해 국제여단을 파견하는 데에만 그쳤다. 이윽고 프랑코는 스페인 본토를 손아귀에 넣고 스페인 민족주의 정부(팔랑헤 黨)의 총사령관이 된다.


이탈리아의 욕심은 이제 스페인에까지 미쳤다. 이 기회에 자신들의 역량을 내비쳐 보이고도 싶었으며, 자신들과 정치적 노선을 함께 하는 우방국을 건설할 욕심도 있었다. 또한 지브롤터 해협, 스페인의 항구 등의 전략적 가치 또한 무시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탈리아는 프랑코를 대규모로 지원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탈리아의 핑크핑크한 희망사항과 달리, 정작 프랑코는 2차대전 내내 독일-이탈리아 동맹에 가담하지 않는다. 이 때 연합국-이탈리아 간 관계는 막장으로 치닫게 되지만, 이제와 왕따인 것을 자기도 인정한 이탈리아는 더욱더 노골적으로 친독노선을 타기 시작한다. 여담이지만 피카소 작 <게르니카>는 스페인 내전의 처참함을 그린 작품이다.


골목대장 출신의 깡패, 일본

사실 일본 또한 이탈리아처럼 본격적인 열강이라고 불리우기에는 많은 결함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비슷하게 병신력을 뽐냈던 이탈리아가 강대국들의 틈 속에서 기회만을 엿보고 있을 때, 고만고만한 국가들 사이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를 단행했던 일본은 노는 스케일이 이탈리아와는 차원이 달랐다. 눈치볼 국가가 주변에 없다는 것은 상당히 크게 작용하는데, 2차대전 이후 독일이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었던 이유 또한 독일을 완전히 포위하고 분할점령한 연합국들의 견제 때문이었고, 일본이 여태껏 전쟁범죄 문제를 깔끔하게 처리하지 않은 것도 2차대전 직후 주변에 눈치볼 국가라고는 이제 갓 국공내전이 종식된 중국과 말 안해도 알 법한 한 반도국가 뿐이었기 때문이다.



1차대전의 일본 :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자만감에 도취되어 있었다. 일본은 1902년부터 영일동맹 체제 하에 있었고, 이를 빌미로 1914년 8월에 연합국 편에 서서 1차대전에 참전한다. 그러나 막상 중국 산둥반도와 북태평양 지역 舊 독일령 도서 지역들을 확보한 이후에는 군사작전을 중지한다. 일본군 자체가 유럽까지 파병할 능력이 없었던 데에 더해, 일본이 1차대전에 참전한 것은 해당 지역에서의 이권을 확보하기 위한 지극히 실리적인 이유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이러한 태평양 확장에 위기의식을 느낀 영국은 1917년, 일본 너네가 북태평양 먹고 우리 영국은 남태평양 먹을게 하는 밀약을 체결한다.


중국의 보호령화 : 동시에 일본은 중국으로의 침략을 노골화한다. 강대국들과 미국의 관심은 모조리 독일의 어그로를 향해 있는동안, 일본은 중국 위안 스카이에게 21개조 요구사항을 전송하여 중국을 사실상 보호령화하려는 시도에 착수한다. 위안 스카이는 일본의 요구를 모두 수용하는 수밖에 없었고, 연합국도 바쁜 와중에 동아시아 저멀리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가질 여지가 없었다.


적백내전 개입 : 중국을 보호령화하는 데에 성공한 일본은 이제 전쟁, 혁명, 내전으로 얼룩진 러시아로 눈을 돌린다. 미쳐 돌아가는 폭주 기관차에도 브레이크는 있어서, 일본 내부에서는 러시아 팽창이 연합국을 크게 자극할 수 있다는 자중론이 고개를 들게 된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는 언제든 시베리아 벌판에서 나대고 싶어했으며, 1차대전 이후 전쟁에 지친 연합국들이 일본 측에 적백내전 개입을 요청했을 때 못이기는 척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조신한 척 하던 일본은 연합국 승인서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7만명의 병력을 시베리아에 상륙시킨다. 이 병력의 대부분은 서부 러시아로 진군했지만, 일부 병력이 뚝 떨어져나와 만주의 동청철도Chinese Eastern Railway를 점령한다. 물론 적백내전에서 볼셰비키가 승리하면서 일본도 철수할 수밖에 없었지만, 일본의 팽창 모멘텀은 연합국들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워싱턴 회의 : 일본에 대해 위기감을 느낀 연합국, 특히 해상에서의 경쟁자였던 영국과 미국은 일본을 외교적으로 고립시켜 압박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에 1921년 워싱턴 회의를 개최하였고, 여기에는 태평양과 중국 등지에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미/영/프/이/중/일 등이 참여한다. 이때 4개국 조약(태평양에서의 미/영/프/일 상호영향권 존중과 영일동맹 파기), 9개국 조약(중국의 주권 보장), 5개국 조약(해군군축조약. 배수량 1만톤 이상의 주력함 보유 규제)가 체결된다. 대다수의 내용이 일본의 팽창을 방해하는 내용이었으나, 5개국 조약에는 일본이 군축을 단행하는 대신에 영국과 미국이 싱가폴/북오스트레일리아/서하와이에 신규 해군기지를 건설하지 않겠다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어 일본에 유리하게 작용한다. 해군 군축 자체도 일본 측에 불리할 것이 없었던 게, 어차피 일본은 군비 증강을 단행할만큼 부유한 국가가 아니었다.


중국의 상황 : 중국에서도 민족주의와 볼셰비즘은 출현했다. 1919년 5/4운동이 중국 민족주의의 발로이며, 중국 공산주의 세력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지지기반 확보에 매진했다. 그러나 청 왕조 붕괴 이후 중국은 다수의 지방 군벌들이 군웅할거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통일된 움직임은 나타나지 못했다. 이에 중국 국민당 장개석(장제스)는 1차 북벌(1926)을 통해 소련 세력을 배척하고, 2차 북벌(1928)을 통해 일본과 결탁한 만주 군벌을 흡수하여 명목 상의 중국 통일을 달성한다. 그러나 이 통일 또한 지방 군벌들이 중국 국민당을 중심으로 연합을 맺은 형세에 불과하였으며, 여전히 중국 각 지역은 군벌의 실질적인 지배 하에 있었다.


일본의 대중국정책 : 인구가 급증하고 있었던 1920년대의 일본은 해외 수출입시장에 목말라 있었다. 당장 일본 본국의 농업생산으로는 나날이 증가해가는 인구를 감당하기에 버거웠고, 조선을 탈탈 털었지만 그것으로도 모자라는 감이 있었다. 따라서 국민당을 몰아내고 중국으로 다시 팽창하는 것은 일본에게 매우 절실한 문제였다. 특히나 대공황이 발생하면서 일본도 이를 피해가지 못했는데, 수출주도의 산업구조를 가지고 있었던 일본은 심하게 타격을 받는다. 쌀과 무명의 가격이 폭락하면서 일본 농촌경제가 붕괴했고, 농촌에서 징집한 병력이 대부분이었던 일본군의 전력에도 피해가 생겼다. 이로 인해 일본은 새로운 성장동력에 목말랐고, 그 성장동력이라고 짚은 곳이 바로 아시아의 웨스턴, 만주였다.



만주사변 : 1929년에 대공황이 몰아치면서 그나마 1920년대에는 제대로 돌아갔던 일본 민주정이 완전히 붕괴하게 된다. 이로 인해 군부가 득세하게 되었는데, 그나마 군부라도 통일되어 있었다면 좋으련만. 군부도 육군과 해군이 나뉘어 파벌을 만들고 투쟁하고 있었다. 일본 육군과 해군의 폭주는 일왕이나 대본영이 나서서 교통정리를 할 수 있는 선 바깥에 있었으며, 이들의 팽창정책은 중국에서 만주사변을 낳고 태평양에서 진주만 침공을 낳았다.


만주사변의 경우, 원래 중국 주둔 일본군인 관동군이 독단적으로 일으킨 사건이었다. 일본 관동군은 선양 지역의 남만주철도를 폭파하고, 이를 중국의 소행이라고 우겼다. 이내 관동군은 선양을 점령, 1931년 말에 이르러 남만주의 대부분을 장악한다. 웃기는 것이 이 사안에 대해 일본 본국은 관동군의 자제를 명령했지만, 막상 사건이 터지고나니 "이미 벌어진 일. 어쩔 수 없다."며 관동군의 행태를 변호하고 나선 것이다. 이내 중국이 일본에 대한 경제적 보이콧으로 대응하자, 1932년 초 일본은 상하이를 폭격하여 중국의 백기를 얻어낸다. 이제금 일본은 만주 지역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게 되었고, 만주에는 1932년 일본의 괴뢰국 만주국이 설립된다. 이 만주국의 황제가 영화 <마지막 황제>에 등장하는 푸이, 청의 마지막 황제이다. 자세한 내용은 http://aceferr.tistory.com/79 참조.


그러나 이러한 일본 팽창에도 연합국은 그저 속편했다. 그들의 제1어젠다는 다름아닌 독일이었을 뿐 아니라, 중국 중남부/남태평양/동남아시아와는 달리 만주지역은 유럽 연합국들이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가진 지역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만주의 위치가 소련 아래다보니, 일본이 소련을 견제해줄 것이라는 기대심리도 적지않게 작용했다. 거기에 더해 워싱턴 회담 5개국 조약에서 미/영이 태평양 지역 신규 해군기지 건설을 포기함으로써 일본의 폭주를 막을 수 있을만한 방도도 마땅히 없었다. 일본은 이후 더욱 모험적인 외교를 하게 되고, 이 과정은 히틀러가 모험적인 외교를 단행하는 이유와 닮아있다.


중일전쟁 : 연합국들이 만주사변에 대해 이렇다할만한 조치를 취하지 않긴 했어도, 일본이 외교적으로 고립된 것만은 확실했다. 이에 일본은 1935년 해군군축에 관한 5개국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1936년 나치 독일과 반코민테른(반공산주의) 협정을 체결한다. 또한 1937년에 이르러 국민당 치하의 중국으로 다시 마수를 뻗치는데, 일본 관동군은 국민당 수도 남경(이때 일어난 것이 남경대학살)을 비롯한 중국의 인구밀집지역, 산업지대, 주요 항구, 철도를 모조리 장악하는 데에 성공한다. 그러나 국민당 세력은 공산당과 제2차 국공합작을 통해 일본에 대항한다. 중국 합작세력은 여전히 내륙에 생존하여 있었고, 일본에 대한 게릴라 전술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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